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53
치팅데이 53화
12. 백반따라(3)
8시 버스에 올라탄 지 얼마 안 되어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내부에 다른 승객이 있어 떠들 수 없기도 했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아침부터 뛰어다닌 탓에 피로감이 상당하여 금방 잠들고 말았다.
3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3월의 강릉은 제법 훈훈했다.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아 강릉 중앙성남시장으로 향했다.
“형, 여기 칼국수 맛있어?”
“강원도 하면 장칼국수긴 하지?”
“여기 엄청 싼데?”
“어디?”
백우진이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S식당인데 칼국수 한 그릇에 3,000원밖에 안 한다고 한다.
“여기다.”
“맛있어?”
“왜 자꾸 나한테 물어. 가봤어야 알지.”
“형은 좀 알 것 같잖아. 맛집 분위기가 난다든가.”
“몰라. 일단 싸니까 가자. 3,000원이면 맛없어도 이득이야.”
“그건 그래.”
성남시장 입구 쪽에 있다는 칼국수집을 목적지로 잡고 30여 분 정도 걸었다.
소머리국밥골목이라고 적힌 안내판 양 옆으로 칼국수집이 두 곳 있었다.
두 군데 모두 칼국수 한 그릇에 3,000원이다.
“여기 엄청 싸다.”
“그러게. 어디 갈까?”
“자리 있는 데로 가자.”
처음 찾았던 집으로 들어섰다.
식당 내부는 노포 냄새가 물씬 풍겼는데 평상에 놓인 4인 테이블 6개 중 5곳이 모두 차 있었다.
“뭐 드릴까?”
메뉴는 장칼국수와 그냥 칼국수 둘뿐이다.
강릉에 왔으니 그냥 칼국수보단 장칼국수를 먹는 게 그림이 좋을 거다.
“장칼국수 둘 주세요.”
“네~ 장칼 두 개!”
주문을 하고나니 백우진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장칼국수는 뭐가 달라?”
“그냥 고추장 섞은 칼국수야. 영동 지방은 고추장을 쓰고 영서에선 막장이나 된장 쓴다고 하더라.”
“으음.”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자주 먹었어? 고향 이쪽이잖아.”
“가끔? 부모님 세대는 많이 드시는 것 같아.”
“궁금하다. 처음 먹어 봐.”
“특별한 맛이 있어서 먹는 건 아니야. 그냥 속 편하게 저렴하게 한 끼 먹는 느낌이지.”
엄청나게 맛있어서 강릉까지 가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은 아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편하게 선택하는 점심 메뉴 느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 음식이 그렇듯이 그 지방의 특색을 잘 느낄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주문한 장칼국수가 금방 나왔다.
“뭐가 엄청 많이 들어갔네.”
물막국수도 그렇고 이쪽에서는 김가루와 깨를 듬뿍 올려주는 게 특징이다.
또 보통 장칼국수는 국물이 걸쭉한데 이 집은 맑은 편이다.
“엄청 많아.”
“그러게. 잘 먹겠습니다.”
양이 상당해서 한 끼 식사로 든든할 것 같다.
젓가락으로 푹 익은 면을 풀어준 뒤 크게 집어들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에 얼큰한 고추장향이 배어 있어 고향에 온 기분이 든다.
후후 불어 면을 식히고 입에 넣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익은 면이 부드럽게 혀를 감싸 안는다.
시장에서 식사하시는 분들이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소화되기 좋게 푹 삶은 듯싶다.
쫄깃한 면발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취향에 안 맞지만.
맵지 않은 선에서 얼큰한 국물과 퍼진 면이 주는 안도감.
강릉 시장에서 즐길 수 있는 별미다.
“후. 후.”
백우진도 열심히 면을 불어가며 장칼국수를 먹는다.
뭐든 복스럽게 잘 먹는 녀석이다.
“나 이런 칼국수 되게 오랜만이야. 할머니가 만들어 준 것 같아.”
“면이 퍼졌지?”
“응. 간도 안 세고. 근데 속은 편하다.”
“여기서는 일상에서 먹는 음식이니까 불편하면 안 되지.”
“응. 김치도 맛있다. 양배추랑 배추 같이 들어 있네.”
독특하게 양배추와 배추를 함께 쓴 김치도 맛을 보았다.
이 집에서 직접 담근 김치 같은데 아삭아삭 식감이 살아 있고 시원해서 뜨거운 칼국수와 함께 먹기 안성맞춤이다.
기본 맛을 알아봤으니 이제 후추를 넣어 먹을 차례다.
“칼국수에 후추도 넣어?”
“안 넣어?”
“보통 안 넣지 않나?”
“넣어 먹어 봐. 맛이 완전 달라.”
후추통을 넘기자 백우진이 고민 없이 칼국수에 후추를 뿌렸다.
슥슥 섞고는 면을 집어 먹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훨씬 맛있어.”
이후로는 나도 식사에 집중했다.
사전 미팅 때, 박상철 PD가 굳이 음식 맛을 열심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연예인이 아닌 사람이 해당 지역에서 주로 먹는 음식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먹는 영상.
그러한 콘셉트를 유지해 달라고 부탁해서 나도 부담없이 평소대로 식사를 마쳤다.
그동안 식단을 해온 탓인지 아니면 이 집 양이 많은지 한 그릇을 먹었을 뿐인데 속이 든든하다.
“와. 진짜 배부르다.”
“그니까. 국물 반도 못 먹었어.”
“3,000원에 이 정도면 진짜 괜찮다.”
“그치. 여기 살았으면 가끔 왔을 것 같은데.”
“그니까. 요새 김밥도 3,000원 하는 데 이 정도면 개꿀이지.”
사람들이 밖에 줄을 서 있어서 더 이야기를 못 나누고 일어섰다.
매장이 좁고 음식이 빨리 나오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서 회전이 빠른 곳이다.
박리다매인 곳이니 자리를 오래 차지하면 민폐다.
봉투를 꺼내 장칼국수 두 그릇 값인 6,000원을 내고 밖으로 나섰다.
시장 구경이나 해볼 생각으로 목적없이 일단 걷기 시작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가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오징어 순대다.”
백우진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오징어 순대 한 마리를 13,000원에 파는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좋아해?”
“아니. 안 먹어 봤어. 형은?”
“난 별로.”
“왜?”
“오징어 질려.”
지금은 오징어가 안 잡히지만, 10년 전만 해도 동해에서 오징어는 쌓아두고 먹었다.
대학 다닐 때만 해도 10마리에 만 원이었고 어렸을 적에는 20마리에 만 원 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많이 잡히다 보니 오징어보다는 낙지나 문어 쪽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짬뽕물회?”
나도 처음 듣는 음식이라 고개를 돌렸다.
“짬뽕물회가 뭐야?”
“나도 몰라. 사장님, 짬뽕물회가 뭐예요?”
매장 앞에 계신 분께 여쭙자 강릉 왔으면 무조건 먹어야 하는 거라고 시원하게 말씀해 주셨다.
궁금해서 먹어보고는 싶은데 배가 너무 부르고 예산도 부족해서 그럴 수 없었다.
“강릉 짬뽕이 유명한가?”
“유명하지. 교동짬뽕.”
“아! 그게 여기야?”
“사실 몰라. 근데 짬뽕순두부 같은 것도 팔고 많이 있더라.”
“그러게. 짬뽕빵도 파네.”
“뭔 빵?”
“짬뽕빵.”
짬뽕과 빵이라니.
귀를 의심할 만한 조합인데 백우진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말 짬뽕빵을 팔고 있다.
짬뽕빵이란 이미지와 달리 푸른색 간판에 꽤 모던한 인테리어의 매장이다.
“아니?”
“배만 안 불렀으면 먹어볼 텐데.”
“야, 이건 먹어야지. 이걸 어떻게 안 먹어.”
“아까 물회도 안 먹었잖아.”
“그건 비싸서 그랬고.”
“배부르다며.”
“하. 넌 아직 돼지 되려면 멀었다. 먹으려는 의지만 있으면 뭐든 먹을 수 있는 거야.”
“……나 왜 내가 잘못한 것 같지?”
“잘못했으니까. 가자.”
매장 앞에 메뉴판이 서 있다.
사진이 있어 처음 보는 음식이라도 어떨지 대강 예상이 되는데, 불짬뽕빵, 체다크림 짬뽕빵, 고추잡채 소보루 등 생각지도 못한 조합뿐이다.
“뭐 먹어야 하지?”
백우진도 고민되는 모양이다.
“불짬뽕빵 매울 것 같지.”
“그렇겠지?”
불이란 단어가 들어간 음식 치고 정상적인 음식을 못 봤다.
“사장님, 불짬뽕빵 많이 매워요?”
“네. 좀 매워요.”
사장님이 살짝 웃으시며 답하셨다.
저 정도면 진짜 맵다는 뜻이니 맵찔이인 나로서는 크림 짬뽕빵 이외에 선택지가 없다.
“난 도전해 볼래.”
백우진이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PD님하고 감독님, 작가님은요?”
“저희요?”
박상철 PD에게 물으니 제작진 모두 의아해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드셔봐야죠.”
“저희는 괜찮습니다.”
“5명이니까 한 개씩 먹어도 돼요. 하나씩 골라보세요.”
“저 불짬뽕빵이요.”
“저도.”
카메라 감독과 작가가 시원하게 말했고 박상철 PD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다크림 짬뽕빵을 골랐다.
“불짬뽕빵 3개랑 체다크림 2개 주세요.”
이거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
주문하고 각자 빵 하나씩 들고 근처 벤치에 대강 자리잡고 앉았다.
겉은 살짝 두께감 있고 쫀쫀한 식감의 빵이고 안 쪽은 크리미한 내용물이 가득 들어 있다.
빵을 갈라 보니 내용물이 흘러 넘칠 듯 튀어 나와 당황했다.
“맛있다.”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짬뽕빵을 먹다가 오만상을 썼다.
빵 때문에 매운맛이 뒤늦게 올라온 모양이다.
“물! 아, 물!”
“없어.”
“물!”
백우진이 팔짝팔짝 뒤어오르는 모습이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근처 편의점에서 물을 사다 주었다.
두 병을 사서 제작진에 하나 넘기니, 돌아가는 차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이 3,000원뿐이다.
허둥대는 백우진을 보며 먹는 체다크림 짬뽕빵은 꾸덕꾸덕하며 달달하니 당뇨가 걸릴 것 같다.
“…….”
이거 먹어도 괜찮나?
순간 무서워져 짬뽕빵을 살피다가 이내 그냥 먹었다.
최근 혈당이 꽤 안정권에 접어 들었으니 치팅데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을 거다.
“헥. 헥. 아아으.”
나 못지 않은 맵찔이 백우진은 괴로워하면서도 짬뽕빵을 끝내 다 먹었다.
매워도 맛있긴 한 모양이다.
웃음이 나온다.
“크흡흫흫.”
“뭐가 웃겨.”
“모르지? 너 꼴 지금 되게 웃겨.”
너무 매운지 뭐라 반박도 못 하고 인상을 쓴다.
“그렇게 매워?”
“응. 근데 맛있어. 크림은 어떤데?”
“엄청 꾸덕해. 달고. 나 당 오를 거 같은데 어쩌지?”
“좀 걷든가.”
“그래. 시장 구경이나 더 하자.”
“난 안 할래. 여기 있을래.”
“같이 다녀야지.”
“아니야. 나 너무 무리했어. 걷고 뛰고 맵고.”
“그 정도 가지고 뭘.”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우니 어쩔 수 없이 터벅터벅 걷는다.
“아, 이 형 운동하더니 체력 너무 좋아졌어.”
“나보다 없는 게 이상한 거야. 너도 운동 좀 해.”
백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거 알아?”
“뭘?”
“1973년 스웨덴에서 은행 인질 사건이 일어났어. 그때 얀에릭 올슨이란 남자가 4명의 인질을 데리고 있었어.”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갑자기?”
“경찰이 어지저찌 인질을 구했는데 인질들이 범인인 올슨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했어. 인질이 범인을 옹호하다니. 이상하지?”
“스톡홀름 신드롬이네?”
“맞아. 방금 얘기한 일이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일이라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이름이 붙은 거야.”
“그게 이 상황에서 왜 나왔는데?”
“형이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지찬이 형한테 얼마나 가스라이팅을 당했으면 운동 좀 하라는 말이 나와.”
“……듣고 보니 그러네.”
“그렇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