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48
치팅데이 48화
11. 대기업(3)
일주일 뒤.
반찬가게 법인을 설립하고 작은 사무실도 빌렸다.
임원은 어머니고 직원은 한 사람뿐이지만 어찌되었든 내 회사가 생겼다.
생각만 했을 땐 이게 될까 싶기도 하면서 조금은 감격스러웠는데.
막상 일을 벌리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자료도 찾아보고 상담도 받는 등 주변의 도움을 받아 어찌저찌 회사를 차리긴 했는데.
설레기보다는 망하면 어쩌지 싶다.
나야 내 책임이라고 쳐도 이젠 직원까지 있으니 책임감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후우.”
컴퓨터를 설치한 뒤 허리를 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목에 걸어둔 수건으로 닦으니 묵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새 본인 책상 정리를 끝내고 먼지 쌓인 물품을 닦고 있다.
“은지 씨, 잠깐 괜찮아요?”
“네.”
테이블에 앉으니 묵은지도 대강 정돈을 하고 맞은편에 자리했다.
준비해 둔 근로계약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쭉 한번 읽어보세요. 말씀드렸던 대로 내용 그대로예요.”
묵은지에게 제시한 연봉은 4,200만 원이었다.
대기업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어서 실수령액이 월에 300만 원이 되도록 맞춘 액수였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치였지만 묵은지에게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조건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망설임없이 서명을 한다.
“잠깐만요.”
서명하기 전에 다시 확인할 내용이 있다.
“저번에 한번 말씀드렸고 계약서에도 적혀 있지만 확인 차 다시 말씀드릴게요.”
“네.”
“회사가 성장하기 전에는 상여금 드리기가 힘들 거예요. 그래도 꼭 최대한 챙겨볼게요. 지금으로선 이렇게밖에 말씀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휴가는 당분간 어려울 수 있지만 급한 일 있거나 아프면 얘기해 줘요.”
“4인 이하 사업장에는 연차 유급휴가 규정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사실 규정이 없거나 한정적, 편향적인 것을 이용해 편법을 사용하는 업체가 너무나 많다.
나 또한 그런 회사에 다니면서 불합리한 일을 많이 겪었는데.
힘들게 키운 반찬가게가 누군가에게 그런 회사처럼 보이게 둘 순 없다.
“시작 단계니 융통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고마워요.”
다음은 묵은지의 역할이다.
“은지 씨가 해줄 일은 콘텐츠 기획이에요. 대본을 쓴다든지, 정보를 정리하거나 방송용 자료를 만들어 주면 좋겠어요.”
“네.”
“그리고 제게 오는 연락을 대신 받아줬으면 해요. 답장도요.”
“대표님 의사를 확인하고 진행하겠습니다. 결재 서류가 편하십니까 아니면 구두가 편하십니까?”
“말로 해주세요. 어…….”
묵은지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좀 어색해서요. 둘뿐인데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안 됩니다.”
언제 봐도 단호한 사람이다.
“그 부분은 천천히 바꿔보도록 하고.”
“안 됩니다.”
“안 되고. 다음은 혹시 타자 속도 빨라요?”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문서 작업이라면 익숙합니다.”
“영상에 자막 넣을 건데, 대본 없이 하는 방송이 많아요. 백반 토론이라든가 반찬을 만들어 주지용 같은 경우요.”
“네.”
“제가 편집 영상 드리면 대사 타이핑해 줄 수 있어요?”
“문제 없습니다.”
다행이다.
이 정도만 해준다면 내게도 여유가 생긴다.
“그럼.”
묵은지가 마지막으로 근로계약서를 확인했다.
출퇴근 시간을 정하고 일정을 공유하자 시간이 꽤 흘렀다.
오후 1시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던 차, 계약서를 훑던 묵은지가 펜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복사를 해야 할 텐데.
밥 먹으러 나가는 길에 인쇄소라도 들러야겠다.
“복사기도 하나 사야겠어요. 통장 사본도 필요하고 의외로 쓸 데가 생기네요.”
“제품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중고로 살 거라.”
묵은지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어플을 켜 보였다.
당근이다.
“부탁드릴게요.”
“네.”
웃으며 부탁하니 묵은지가 자필 서명한 계약서를 내게 주었다.
이제 정말 반찬가게에 새 직원이 들어왔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이렇게 흔쾌히 나오실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서류철에 계약서를 끼워 넣으며 말했다.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보다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요?”
의외다.
“대기업 투자를 받았을 뿐이지 대기업은 아닙니다.”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이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를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고마워요. 사실 다른 회사 가셨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면접은 몇 군데 봤습니다만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왜요?”
“다들 홍당무를 왜 그만두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몇 군데에서는 대답을 피했는데 마지막 회사에서 집요하게 묻길래 상사에게 부당한 지시를 받아서 퇴사했다고 답했습니다.”
홍당무에도 묵은지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음은 분명해졌다.
대강 추측은 하고 있었고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서 캐묻지 않았는데, 굳이 알고 싶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요?”
“그곳에서도 부당한 지시를 받으면 항의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퇴사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압박 면접이라는 건가?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네요.”
“그럴 거라고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반대로 부당한 지시를 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면접관부터 질이 좋지 않아 보여 마음을 접었습니다.”
저 작은 몸에 어찌 그리 담이 큰지 신기할 따름이다.
면접관에게 위축되지 않고, 반대로 이 회사가 어떤지 확인하는 당당하고 합리적인 태도가 부럽다.
“그런 식이다 보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습니다.”
“음.”
“순순히 따르지 않는 부하직원을 쓰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
“예전에는 좀 더 유했습니다. 마음에 들려고, 눈에 들려고 필사적이었는데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홍당무를 그만두게 된 일이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 모양이다.
“보기 좋아요. 당당해서.”
“그렇게 말씀해 주신 분은 대표님뿐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묵은지가 고개를 숙이길래 나도 같이 인사했다.
“그럼 밥 먹으러 갈까요?”
이제 더는 못 참겠다.
위장이 꼬르륵거리며 굶어 죽을 셈이냐고 아우성을 쳐댄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점심 먹으러 가자고 권했다.
“전 괜찮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눈을 깜빡이니 묵은지가 다시 한번 답했다.
“식사하고 오십시오. 돌아오시기 전에 사무실 정리 마무리하겠습니다.”
묵은지도 일어나 본인 자리로 향했다.
“그러면 안 되죠. 밥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
이번에는 묵은지가 멍하니 날 쳐다본다.
“아. 혹시 같이 식사하는 거 불편하면 따로 먹어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뭐가요?”
묵은지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식사 조절 중이라 점심은 먹지 않습니다. 대표님이 불편한 건 아니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식사 조절이요?”
사적인 일은 묻지도 관심도 갖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식사 조절을 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동안은 겨울이라 옷을 두껍게 입어 몰라 봤는데 볼만 푹 패인 것이 아니었다.
청소하느라 소매를 걷은 묵은지의 하박은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안쓰럽기까지 하다.
“네. 식사 조절.”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닙니다.”
믿기 힘들어서 계속 지켜보니 묵은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
“일하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식사를 못 하시는데 괜찮다뇨. 이상하잖아요. 잠깐 앉아 봐요.”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눈 책상 앞에 다시 앉으니 묵은지가 어쩔 수 없이 본인 의자에 앉았다.
“병 있는 건 아니고요? 탓하려는 게 아니라 아프시면 치료를 받아야 하잖아요.”
묵은지가 날 빤히 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 사람 속 터지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러네요.”
잠시 고민하던 묵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렇게 넘어갈 순 없으니.”
어떻게든 내 입장을 이해한 모양이다.
“말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병원에서는 섭식장애라고 합니다.”
“섭식장애?”
“거식증입니다.”
“……네?”
식사를 거부하는 증상이라고 해서 거식증이란 단어가 존재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밥을 먹기 싫다니.
혼란스럽다.
“정말 실례인 건 알아요. 죄송해요. 아무것도 몰라서 이 질문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지도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어떻게요?”
묵은지가 미간을 살짝 모았다.
“어떻게라니.”
“사람이 어떻게 밥을 안 먹어요?”
묵은지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오히려 되묻는다.
“보통 이유를 묻지 않습니까? 왜라든지 어쩌다 그렇게 됐냐든지.”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병이라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궁금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처음?”
“참다 보니 익숙해졌습니다.”
분명 말뜻은 이해했는데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식욕을 어떻게 참았는지도, 왜 그렇게까지 참아야 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아무 것도 안 드시면 큰일 나요.”
“아침에 유동식을 먹습니다. 업무에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1991년생이면서 1919년생 같은 말투라든가, 사교성 없는 태도라든가, 그러면서도 일은 잘하고 신기한 이름까지 무엇 하나 독특하지 않은 게 없지만.
밥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만큼 놀랍진 않았다.
“그때 드린 케이크는요?”
일주일 전에 만나 급하게 손에 들려준 케이크가 떠올라 물었다.
지쳐 보여서 달콤한 케이크라도 먹고 힘내란 의미였는데, 그건 어쨌는지 궁금해졌다.
“동생이 먹었습니다.”
“……먹을 걸 남한테 주셨다고요?”
묵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요?”
“네?”
“케이크였어요. 시금치나 도라지도 아니고.”
“무엇을 궁금해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도요.”
나도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