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98
치팅데이 98화
21. 열등감(4)
“그 정도면 되겠어요, 대리님?”
받아든 파일에는 김서진이 불법업체에 반찬가게와 나에 대한 여론 조작을 의뢰한 정황이 고스란이 담겨 있었다.
요청한 대로 3명이 모인 대화방에서 나눈 이야기니 혹시 김서진과 업체가 대화 내용을 삭제한다 해도 증거로 충분하다.
큰 기대 하지 않아서 다른 방법을 준비해 두었는데 이로써 필요한 서류는 모두 챙겼다.
“잘하셨습니다. 유능하네요.”
“저야 대리님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요, 뭘. 그런데 정말 저한테는 피해 없는 거 맞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쓰시려고요? 고소?”
“그런 방법도 있습니다.”
한 번 도와주었다고 해서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애초에 박형욱이 김서진에 대한 뒷조사와 증거 수집을 도와준 이유는 동정도 정의감도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데 있다.
과장 진급 예정자였던 내가 퇴사하고, 김서진마저 나가게 된다면 다음 순서는 박형욱 본인이다.
내심 김서진을 고깝게 여기는 듯해, 김서진이 내쳐지면 그 자리가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얘기해 주니 예상대로 덥썩 물었던 사람이다.
굳이 모든 정보를 공유할 필요는 없다.
“알려주실 생각 없으신 거네요.”
박형욱이 음료를 쭉 마시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럼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물론 화야 나지만 이번 일 하시면서 돈 꽤 많이 쓰셨잖아요.”
자잘하게 나간 금액도 있지만.
큼직한 돈은 박형욱이 김서진에게 넘긴 200만 원, 박형욱에게 따로 챙겨 준 100만 원, 사설탐정을 고용한 데 200만 원 정도다.
두 달 치 월급에 준하는 큰 금액이지만 사람 한 명 보내는 값으로는 생각보다 저렴했다.
“대리님 진짜 화나셨구나.”
대답하지 않으니 박형욱도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경쟁자를 내보내고 용돈도 챙겼으니 그 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럼 전 가볼게요.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파이팅입니다.”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박형욱이 돌아가고 잠시 자리를 지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재료가 갖춰졌으니 김서진을 요리할 방법은 여럿이다.
홍당무에 증거 자료를 보여주며 김서진에 대한 징계를 요청할 수도 있고, 유튜버들 사이에 김서진의 행각을 배포해 이 업계에서 매장시킬 수도 있다.
깔끔하게 법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만 고작 1~2년에 집행유예를 받는다고 화가 풀릴 것 같진 않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평생 괴롭고 후회하길 바란다.
“…….”
문득 내가 낯설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잔인하다면 잔인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데 망설임이 없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당해온 모든 상처를 김서진에게 돌려주려는 건지.
아니면 뜻밖에 찾아온 행복을 지키려는 마음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김서진이 나만 공격했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무시했을 수도 있었다.
다만 대표님에게 상처를 준 점과 대표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한 행위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일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숨이 가빠진다. 갈증을 느껴서 잔을 든 손이 떨린다.
이렇게 마음이 확고함에도 누군가를 망가뜨린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도 지켜야 한다.
“…….”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각이 5분 지났다.
“왜 사람을 오라 가라야?”
오형만 팀장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못 지냈으면. 뭐.”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이게 뭔데.”
“김서진 대리가 홍당무에 근무하면서 저지른 규정 위반 행동 및 범죄행위 증거입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알아본 결과, 이 남자는 현재 홍성일 대표의 눈밖에 나 있다.
초기 멤버라는 이유만으로 팀장직에 올랐고 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내가 처리해 왔었다.
그런 내가 없으니 나를 대신해 김서진을 중용했는데, 사고만 일으키니 팀장으로서 자격 요건을 의심받는 중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정상화 작업을 하려 노력하겠지만, 무능하고 한심한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가 지난 몇 년간 반복해 온 일이다.
오형만 팀장이 날 노려보며 서류를 꺼냈다.
슬쩍 보더니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원하는 게 뭐야.”
“김서진 대리가 해고되고 레퍼런스 체크가 들어오면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서 다년간 대리 직무를 수행한 경력은 어디서도 써먹을 수 있다.
나 또한 기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지 불합리함을 받아들인다면 얼마든지 타 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좁은 업계인 만큼 레퍼런스 체크는 합법적인 방법이든 음성적인 방법이든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때 오형만 팀장이 사실대로 알리기만 하면 된다.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씁.”
오형만 팀장이 증거 자료를 넘기다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마지막이 좀 안 좋긴 했지만 내가 자네 미워서 그런 게 아니야.”
맞다.
치졸하고 무능하며 자존심만 셌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일은 알겠고. 더 할 말은 없지?”
“철저히 하셔야 할 겁니다.”
“뭐?”
“비오네스에서는 김서진 대리의 요청을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의뢰로 알고 있었다고 책임을 회피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홍당무 엔터테인먼트는 국내 굴지의 크리에이터 매니지먼트에서 댓글 조작이나 하는 삼류 업체로 낙인 찍힐 겁니다.”
자리를 보존하려면.
김서진 개인의 일탈로 완벽히 묶어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래야만 김서진에게 감봉 같은 느슨한 징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 * *
느즈막이 출근한 김서진은 주변 시선을 느꼈다.
평소에는 눈인사도 잘 나누던 사람들이 시선을 피했고 다가가 인사해도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그도 모자라 끼리끼리 모여 수근댔다.
의아해하며 사무실로 들어서니 팀원들마저 고개를 돌리기에 주변을 살피코는 자리에 앉았다.
‘이것들이 왜 이래?’
컴퓨터를 켜자 사내 공지 알림이 떴다.
심드렁하게 공지를 연 김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징계위원회 개최 통보서
성 명: 김서진
직 급: 대리
소 속: 기획지원팀
상기인은 사내 규정 위반 4건, 불법행위 1건, 근태 불량 31건이 확인되어 징계를 검토하게 된 바, 하기 일자에 지정된 장소로 출석하여 징계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출석에 불응할 시 징계위원회의 결정에 이의가 없음으로 간주합니다.
1. 일 시: 2023년 5월 26일 오전 10시
2. 장 소: 3층 대회의실
3. 징계위원: 허광선, 봉승현, 하호재, 안석숙, 문지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김서진 본인에 대한 징계위원회였다.
“팀장님!”
마침 오형만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고 김서진은 억울함을 토로하러 일어섰다.
“징계라뇨.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십니까?”
오형만이 무심한 얼굴로 김서진을 훑었다.
“잘못을 했으니 오라고 하겠지. 다들 회의실 들어와. 김 대리는 징계절차 끝날 때까지 자택 대기하고.”
“예?”
“그대로 나가라고. 컴퓨터 만질 생각 말고.”
김서진 대리는 당황하여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뭐 해? 박형욱, 쟤 내보네.”
“대리님, 일단 나가시죠.”
“이거 놔! 팀장님,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습니까?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니가 회사생활 제대로 안 하고 헛짓꺼리한 걸 왜 나한테 묻냐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오형만 팀장이 최근 본인을 못마땅히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슨 근거로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모르니까 여쭙잖습니까! 대체 제가 뭘 잘못했는지 설명이라도 해주셔야 맞지 않습니까!”
순간 저번 주, 오형만 팀장이 대표에게 질책받던 중 김서진 핑계를 댄 일이 떠올랐다.
“설마 팀 실적을 저한테 뒤집어씌우려고 그럽니까?”
“이 자식이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뭐? 뭐가 어쩌고 저째?”
오형만 팀장이 김서진에게 달려들려 하자 팀원들이 만류했다.
김서진도 전후사정을 알아야겠단 생각으로 다가섰지만 박형욱에게 이끌려 사무실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야, 저 새끼 왜 저래? 어? 대체 뭐가 문제야?”
“모르죠. 아무튼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뭐?”
“회사에서 자택대기하라고 하잖아요. 괜히 더 문제 만들지 마시고 오늘은 들어가세요.”
박형욱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김서진은 당장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 문득 핸드폰 진동을 느꼈다.
{계약 취소할게요}오전 09:46
“이건 뭔.”
오늘 계약서 작성하기로 한 유튜버로부터 도착한 메시지였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구독자 17만 명 유튜버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김서진은 핸드폰을 집어넣으려 했다.
{이거 대리님이 한 거 맞아요?}오전 09:47
{실망입니다.}오전 09:47
{대체 무슨 일이에요? 진짜예요?}오전 09:47
{홍당무와 한 계약 무효 소송할 테니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오전 09:48
그러던 차, 각기 다른 유튜버, 스트리머로부터 메시지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갑작스레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기에 김서진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 * *
묵은지가 의도한 대로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조치는 즉각적이었다.
김서진 대리의 범법행위 및 조례위반을 인지한 즉시 징계위원회를 소집, 해고 통지와 형사 소송 및 민사 소송을 동시에 진행했다.
회사의 모든 수익이 유튜버, 스트리머를 통해 발생하기에.
업체가 특정 방송인을 의도적으로 매장하려 했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고자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김서진을 철저히 무너뜨렸다.
거대 기업을 상대로 김서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가 믿고 있던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대리 직함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었고, 그동안 친분을 나누던 인터넷 방송인들은 모두 연락이 끊겼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남자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내세울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홍당무 엔터테인먼트 사옥 앞 벤치에 앉아 있던 김서진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김서진이 고개를 드니 묵은지가 서 있었다. 김서진의 얼굴 근육이 뒤틀려 꿈틀거렸다.
“그렇게 인상 쓸 만큼 화가 났음에도 아무것도 못 하는 꼴이 꽤나 보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