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ing Captain RAW novel - chapter (10)
10화 빈털터리가 된 고인물-9
샌드박스 게임인 갤럭시바운드에도 나름 스토리라는 게 있긴 하다.
초보 선장으로 취임한 초짜 모험가는 여기저기를 방문하고 사건을 겪으며 어느덧 베테랑 함장이 되어 가는데……
-가 갤럭시바운드 서사의 골자다.
물론 샌드박스 게임이라 스토리 그런 거 무시하고 그냥 파밍 퀘스트 건축만 해도 된다.
하지만 떡하니 떠있는 파란색 느낌표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자주 들러야 하는 우주시장 한복판에 에펠탑 같이 박힌 큼직하고 광택어린 느낌표를!
내 경우는 ‘나를 클릭해줘요~~’하는 애타는 부름까지도 필요 없었다. 느낌표네? 히히 클릭!
그렇게 나는 메인 시나리오의 세상에 뛰어들었고, 온갖 재미난 일과 피곤한 일을 다 겪었다.
사소한 음모를 파헤쳐 해결하는 것부터 시작해, 채굴, 물품 제작과 조달, 건축, 사냥 등의 갤럭시바운드의 바닐라 콘텐츠가 총집합 되어 있는 게 메인 시나리오였던 것.
시나리오의 에피소드 중 가장 볼륨이 컸던 게 바로 바르닥 전쟁이었다.
파편화된 세력이었던 식인종 에파바르가 갑자기 결집하여 여러 항성계를 동시 공격한다는 배경으로 시작된 바르닥 전쟁.
게임에서는 ‘당연히 정의를 위해 참전해야지!’라는 이유였지만, 여기에선 현실적인 이유로 참전해야 했다.
‘배 융자를 덜 갚아서……’
국가에서 빌려준 배라서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그 다음 수순은 게임이나 이곳이나, 내 함선에 예상치 못한 고장이 발생해 다른 함선에 탑승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2D 샌드박스 도트겜치고 바르닥 전쟁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다.
이동하고, 대화하고, 우주공간 혹은 배에 침투해 전투를 하는 것의 반복.
아차하는 순간 죽고 리스폰하는 것까지 합쳐서 플레이 시간으로 네 시간에 이르는 동안 전쟁이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 씨 콘텐츠 넣을 거 없냐?’하면서 불평했겠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침투 때마다 다른 적의 우주선과 적 구성, 다채로워지는 아군과 적군의 말풍선, 루팅을 통해 점점 두툼해지는 지갑과 템창.
더구나 플레이타임은 지겹지만 연출만큼은 괜찮다고 하는 종합 평가가 여럿 있을 정도의 좋은 연출까지!
도트겜답게 움직임이 다채롭진 않았지만 외계인 추가뎀이 들어가는 장비를 입고 써걱써걱 적을 썰어버리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기억은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통신으로 들리는 피와 비명이 아군 것인지 적군 것인지도 모른 채 사방에 점철된 잔해와 시체를 넘고 넘어 목표만을 위해 투쟁하던, 진짜 전쟁이었다.
그때 난 이 검은 갑옷, 블랙 파워 아머를 에파바르의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주었다.
전함에 단신 침투해 전함 내부 인원을 홀로 도륙한 말도 안 되는 일을 잊으면 그게 바보지. 내가 앞장서서 참가한 전투도 한둘이 아니고.
‘물론 대부분의 전공은 잊혔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전공은 그대로 묻혔다.
선장 말대로 기사 한 줄 안 나갔다. 포상이나 훈장을 주는 자리도 사정이 있다며 비밀리에 치러졌었지.
말했다시피 빙의 전의 나는 흐릿한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면서 넘겨버려 내 선원들만 분통을 터뜨렸다.
근데 정말 왜일까. 뭔가 큰 권력이 개입한 건 알겠는데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은걸.
“테일러 함장님, 갑자기 갑옷은 왜 꺼내십니까?”
나는 대답 없이 화난 표정을 형상화한 것 같은 헬멧을 쓴 채 고개를 돌렸다. 작전대로 기관병 에볼이 앞으로 나왔다.
그 다음으로는 두 조종사를 불렀다.
“제임스, 앞으로 나오세요.”
“저, 저 말입니까?”
너희들이 원초적인 방식으로 침투를 했다면, 나 역시 원초적인 방식으로 너희의 정체를 까발려 주마.
내 부름을 받은 조종사로 위장한 에파바르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몸이 시체처럼 뻣뻣이 굳어 있었다.
누가 저걸 보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거친 에파바르라 할까.
“옆에 자네도.”
인간으로 변장한 에파바르 둘은 사형선고를 당한 죄수처럼 내 앞에 섰다.
내가 에볼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갈색 액체가 담긴 병을 건넸다.
그 뚜껑을 따자, 특유의 향내가 헬멧 너머 코끝을 간질였다.
커피였다.
저벅. 저벅.
커피를 든 채 다가가자 두 에파바르가 코를 막고 뒤로 물러섰다.
“뭐, 뭐하는 겁니까?”
“서, 선장님. 저희 좀 어떻게!”
그러나 선장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커피를 보고 물러나는 선원이라고?
“설마 정말로……!”
선장의 미간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찌그러져 있었고 입술이 벌어져 꽉 다문 치아가 보였다.
나이에 비해 건치시네. 좋은 치과 다니나 봐요?
물러나는 둘의 등 뒤로 에볼을 비롯한 몇 명이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발 넓은 에볼이 포섭한 선원들이었다.
앤젤라 말대로 에볼과도 얘기하길 잘했어.
“이, 이거 놔!”
“씨발, 놔!”
에파바르들은 발버둥쳤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갑옷을 입어 한층 높아진 키라 그런지 그들의 머리 위에 커피를 쏟아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머리에 물을 떨어뜨리며 세례를 하듯, 나는 놈들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향긋한 커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러나 커피향에 호강하는 후각과는 달리 청각은 끔찍한 비명이 메웠다.
“크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
두 에파바르는 무슨 염산이라도 들이 부어진 것처럼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장갑판으로 이뤄진 두툼한 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붙잡고 확 떼내자, 사람 가죽으로 이뤄진 가면이 두둑 벗겨지며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에파바르에겐 독극물로 작용하는 커피가 피부에 닿아 얼굴에는 붉은 수포가 덕지덕지 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욕조차 제대로 못하는 두 외계인을 보고 있자니, 옆으로 배의 선장이 다가왔다.
“오른쪽이 놈들입니까.”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일부는 내통. 일부는 모르고 내통. 셋 더.”
그 말에 오른편에 있던 위장한 에파바르 셋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허. 난 분명히 맘 놓고 즐기게 무장 다 해제하라 했는데. 역시 어딘가에는 무기를 숨겨놓는 우주 깡패다웠다.
“어딜.”
나는 놈들이 무기를 쓰기 전에 자리를 박찼다.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발구름 소리와 함께 큼직한 어깨갑옷이 한 놈을 퍽하고 치어 날려버렸다.
동시에 템창에서 대 외계인 결전병기, 체인소드를 꺼내들었다.
부르르릉!
바르닥 전쟁에서 내 손에 살아남은 에파바르가 있다면 평생 엔진 소리는 못 들을 걸? 트라우마가 재발할 테니까.
콰드득!
살려둬서 심문할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손목만을 잘라버렸다.
“으, 으아아악!”
“쿠헥!”
아, 오랜만에 써서 실수했다.
하나는 손목을 제대로 잘랐는데 나머지 하나는 가슴을 쭉 가르고 지나갔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칼날이라는 체인소드 특성상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겼다.
“히이이익!”
오른편에 있던 인간 선원들은 엉덩방아를 찧고 기어가고 난리였다. 왼편의 선원들 역시 인상을 찡그리며 피가 튈까 뒤로 우르르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쿵!
“전원 주목!”
나는 피범벅이 된 체인소드의 전원을 끄고 기사처럼 바닥에 쿵 내려찍었다.
“모두들 잘 봤겠죠. 이들은 잔인하게도 인간의 가죽을 벗겨 위장한 에파바르입니다.”
내가 얼굴 가죽을 쥐고 흔들어 보이자 선원들이 경악에 빠져 웅성거렸다.
“오른편에 모아놓은 너희들. 너희들은 에파바르가 이 선내에 침투하도록 정보를 간접적으로 제공한 것들이다. 에파바르인 줄은 몰랐겠지만 너희가 돈 받고 판 정보들이 너희 동료를 죽이고 놈들이 침투하도록 도운 거다.”
오른편에 모아놓은 선원들의 얼굴이 절망에 빠졌다. 저들은 푼돈 좀 벌어보자고 별것 아니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한 조각씩 빼돌린 정보는 에파바르가 이 수송선에 대한 퍼즐을 맞춰버리게 도와주었다.
나는 손목을 지혈한 녀석의 멱살을 틀어쥐고 들어올렸다.
커피를 부은 녀석들처럼 가면을 뜯어내자, 안 그래도 인간보다 창백한 혈색인데 출혈로 더 하얘진 피부가 드러났다.
“히, 히이이익…..!”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그 흉악함으로 유명한 에파바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선장이 앞으로 나섰다.
“입단속과 뒤처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 선원들은 분별력 있는 녀석들이니까 알아서 입을 닫을 겁니다. ……물론 오른쪽 놈들 빼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배의 책임자이자 최고 명령권자는 선장이다. 더 이상 한다면 그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되겠지.
이쯤 하면 다 되었다.
나머지는 선장의 카리스마와 포섭한 기관병의 인맥에 맡기자. 선원들도 난데없이 칼질을 한 나보다는 그동안 봐온 둘의 말을 더 잘 따를 테지.
이들은 추후 내 행동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장비를 다시 스위칭하여 핏자국 하나 없는 깔끔한 행색으로 돌아오자 선장이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첩보라 했지요. 그럼 다시 용병업에 발을 담근 게 그 일환입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너희들은 이놈들 당장 잡아가둬! 직접 심문하겠다. 심문 끝내고 감옥 보낼 때까지 얼릴 거니까 냉동장치도 미리 가동시켜 놓고! 함장님, 누구 휘하인지 살짝만 얘기해 줄 수 있을지요?”
“글쎄요. 없다고 할 수 있겠네요.”
“생각보다 높은 모양입니다. 하긴, 용병 길드 지부장까지 침투했다니…… 믿겠습니다. 전쟁 영웅.”
***
[선원들이 선장을 잘 따르는 모양이에요. 통신기기에서 이번 일을 얘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초광속 항행 중이라 외부와 연락할 수 없는 것도 있겠지.”
[내부 연락망, 그것도 사적인 부분에서까지 말을 아낀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라고요.]또 해킹했니?
[인트라넷 같은 닿지 못하는 곳에는 손도 못 대던 과거의 한을 푸는 거랄까요? 후후후.]눈앞에 생겨난 홀로그램이 스산하게 웃었다. 저 캐릭터의 원작에서 배신을 의미하는 호박색 눈동자가 슥 휘어지니 꽤 무서웠다.
[이제 배 하나는 포섭했고…… 다음 계획은 뭔가요 함장님?]“그건 심문 결과가 나와야 결정할 수 있을 거야.”
[아무것도 모른다면요?]“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아무 정보도 못 얻는다면…… 이번 일과 비슷하게 흐르겠지.”
[인간들이 보는 앞에서 가죽 벗기기요?]그렇게 얘기하니까 좀 그렇다. 점잖게 얘기해서 폭로하고 사례금 받기라고 표현해줘.
“그렇게 해야겠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체를 폭로하는 건 꽤 재밌더라고. 더구나 부인하지 못하는 극명한 특징이 있으니 의심도 별로 없을 거고.”
[그 다음엔요?]“그 다음에는 별장으로 가봐야지. 공장 시설도 확인해보고 사례금에 맞게 재료를 구할 공급처도 알아보고 해야지. 아참, 에나도 같이 불러야겠다.”
급양병과 함께였다지만 70여 명이 먹을 음식을 급히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뭔가 야식이라도 먹으면서 상의해야겠다.
나는 에나를 불러 앉히고 홀로그램을 띄운 앤젤라와 함께 밤늦게까지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어떻게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라지만, 큰 틀을 잡고 같이 상의해나가며 희망의 끈을 단단히 잡는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