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45
치팅데이 45화
10. 홍당무 엔터테인먼트(5)
주지승에게 언질을 받고 나서 일주일이 흐른 시점에 홍당무 엔터테인먼트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발신인이 묵은지 대리가 아닌 김서진 대리다.
기존 계약 관련 업무를 묵은지 대리로부터 이관받았다는 내용과 함께, 다시 한번 이야기 나눌 수 있겠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내심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와 계약 맺을 생각이 있던지라 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미팅 자리를 가졌다.
약속 장소로 나가니 멀끔하게 생긴 30대 중반 남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김서진입니다.”
“안녕하세요. 반찬용입니다.”
“음료는 어떻게 주문할까요?”
“아,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로. 차갑게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김서진 대리가 주문을 하러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투성이다.
보통 담당자를 교체하게 되면 전임이 상황 설명을 할 텐데, 묵은지는 내게 연락이 없었다.
혹시 오늘 같이 만나려고 하나 싶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기다리셨죠.”
“아니요. 감사합니다.”
커피보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곧장 물었다.
“묵은지 대리님은 어떻게 되신 거예요?”
“아. 이메일로 말씀드렸듯 담당 업무가 변경되어서 제가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워서요. 어떤 사정인지 알 수 없을까요?”
김서진 대리가 음료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서 말씀드리기 망설여지는데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되실 테니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네.”
“묵은지 대리가 기존에 고객들 그러니까 반찬용 씨 같은 유튜버를 상대로 편법을 쓰고 있단 게 드러났습니다. 해서 현재는 계약 업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예? 무슨 편법을.”
김서진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깍지를 꼈다.
“크리에이터들에게 채널을 키운 뒤에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자는 말을 하고 다녔는데. 혹시 찬용 씨에게도 그렇게 설명하던가요?”
“네. 그게 무슨 문제라는 말씀이신지.”
“저희 홍당무는 발전 가능성이 있는 크리에이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묵은지 대리는 더 좋은 조건을 줄 수 있다는 핑계로 그런 분들에게 홍당무와 함께할 기회를 박탈했죠.”
이상하다.
“저희가 성과제라 조금이라도 더 영향력 있는 크리에이터와 계약하려던 의도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때문에 계약을 하고 싶어도 못 했던 분들이 많더라고요.”
“잠시만요.”
“네.”
“묵은지 대리님은 제 상황에 맞춰 주셨어요. 지금 일정을 소화하기에도 바빠서 일을 더 할 수 없었거든요.”
홍당무가 일을 더 잡아준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다.
“채널이 성장하면 다른 일은 홍당무에 맡기고 방송에만 집중하라고 들었어요.”
“그러셨군요.”
김서진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죠.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도움을 받는다면 방송에 더 집중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채널도 성장세에 접어들었으니 정말 중요한 시기에 방송에만 전념하고 싶으실 테죠. 그런데 굳이 이 좋은 기회를 다음으로 미룰 이유가 있을까요?”
계약 조건 때문이다.
그리고 채널의 정체성 문제다.
본래 먹방 채널에서 시작한 반찬가게는 이제 막 채널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단계에 있다.
기존 구독자와 유입된 구독자들에게 반찬가게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고.
나 스스로 채널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정립하고 있다.
그 때문에 콘텐츠 고민을 계속 해왔었다.
백반 토론, 이상형 월드컵, 반찬을 만들어 주지용, 언제까지 뚱할 거야, 맛집을 찾아서 등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고.
그중에 좋은 반응이 나오는 콘텐츠를 위주로 재편성에 들어갈 것이다.
“찬용 씨.”
김서진 대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현재 반찬가게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보이는 콘텐츠는 백반 토론입니다. 다른 아이템은 잠시 접어두고 백반 토론을 중심으로 잡고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서 연결해 드리는 일에 집중하시면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얻으실 거예요.”
“……그렇겠죠.”
“그렇습니다. 계약 조건도 걱정하실 이유가 없는 것이 기간을 1년으로 잡으면 됩니다. 1년 후 재계약할 때 비율을 조정하면 되죠. 찬용 씨라면 1년 동안 크게 성장하실 테니까요.”
콕 집어 틀린 말을 하진 않는다.
그러나 난 이 사람을 신용할 수 없다.
“혹시 제 방송 보시나요?”
“그럼요. 백반 토론 첫 회부터 빠짐없이 보고 있는 걸요.”
“반찬을 만들어 주지용이나 언제까지 뚱할 거야는.”
“물론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그걸 왜 하는지도 아시나요?”
지금까지 막힘없이 대답하던 김서진 대리가 처음으로 망설였다.
그는 난감한 심경을 감추려는 듯 웃어 보였다.
“저는 굉장히 똑똑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어떤 점에서요?”
“다른 분들과 협업하면 유입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짐꾼이나 반야식경 같은 대형 채널이면 더할 나위 없죠.”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방금 백반 토론에 집중하고 나머지 일은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해 준다고 하셨죠?”
“네.”
“그럼 언제까지 뚱할 거야나 반찬을 만들어 주지용도 그만 두라는 말씀이시고요.”
“그건.”
“대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홍보 효과가 있는데 굳이 왜 다른 일을 해야 하나요?”
“아하하. 제 말이 잘못 전달된 듯합니다. 과정이나 근거가 좋아도 사실 결과가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백반 토론과 달리 양쪽 채널에 동시에 업로드되는 언제까지 뚱할 거야나 반찬을 만들어 주지용은 조회 수가 나뉘지 않습니까? 짐꾼, 반야식경에 올라가는 영상 조회 수가 훨씬 크기도 하고요. 그러니 반찬가게만의 콘텐츠가 필요하고, 그걸 홍당무가 준비해 드리겠단 뜻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내게 ‘언제까지 뚱할 거야?’와 ‘반찬을 만들어 주지용’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른다.
두 콘텐츠는 단순히 조회 수만을 바라보는 영상이 아니다.
내가 건강히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배우고, 집에만 박혀 있는 일상에 활력을 주는 시간이다.
그러한 일을 그만두라는 말은 내게 삶을 포기하란 뜻이고.
알면서도 얘기한다면 날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조회 수를 내는 유튜버로 여긴다는 말이다.
나를 사업 파트너가 아니라 고객으로 여기는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고민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날 잡으려는 김서진 대리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인수인계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던 묵은지 대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당분간 계약 업무 빠지고 서진 대리 일이나 도와.’
몇 번의 마찰 끝에 팀장은 묵은지를 업무에서 제외시켰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크리에이터와의 관계를 무시하는 지시만큼은 따를 수 없었다.
김서진을 도우라는 말도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다.
회사에 시스템도 갖춰지기 전에 입사하여 처음부터 기틀을 쌓아 온 그녀는 울컥하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팀 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인터넷 방송인을 홍당무로 데려왔고.
자진해서 추가 근무를 할 만큼 성실했거늘 본인이 왜 이런 처사를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인데.
취업준비생 시절부터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끊임없이 채웠을 뿐인데 회사는 이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또 요구했다.
흔히 사회생활이라고 말하는 팀장에게 잘 보이는 일인지, 줄 대는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매우 부당하다는 느낌은 분명히 받았다.
‘부당한 지시에 따를 순 없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단기 성과만 좇다 보면 분명 문제가 발생합니다. 홍당무와 크리에이터는 파트너입니다. 작은 부분부터 신뢰를 쌓아가야 합니다.’
‘저는 파트너가 될 사람들을 속인 적 없습니다.’
‘그들의 상황에 맞춰 설명했을 뿐입니다.’
‘대체 왜 제 말을 믿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팀장님도 여러분도 제가 어떻게 일하는지 그동안 보셨잖습니까?’
‘…….’
묵은지가 팀원들을 둘러보았지만 누구 하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시선을 회피하는 태도를 접하고 나서야 그들이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음을 깨달았고.
묵은지는 스스로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내 회사, 내 직장을 이토록 허무히 포기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부우웅-
그녀의 낡은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대리님, 오늘 김서진 대리님 만났는데 아무래도 납득이 안 돼서요. 혹시 만나 뵙고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오후 7:01
반찬용이 보낸 메시지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동안 연락했던 크리에이터들 한 명, 한 명에게 사정을 직접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비록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담당하던 사람은 아니지만, 관련 이야기를 나눴던 터라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묵은지 대리는 반찬용과 약속을 잡고 작성 중이던 문서를 저장했다.
* * *
“아. 여기요.”
오후 9시.
묵은지 대리가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근처까지 와 주었다.
그녀는 전보다 헬쑥해진 모습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바쁘신데 무리해서 나오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약속 시간은 묵은지가 정했지만 피곤해 보이는 얼굴과 다소 슬픈 표정 그리고 한눈에 봐도 문제 있어 보이는 혈색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아닙니다. 저도 처리할 일이 있어서.”
“식사는 하셨어요?”
걱정스레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을 피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황당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부 사정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려우나 일신상의 문제로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묻기 힘든 대답이다.
계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개인적인 문제를 물어보는 건 실례다.
“쓸데없는 사족일 수 있지만.”
묵은지가 잠깐의 침묵 뒤에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반찬가게는 앞으로 더 성장할 겁니다. 어쩌면 반찬용 씨의 예상보다 빠를 겁니다.”
묵은지가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냈다.
“그동안 반찬가게 채널에 관련된 정보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매일 확인하셔서 잘 알고 계실 테지만 데이터로 전환한 정보를 보시면 현 상황을 보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문서를 슬쩍 펼쳤다.
그곳에는 내가 업로드한 영상이 시간대 별로 조회 수가 어떻게 증가했는지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오후 9시부터 10시까지 조회 수가 가장 큰 폭으로 늘었으니 그전에 영상을 게시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분석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앞으로 어떤 요일에 업로드를 해야 하는지, 어떤 영상의 썸네일이 효과적이었는지, 현재 시청자들이 무엇을 즐기는지도 분석되어 있었다.
“이거…….”
아직 계약도 맺지 않은 내게 이렇게까지 해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모든 기획자가 이렇게 일하진 않습니다. 다른 분과 계약을 진행하신다면 그 사람만의 방식이 있을 테니 반찬용 씨와 잘 맞는 분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묵은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던 부분은 그대로 진행되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채널 성장 이후에 계약을 맺자는 말이다.
김서진 대리와의 대화를 통해서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입장이 달라졌음은 이미 확인했다.
“네. 어제 김서진 대리 만나서 이야기 들었어요.”
“……그렇습니까.”
묵은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기색은 아니고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분명 무슨 일이 있다.
“궁금하신 점이 해소되었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잠시만요.”
묵은지가 서둘러 일어나려고 하길래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싶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는 모르고. 또 주제 넘은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을.”
“어제 김서진 대리님 만나고 확실해졌어요.”
묵은지 대리는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았다.
“제가 계약을 맺기로 마음먹은 이유요. 홍당무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묵은지 대리님 때문이었어요. 감사합니다.”
“…….”
“정말이에요. 홍당무가 진짜 인재 놓친 거라고 생각해요.”
묵은지가 입술을 다시 우물거렸다.
여태 가면이라도 쓴 것마냥 무표정했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끝내 묵은지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카페를 나섰다.
뭔가 마음에 담아둔 일이 많아 보이는데, 저럴 때는 달달하고 폭신한 케이크가 최고다.
서둘러 카페 점원에게 가 조각 케이크 두 개를 서둘러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