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79
치팅데이 79화
18. 백승용차(2)
잡담을 나누다 보니 일행 모두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작은 책자 형태로 된 메뉴판을 펼쳤지만 선택지는 역시 하나다.
얼큰 한우 쌀국수(13,000원)는 다소 맵고, 한우 사골과 양지를 푹 고아 만든 한우 쌀국수(12,000원)는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떤 국물보다 맛이 깊다.
“당근 라페 맛있어?”
백우진이 물었다.
라임 올리브 드레싱을 곁들였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나는 한 번도 먹지 않았다.
“몰라. 안 먹어 봤어.”
“왜?”
“당근이니까.”
녀석이 날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편식하니까 뚱뚱한 거야.”
“지도 뚱뚱하면서.”
“그건 골고루 많이 먹어서 그래.”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당근 라페와 한우 쌀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당근 원래 싫어해? 저번에 당근 케이크 먹지 않았어?”
“당근 케이크가 맛있는 이유는 당근 맛이 거의 안 나기 때문이야.”
“생으로 먹어도 맛있어.”
고개를 저었다.
“왜 그렇게 싫어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하지 마라?”
백우진이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네. 얘기해 줄게.”
백우진은 여전히 메뉴판을 살폈다.
“박 대리님은 원피스를 좋아했어. 그 시절 그 나이 때면 안 좋아할 수 없었지.”
“박 대리님이 누군데?”
모른다.
“중학생 때 나온 원피스 1권을 우연히 봤고 금방 빠져버렸지. 너무 좋아해서 만화방 갈 돈을 모아 한 권씩 사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누군데.”
“용돈을 많이 받진 못해서 한 달에 한 권이 고작이었어. 그러니 한 달 내내 같은 걸 보고 또 봤던 거야.”
백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한 권씩 모았던 원피스가 60권 정도 모였을 때 취직을 했어. 74권을 산 달에는 여자친구도 생겼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80권을 살 즈음에는 결혼했지. 신혼집이 좁아서 취미로 모으던 것들은 결혼하면서 다 정리했어. 원피스 만화책만 빼고.”
“형이랑 결혼했어? 왜 잘 아는데.”
“88권을 살 때는 지방 소도시의 20평 아파트를 샀어. 원피스는 작은 방 한 편에 고이 두었지.”
“왜 이사했어?”
“아내의 친정이 있었고 마침 발령을 받았고 아이가 생겨서.”
“흐응.”
“너무나 행복했어. 아이를 키우느라 힘든 점도 많았지만 매일매일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가 박 대리님의 전부가 되었어. 살려면 살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만화책을 사진 않았어. 천천히 잊혀졌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계속 들어야 해?”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어. 아이에게도 방이 필요했지. 그래서 작은 방을 아이 방으로 꾸며주려는데, 방을 정리하다 보니 원피스 만화책이 눈에 들어온 거야. 그 집에 이사왔을 때 놓아둔 그대로였어. 오묘했지.”
“형이 그분 마음을 어떻게 알아.”
“아련할 수밖에. 중학생 때부터 20년 넘게 함께했으니까.”
“…….”
“흥미로운 세계관, 감동적인 이야기, 개성 있는 인물 모두 바로 어제 읽었던 것처럼 생생했어. 근데 그보다 더 애달픈 기억이 있더라고.”
“뭔데?”
“박 대리님에게 원피스는 인생 자체였어. 5권을 살 즈음 친구랑 처음 싸웠고 7권을 함께 보며 화해했지. 23권을 보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수능 치르고 친구들과 여행 가서 읽었던 35권, 군대에서 너무나 보고 싶었던 43권 등등.”
“20년이나 그랬으면 정말 그렇겠다.”
“인생의 모든 기억이 원피스와 함께였으니까.”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추억에 젖어 있던 박 대리님을 아내가 뒤에서 꼭 안아주었어. 그리고 속삭였지.”
“뭐라 했는데?”
“당근?”
백우진이 잠시 멈칫했다가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팔아. 당근이라니. 당근에서는 옷도 중고차도 집도 팔 수 있지만, 박 대리님의 원피스만은 팔 수 없었어. 그건 추억이니까.”
“…….”
“그래서 내가 당근을 싫어해.”
“형 진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병원 가 봐.”
“왜?”
“미친놈 같아.”
웃음이 터졌다.
옆 테이블을 보니 박상철 PD와 카메라 감독, 작가 모두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음식 나왔습니다.”
사장님이 가져다 준 한우 쌀국수는 뽀얀 국물 위에 야채가 뜸뿍 얹어져 있었다.
빨갛고 하얗고 푸른 색감이 어찌나 고운지 모른다.
“잘 먹겠습니다.”
우선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모금 맛봤다.
혀가 데일 것 같은 뜨끈한 국물을 맞이한 위장이 노곤노곤해진다.
쌀국수라고 하지만 난 이 집 국물보다 속이 편안해지는 해장국을 맛본 적 없다.
몸 속에 건강한 영양분이 스며드는 이 기분.
숟가락질을 멈출 수 없다.
국물을 한참 맛본 뒤 채소 숨이 죽기 전에 서둘러 젓가락을 들었다.
양파, 대파, 숙주, 바질을 한 번 뒤집어 국물을 머금게 한 뒤 그대로 건져 한 입에 먹으면 아삭한 식감과 진한 국물이 어우러져 말 못 할 희열을 안겨준다.
정성스레 우려낸 한우 육수가 통주저음처럼 기반을 다지고.
양파와 숙주, 바질, 파가 각기 다른 식감으로 입을 즐겁게 하니, 비올라 다감바, 비올론 첼로, 바순, 오르간의 합주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부드럽게 짝이 없는 양지 고기가 육향을 자랑하며 딸려 들어온다.
“허우.”
입김을 불며 뜨거움을 달랜다.
공기가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풍미가 더욱 짙어진다.
“형, 이거 진짜 맛있어.”
백우진이 당근 라페를 쌀국수에 얹어 먹으며 말했다.
“우진아, 이건 이대로 완벽해. 왜 굳이 완전한 음식에 변형을 주려고 해.”
“먹어 봐.”
말릴 틈도 없었다.
백우진이 내 그릇에 당근 라페를 얹었다.
몹시 불쾌하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지라 못 이기는 척하고 면과 라페를 함께 집어들었다.
“……어?”
“맛있지.”
이건 또 다른 변주다.
조금 전까지 한우 쌀국수가 바로크 시대의 트리오 소나타였다면, 당근 라페가 함께한 지금은 고전시대의 현악 4중주라 할 수 있다.
“어. 맛있어.”
믿기지 않아 쌀국수와 라페를 번갈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당근이 어떻게?”
“거 봐. 딱 봐도 맛있게 생겼구만. 형 진짜 물살이다. 어떻게 맛있는 음식을 못 알아봐?”
인정할 수밖에 없다.
취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경험했던 일 중에 좋고 싫음의 기준일 뿐.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음식에 해당되진 않는다.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조리법에 따라 얼마든지 맛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 *
“찬용아, 우진아.”
서울 맛집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박상철 PD가 나와 백우진을 불렀다.
의아해하며 다가가니 작게 신음했다. 뭔가 말을 고르는 눈치다.
“왜요? 오늘 뭐 부족했어요?”
“그냥 얘기해, 형. 나랑 찬용이 형 구박 받는 거 잘해.”
“구박을 잘 받는 건 뭐니?”
박상철 PD가 웃으며 되묻자 백우진이 씩 웃었다.
“일단 오늘 촬영 때 원피스 이야기했잖아.”
“아.”
“이게 유튜브나 다른 데서는 괜찮은데 우리 방송국에서는 지양하는 편이야. 그 얘기는 본편에서는 편집할 거고 유튜브 올릴 때는 그대로 진행할게.”
“깜빡했어요. 조심할게요.”
“아니야. 아니야. 편하게 하는 게 좋아. 어떻게 나갈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해 준 거고.”
“네.”
의식은 해야겠다.
“그동안 음식 먹으러 가는 길에서 얘기 나누고 식당에서는 식사하는 데 집중했잖아?”
박상철 PD의 말대로 그동안 백반따라는 모여서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할 때는 먹는 데 집중했다.
다른 프로그램처럼 맛을 표현한다든가 음식을 자세히 소개하진 않았다.
나와 백우진이 먹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 그 자체로 그림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오늘은 서울 안에서 다니다 보니 대화 내용이 없더라고. 또 편집할 이야기도 있고.”
원피스 이야기다.
“그래서 너희 먹는 장면에 후시 녹음을 해서 맛 표현 같은 거. 느낌을 더빙하면 좋을 것 같아.”
유튜브 운영하면서 종종 해왔던 방식이라 거부감은 없다.
“시간 괜찮겠어?”
“에이. 형이 하려면 해야지. 그치?”
백우진이 내게 동의를 구했다.
“그럼. 그럼 언제 해요?”
“당장 내일 필요하니까 내일 오전 어때?”
조금 쉬고 싶지만, 다른 때와 달리 지방에 다녀온 건 아니라 체력이 조금 남아 있다.
“네. 4층으로 바로 가면 되죠?”
박상철 PD와 백반따라 팀은 WTV 사옥 4층에 머문다.
“어. 9시 어때?”
“좋아요.”
백우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우진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다.
다이어트 영상 관련해서 묵은지와 나눈 이야기를 꺼냈더니 입을 앙다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들었다.
“왜 그래?”
“형은 진짜 안 되겠어.”
“뭐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배려심이 없어?”
“내가 뭘.”
“묵은지 PD님 앞에서 통통한 사람이 좋다고 했다며.”
“물어보니까. 그리고 그게 뭐. 내 취향이잖아.”
“생각해 봐. 형이랑 같은 반 여자애가 갑자기 형한테 와서 난 뚱뚱한 사람 싫어. 이러면 기분이 어떻겠어?”
“……얜 뭐지?”
“그래! 묵은지 PD님도 그랬을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런 상황 아니었어. PD님도 마른 사람 좋다고 했어.”
“그거 봐. 열받으니까 나도 너 싫어. 마른 사람이 좋아. 이런 거잖아.”
“우리가 애냐?”
백우진이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고민했다.
“어른은 아닌 것 같아. 나도.”
“그건 맞아.”
난 20살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거 없는 것 같은데 나이는 어느덧 30대 중반이다.
어렸을 때는 정말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나이가 되어보니 어른인 척하는 요령만 늘었을 뿐이다.
“근데 너 자꾸 왜 연애 잘 아는 것처럼 말해?”
“형보단 잘 알지. 형 진짜 아무것도 모르잖아.”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너 다시해. 한번 봐준 거 가지고 일주일을 우려 먹네?”
“응. 안 해.”
“뭐?”
“내가 왜? 이겼는데?”
어떻게 혼낼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잡고 생각하자 싶었는데 백우진이 쪼르르 앞으로 튀어나갔다.
눈치 하난 빠른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