cheat day RAW novel - Chapter 39
치팅데이 39화
9. 일어서다(5)
어제 저지른 폭식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죄책감은 자꾸만 깊어져 우울한 상태로 종일 시간만 죽였다.
아침도 점심도 거르고 오전에 했어야 할 일은 시작조차 못 했다.
경험적으로 이 상태가 무척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고작 식탐 때문에 지난 6주 동안의 내 노력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 응원을 등진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와 어울려 주었던 그들을 배신했으니까.
“…….”
멈춰야 한다.
우울증이 무서운 이유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점이다.
머리로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추락하는 생각과 마음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천천히 침대 밖으로 나섰다.
꼼짝도 하기 싫지만, 밖에 나가기는 더더욱 꺼려지지만 그래도 나가야 한다.
음악을 들으며 약간 숨이 벅찰 정도로 걸어야 잡념을 잠시라도 떨칠 수 있다.
그 상태가 오면 다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될 거다.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대강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집게와 종량제 봉투를 챙겨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없다.
시간도 정하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 리스트 중에 아무 거나 선택한 뒤 천천히 발길 닫는 대로 걸을 뿐이다.
발이 무겁다.
무거운 걸음만큼이나 무겁고 천천히 피아노 건반이 울린다.
숨이 턱하니 막히는 피아노 솔로 뒤로 오케스트라가 낙조처럼 펼쳐진다.
‘뭐였더라.’
곡 제목이 궁금하지만 굳이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우아하고 장대한 선율에 기대어 노을 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가 때로 바닥을 보았다.
알 수 없는 마성으로 사람을 잔뜩 긴장시켜 놓고선.
이내 이어지는 아름다운 피아노 건반은 마치 가로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마냥 눈과 가슴을 적신다.
2호선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 입구에 도착할 무렵 이 곡이 무엇인지 기억났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우지니어스에 업로드된 라흐마니노프 소개 영상을 편집할 때 줄기차게 들었던 곡이다.
내가 아는 클래식이야 백우진이 소개한 곡뿐인데.
이 곡은 유독 마음에 들어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해 두었다.
‘오랜만인데.’
난 이 곡의 1악장을 참 좋아한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비장하게 울리는 호른과 우아한 피아노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울린다.
‘라흐마니노프는 1번 교향곡을 크게 실패했어요. 초연 이후 4년 동안 곡을 쓰지 못했죠. 하지만 1901년 11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본인이 직접 연주하면서 재기에 성공합니다.’
‘당대에는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엄청나게 어려운 곡이었고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대작이죠.’
‘그만큼 라흐마니노프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 곡이지만, 1번 교향곡의 실패 이후 4년 동안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곡이기도 해요.’
‘세기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조차 큰 실패를 경험하고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죠.’
‘라흐마니노프의 4년은 실패로 끝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는 명곡을 만든 기간으로 남았습니다.’
편집하면서 10번 이상은 들었던지라 백우진이 대강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4년이란 시간이 슬럼프가 아닌 시대의 명곡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단 말이 인상 깊다.
백우진이 여러 예술가를 소개할 때 종종 꺼내는 말이기도 하다.
‘위대한 예술가 파블로 피카소는 13,500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우리가 아는 그의 그림은 열 손가락으로도 셀 수 있습니다. 그럼 피카소의 나머지 13,490점을 실패한 그림으로 봐야 할까요?’
그럴 리 없다.
파블로 피카소의 13,490점은 라흐마니노프의 4년과 같다.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성장한다.
굳이 라흐마니노프나 피카소처럼 대단한 사람을 예로 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을 예시로 소개하는 이유는 충격을 주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이 천재로 여기는 이들조차 실패를 겪는다는 진실은 나 같은 사람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실수 좀 해도 된다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 성과를 거둘 거라고.
그것이 설령 인류 역사에 기록될 일이 아니라도 내게는 분명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해준다.
6주 동안 하루에 3번씩 산책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 일이라거나.
하루에 8시간 이상 편집 공부를 했더니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 일이라든가.
4~5년 여러 유튜버의 영상을 편집했더니 그들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일도.
큰 성과는 없어도 꾸준히 진행한 개인방송 경험 덕분에 말문이 트인 일에 최근 큰 반응을 보인 백반토론까지.
모두 작은 일 하나하나가 모인 결과다.
그 사이에 작은 오점은 있었다.
밥 먹고 산책하기 귀찮아 몇 번 정도는 빼먹었고.
하루에 8시간 공부했다곤 해도 중간중간 유튜브를 보며 딴짓한 적도 많다.
여러 유튜버 영상을 편집하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요청만 받기도 했다.
개인방송도 꾸준히 한다곤 했지만 방송 주기가 일정치 못한 게 사실이다.
백반토론에서 재미없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
그래. 어제도 마찬가지다.
비록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식했지만, 그 일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망가지는 건 아니다.
또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다 보면,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게 가치 있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후우.”
아직 날이 찬데 등이 다 젖었다.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안경알에 떨어져 난리도 아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이미 끝났고 다른 곡이 재생되고 있다.
가져온 종량제 봉투에도 쓰레기가 제법 찼다.
돌아가자.
씻고 웃는 얼굴로 방송을 켜야 한다.
* * *
방송을 켜니 금방 1,8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반하
└오늘 뭐 함?
└ㅁㅊ 사람 왤케 많아
└여기 이런 데 아닌데
└방장 문 열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사람들이 늘어나 전처럼 한 사람, 한 사람 닉네임을 읽을 수 없다.
시청자가 적을 때는 도란도란한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와 소통하려면 방송이 늘어지고 만다.
그 점이 못내 아쉽다.
“오늘은 어느 분이 댓글로 라면 월드컵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또 라면 전문가이기 때문에 소개 좀 드리려고요.”
└굿굿
└썰방송이 최고지
└ㅋㅋㅋㅋ할 거 없었구만
└오짬 우승!
└신라면이 1등 아님?
온갖 라면이 다 언급된다.
“매출이 다가 아니죠. 매출하고 맛은 비례 관계지 정비례는 아니에요. 그럼 시작해 볼게요.”
라면 월드컵을 시작했다.
아이콘을 누르니 시작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가 등장했다.
얼큰한 너구리 vs 스낵면이다.
“이건 너무 쉽다. 얼큰한 너구리는 기본맛보다 살짝 맵죠? 그리고 스낵면은 예전에 TV에서 밥 말아 먹을 때 가장 맛있는 라면으로 소개된 적 있어요. 또 아가들. 얼라들이 좋아하는 라면이죠.”
└이건 너구리지
└스낵면 맛있지
└얼라ㅋㅋㅋㅋㅋ
└맞아. 스낵면은 너무 심심함.
└그냥 너구리면 몰라도 얼큰한 너구리는 못 참지
예상대로 얼큰한 너구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근데 난 매운 거 싫어.”
스낵면을 선택하자 채팅창에 물음표가 도배되었다.
“나 아기 찬용. 애기 입맛이라서 스낵면이 더 좋아.”
└구아아아악
└제발 그러지 마요
└ㅋㅋㅋㅋㅋㅋ정색하게 하넼ㅋ
└당저씨 귀여워
다음은 감자면 vs 김치라면이다.
“감자면. 제가 또 강원도 출신이라 감자 전문가거든요? 감자로 만든 건 대부분 다 쫄깃하고 맛있어요. 근데 전 김치라면 가겠습니다.”
└???
└김치라면 싸서 좋아
└매운데?
└일관성이 없잖아. 아깐 맵다고 싫어 했으면서 이번엔 매운 라면 고르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 감자는 강원도죠? 김치는 뭐야. 대한민국이야. 당연히 김치가 이기지. 매국노세요?”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젠 시청자들한테도 가불기 날리넼ㅋㅋㅋ
└그치ㅋㅋㅋㅋ 대한민국 안에 강원도가 있짘ㅋㅋㅋㅋ
“사실 감자면은 몇 번 안 먹었어요. 여러분도 그럴걸? 근데 김치라면은 고시원 살 때 주인 아저씨가 많이 사던 라면이에요. 아까 누가 말했는데 싸니까. 그래서 추억 보정 좀 줬어요.”
김치라면을 선택하니 진라면 매운맛 vs 왕뚜껑이 나왔다.
빅매치다.
“이건 좀 어렵네. 진라면 매운맛은 한창 맵부심 부리고 다닐 때 진짜 좋아했어요. 근데 사실 왕뚜껑도 맛있단 말이야. 특유의 가는 면발이랑 뚜껑에 받쳐 먹는 그 재미가 있어. 안에 들어간 콩고기도 맛있고.”
살짝 고민이 된다.
“내 생각에 맛은 비슷해. 근데 컵라면은 한계가 좀 있어. 계란이라든가 파 같은 거 넣기 좀 힘들잖아. 진라면 매운맛으로 갈게요.”
다음은 짜파게티범벅 vs 수타면이다.
고민도 하지 않고 짜파게티 범벅을 선택했다.
“여러분 방금 건 진짜 고민할 이유가 없어. 어릴 때 수영장에서 놀다가 나와서 먹는 짜장범벅. 그 맛 못 잊습니다.”
└미친 나도 먹었는데
└수영하고 나와서 먹는 컵라면 맛있지 ㅋㅋㅋㅋ
└아깐 컵라면 한계가 있다며!
└매워서 그런 듯ㅋㅋㅋㅋ
└이 방송에서 정상적인 논리 찾는 것만큼 무모한 짓도 없음
“짜장범벅은 진짜 사기예요. 크게가 작은데 분말스프는 엄청 많이 있잖아. 그래서 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먹어도 되거든? 그 짜장 소스가 예술이야. 제가 얼마 전에 하나에 2만 원 넘는 짜장면 먹었거든요? 그때 감격이 수영장에서 먹었던 짜장범벅 이후로 최고였어. 그만큼 수영장 짜파게티범벅은 대단하다.”
다음은 참깨라면 vs 순한 너구리다.
“어? 뭐야? 순한 너구리?”
앞에 나왔던 얼큰한 너구리가 나중에 출시된 너구리인 줄 알았는데, 순한 너구리라고 옅은 황토색 포장지의 너구리가 나왔다.
└저게 오리지날임ㅋㅋㅋ
└순한 건 맛 없음
└우동 느낌으로 괜찮던데
└너구리가 벌써 두 번이나 나오네
└너구리 강점기
“참깨라면은 저 대학 가서 처음 먹었던 거 같아요. 안에 계란 블록이랑 고추기름이 있어서 되게 럭셔리한 라면이었어. PC방에서 먹기 좋았지. 근데.”
순한 너구리를 언제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착각을 했는지 기본 너구리가 있고 얼큰한 너구리가 따로 나온 줄 알았는데, 순한 너구리가 기본 너구리라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
“참깨로 갈게요. 계란 있으니까.”
다음을 누르니 도저히 고를 수 없는 문제가 등장했다.
라면볶이 vs 스파게티다.
“와.”
손이 절로 머리로 향했다.
“여러분 이거는 진짜 안 돼. 와. 우진이한테 전화해 볼까? 뭐가 더 나은지?”
└백반 토론임?
└ㅇㅇ!
└좋아 좋아
└월요일에도 즐기는 백반 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