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94
치팅데이 94화
20. 돈 더 많은 돈(5)
“회의는 이쯤 하고.”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홍성일 대표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요새 트렌드가 선한 영향력, 나눔, 봉사 이런 쪽인 것 같더라고. 왜 뉴스에서도 나오잖아. 뭐라 그러더라?”
“백승용차 말씀이십니까?”
“그래. 백승용차. 우리도 그쪽으로 좀 알아 봐. 좋잖아? 안 그래?”
“그렇습니다.”
회의 참석자들이 홍성일 대표의 말에 동조했다.
“그리고 계약하기 전에 학교폭력 같은 거 있는지, 평소 술 먹고 운전대 잡지는 않는지 확인들 좀 하고.”
홍성일 대표의 발언에 기획지원팀 오형만 팀장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얼마 전 이례적으로 계약금까지 주면서 영입한 한 유튜버가 음주운전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논란이 생겼는데.
뒤따라 학교폭력을 일삼았던 유튜버에 대한 제보가 터졌다.
모두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지 석 달도 안 된 이들이었다.
재빨리 대처했다면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덜 입었을 텐데.
오형만 팀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홍당무는 돈은 돈대로 잃고 학교폭력, 음주운전 범죄자가 모인 업체로 인식되었다.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홍성일 대표가 오형만 팀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팀장급이 모두 모인 회의에서 무안당한 오형만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사실 저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없긴 왜 없어! 그럼 왜 여태 멀쩡히 돌아가다 일이 터져?”
오형만이 책임을 회피하려 하자 홍성일 대표가 노성을 냈다.
“최근 문제가 생긴 인원은 전부 김서진 대리가 계약한 케이스라…….”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소리야! 부하 직원 관리 못 한다고 고자질할 때냐고!”
“아닙니다.”
오형만 팀장은 대표의 역정, 동료 팀장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김서진 대리의 잘못 때문에 공적인 장소에서 치욕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할 따름이었다.
“저런 거도 팀장이라고.”
홍성일 대표가 혀를 차며 회의장을 나섰다.
팀장급 인원들도 하나 둘 자리를 나서는데, 대외협력팀 김우락 팀장이 오형만 팀장에게 다가갔다.
“가라.”
오형만 팀장이 눈을 지그시 감고 경고했지만, 김우락 팀장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한심하다. 한심해. 어? 할 말이 없으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든가. 김서진이는 왜 들먹여?”
“김우락.”
“네가 이러니까 묵은지가 나간 거 아니야. 대표님이 모르실 줄 알아?”
“무슨 말이야.”
“왜 나한테 물어? 묵은지 퇴사하고 기획지원팀 CS 올라온 게 몇 건인지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오형만 팀장이 주먹을 쥐었다.
“멀쩡히 문제 없이 지내던 사람들도 재계약 안 하고 나가. 팀원들도 사직해. 실적 끌어올린다고 막 계약하고 다니더니 회사 간판에 똥칠을 해. 질책 좀 했더니 부하직원 핑계나 대. 너 대체 거기 어떻게 앉아 있냐? 어? 비결 좀 알려주라.”
김우락 팀장이 오형만의 속을 벅벅 긁어댔다.
그러지 않아도 묵은지가 퇴사한 후로 기획지원팀의 평가가 날로 떨어지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오형만의 무능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입사 동기인 김우락도 그런 무리에 속해 있었다.
“은지 대리가 팀장 됐어야 했는데. 능력은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우는 놈 때문에 안 됐지, 뭐.”
김우락은 오형만을 비웃으며 회의실을 나섰다.
“빌어먹을.”
오형만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억울하고 분했다.
오형만은 곧장 사무실로 향해 소리쳤다.
“김서진, 들어 와.”
김서진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최근 계약한 유튜버들이 저지른 사고가 대표 회의에서 언급되었다고 예상할 수 있었다.
김서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미팅실 문을 열었고 뜻하지 않는 고성에 깜짝 놀랐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죄송합니다.”
“죄송해? 뭐가 죄송한지 알아?”
“하지만 제가 단도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술 마시고 운전하는 걸.”
“안 닥쳐!”
오형만 팀장의 노기 띤 얼굴에 김서진 대리가 고개를 숙였다.
“너 과장 달고 싶다며. 일을 이 따위로 해서 과장은 무슨 놈의 과장!”
입술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김서진 대리는 두 손을 모았다.
“뭐? 미래가 밝아? 묵은지가 데려온 애들 재계약 다 날려버리고 어디 양아치 새끼들을 데려와가지고 생난리야! 너 그것밖에 안 돼?”
묵은지와 비교당한 김서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말 듣고 묵은지 내보낸 내가 미쳤지. 어? 적어도 걔가 있을 땐 이런 일 없었어! 알아!”
“그 일은 팀장님께서도.”
“내가 병신인 줄 알아!”
오형만이 소리쳤다.
“너 묵은지 이후로 퇴사한 애들이 뭐라고 하고 나간 줄 알아? 묵은지 있었을 땐 일만 하면 됐는데,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더라!”
“…….”
“대체 뭔 짓꺼리를 하고 다니는지 내가 두고 보고 있어. 어? 인정을 받고 싶으면 주둥이 여물고 일이나 똑바로 해!”
“팀장님.”
“나가!”
오형만 팀장의 노성에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미팅실을 나선 김서진 대리는 담배를 챙겨 옥상으로 향했고 팀원 한 명이 뒤따라 나오기에 갖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
“대리님 걱정돼서 그러죠. 팀장님 왜 저러세요?”
박형욱 사원이 물었다.
“몰라. 시발.”
김서진 대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 묵은지 지금 뭐 하는지 아냐?”
“모르셨어요? 반찬가게 들어갔잖아요.”
“뭔 소리야.”
순간 박형욱의 말을 이해 못했던 김서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반찬용?”
박형욱이 옥상 문을 열었다.
“네. 거기서 PD 하더라고요.”
“걔가 뭘 안다고 PD야.”
“여기 있을 때도 콘텐츠 기획 해주고 그랬잖아요. 잘 나가던데요?”
김서진 대리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인상을 쓰자 박형욱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하여튼 끼리끼리 논다니까.”
김서진 대리가 두 사람을 비웃었다.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뚱뚱한 반찬용과 툭 밀면 부러질 것 같은 묵은지가 같이 일한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근데 묵은지 대리님은 왜요?”
“팀장이 한소리 들었나 봐. 갑자기 지랄이네.”
“뭐라고요?”
“묵은지가 있을 때랑 다르다고. 하, 저 새끼 진짜 밖에서 보면 반 죽여놨을 텐데.”
김서진 대리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미팅실에서는 당황해서 미처 몰랐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 본인이 계약한 사람들이 사고를 친 것과 반대로, 반찬용은 TV 매체에 노출되면서 인지도와 이미지를 모두 챙기고 있었다.
오형만 팀장이 왜 묵은지 이야기를 꺼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하아.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과장 진급은 멀어진 듯싶었다.
김서진 대리가 담배를 툭툭 쳐 불씨를 버린 뒤 꽁초를 튕겨냈다.
“팀장도 그래. 어? 실적 떨어졌다고 계약해 오라고 할 땐 언제고. 그만한 애들 데려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대리님.”
박형욱이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비서실 직원과 나눈 대화에 오형만 팀장에 대한 욕설이 적혀 있었다.
{너희 팀장 진짜 레전드다}오전 11:17
{왜?}
{안 그래도 지금 들어오셨는데}
오전 11:18{엄청 화나셨어}
{대표님이 질책하시는데}
{그 와중에 변명한답시고 김서진 대리 탓 하더랔ㅋㅋㅋ}오전 11:20
오전 11:20{진짜?}
{어. 김서진만 불쌍해졌지 뭐.}오전 11:22
“하.”
조금 전 화풀이로도 모자라 대표 회의에서 본인 험담을 했다는 사실에 김서진은 기가 찼다.
또 그 이상으로 분노했다.
동앗줄인 줄 알고 붙잡았던 줄이 삭을 대로 삭아 있었다.
“떨어지려면 혼자 떨어질 것이지.”
오형만 팀장은 기어이 물귀신처럼 옷자락을 잡았고 덕분에 김서진 대리는 대표와 타 팀장들에게 무능한 인간으로 인식되었다.
더 이상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서 높이 올라설 기회가 사라진 것이었다.
* * *
“괜찮네요.”
묵은지에게 외주 편집자들과 상의해서 영상을 뽑아오라고 주문했는데,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니 금방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내 방송을 가장 오래 시청하기도 했고 편집 기술을 공부한 결과인 듯싶다.
출연할 곳이 많아지면서 슬슬 편집에서 손을 떼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다음부터는 PD님께 맡길게요. 피드백은 필요할 때만 하고요.”
“알겠습니다.”
묵은지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우물쭈물한다. 할 말은 다부지게 하던 사람이 이러니 조금은 의아하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물으니 말을 몇 번 삼키고는 겨우 뱉어냈다.
“정확히 어떤 걸 바라시는 겁니까?”
“뭘……. 아.”
월요일에 나눴던 말이다.
백반따라 촬영 때문에 깜빡했다가 오늘 아침에 생각났는데,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별한 거 없어요. 건강한 밥 먹고, 산책도 하고.”
“…….”
“처음부터 무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 차근차근 하나씩 해나가죠.”
오랜 기간 섭식 장애를 앓은 묵은지가 갑자기 일반식을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묵은지가 폭식을 하고 바로 토해내지 않았더라면 소화기관이 놀라 배탈이든 급체든 이상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미음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식단을 정상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하나씩 해보는 게 중요해요. 미음 먹다 보면 죽 먹을 수 있고. 죽 먹다 보면 밥도 먹고. 저도 PD님도 건강해지면 가끔 교외로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요.”
묵은지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당장 하는 게 제일이죠.”
“다, 당장?”
“네. 지금 죽집이 열었으려나. 근처 죽집에서 미음도 팔아요. 가실래요?”
“…….”
“안 그래도 저도 배고팠거든요. 밥 먹으러 가요.”
혹시나 마음을 달리 먹을까 봐 나도 모르게 재촉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묵은지가 작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려 그러나 싶어 느긋하게 기다리니 잠시 뒤 그녀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준비되었습니다.”
“네.”
일어나 몸을 돌리니 묵은지의 얼굴이 약간 달라졌다.
평소에는 거식증 때문에 다소 푸석푸석하고 어두웠는데 조금 더 건강해지고 밝아진 느낌이다.
밥을 먹는다는 생각만으로 이렇게 건강해지다니.
시작이 반이라고 벌써부터 효과가 있다.
“보기 좋네요.”
“예?”
“보기 좋다고요. 어서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