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ing Captain RAW novel - chapter (35)
35화 고발-6
“지금 저랑 장난하는 건 아니겠죠?”
내 말에 홀로그램이 씨익 웃었다.
[여기 온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곤 했지.]—–
성명 : 베나티안 마소누이
종족 : AI
직업 : 황제 외 13358개의 호칭
감정 : 반가움
상태 : 생생함(교체됨)
독심 : 허허허허! 놀랐지 이 사람아!
—–
인류의 황제께선 장난기가 심하셨다.
너무 낡아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단말마를 지르며 의자가 부서졌다.
[아, 저런. 나름 보수하고 있던 건데.]의자와 마찬가지로 영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 나무 마룻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황제를 대체하는 AI입니까, 아니면 업로드된 황제의 의식대로 따라하는 AI입니까. 그도 아니면 황제 자체가 원래부터 AI였습니까.”
[오, 자네 상상력이 풍부한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많이 언급되었지만 두 번째를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말이야.]턱수염과 구레나룻을 풍성하게 기른 노인의 모습을 한 홀로그램이 껄껄 웃었다.
[굳이 따지자면 두 번째일세. 제국의 초대 황제의 의식을 그대로 옮긴 AI지. 내가 진짜 황제냐고 물으면 그건 철학의 영역이라 대답하기 힘들어. 내가 철학은 영 관심이 없거든.]그래도 생전 황제와 같은 기억과 사상을 가지고 제국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진짜 황제와 다를 게 뭐냐며 껄껄 웃었다.
“바깥의 기록은 모두 거짓이었군요.”
4백 년 동안 황제는 다섯 번 바뀌었다.
대관식부터 시작해 가족과 일상, 노화방지 시술에 대한 뉴스가 간간히 뜨던 것 전부가 조작된 거짓이었다니.
[이런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거짓말은 꼭 필요하거든.]“지구 전체를 두른 홀로그램도요?”
[인류는 늘 구심점이 필요하기 마련이야. 종교처럼 말이지. 그런 면에서 따지면 지구는 완벽한 대체제일세.]황제의 전신 홀로그램은 아기를 양팔로 들어 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조그만 점에서 시작해 은하를 지배한 인류가 발생한 요람이 숱한 고난을 겪고도 이 시대에도 건재하다는 것. 그것만큼 효과 좋은 정신적인 지주는 없지.]“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그럴 거야. 뭐든 대답해 주겠네. 자네는 내가 여기 옮겨진 이후로 중요 인사가 아니면서 내 상태를 알게 된 사람이거든. 아, 지금 이렇게 만났으니 중요 인사가 된 건가?]황제는 씨익 웃으면서 허공에 걸터앉았다. 털털한 모습을 보건대 그가 나를 좋게 봐주는 건 분명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구가 폐허가 된 겁니까.”
[당연히 통합전쟁 때지. 전 은하가 들썩거린 대전쟁이었는데.]통합전쟁.
인류가 배신이라는 단어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계기이자 제국이 만들어지게 된 4백 년 전의 대전쟁.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인류를 저지하고자 다른 여러 외계 종족들이 뭉쳐서 쥐어 팬 불합리한 싸움이며, 그 결과는 인간 중심적인 명칭과 현 인류의 득세를 보면 알 수 있듯 인류의 승리였다.
패배한 쪽은 무려 다섯 개 종족이 영영 멸종당했다.
그렇게나 통합이 힘든 인류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으니, 어찌 보면 그 외계 종족들도 마지막으로 대단한 업적 하나 세우고 간 셈이다.
황제는 아련한 얼굴로 과거를 곱씹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놈들의 궤도폭격에 미국의 절반이 날아가고 유럽이 녹아내렸어. 아시아도 벌집이 되었지. 바다는 절반이 증발해 해수면이 족히 100미터는 넘게 줄어들…… 아, 미안. 자네는 지명을 잘 모르겠지.]안다. 그래서 공감할 수 있다.
황제라는 직위에 있는 사람치곤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말투라 거리감도 적었다.
황제만큼 분노도 할 수 있다. 한반도와 동해, 일본 등지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크레이터만이 그 자리에 바닷물을 품은 채 찰랑이고 있었으니까.
[어쨌건 공격을 그렇게 받았는데, 외계인 놈들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달을 밀어버렸어.]“달을요?”
세상에. 우주 규모 싸움이라 이건가.
[그래. 왜 지구와 달을 굳이 묶어버렸는지 궁금하지 않았나?]“궁금했습니다. 그건 몹시 비효율적인 일이니까요.”
[어쩔 수 없었거든. 잘못하면 지구가 박살날 상황이라 자폭까지 해가면서 겨우겨우 중력 제어장치로 수습은 했는데, 당시 기술력으론 원래 궤도대로 되돌릴 수는 없었어. 거리가 좀 멀어야지? 더구나 우주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던 상황이다 보니 자연히 뒤처리도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그렇게 지체된 것이 지구에는 치명적이었다.
외계인의 포격만으로는 지구의 문명을 붕괴시킬 수 없었지만, 가까워진 달의 중력과 일그러진 지구 궤도는 늦어진 처리기간 만큼 지구 표면을 제대로 뒤집어엎었다.
[전쟁이 끝났을 땐…… 지구는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어.]황제가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나도 입맛이 썼다.
[그래서 어떻게 지구 궤도라도 안정시키려고 달을 지구에 트랙으로 고정한 다음 중력을 줄이기 위해 달을 깎아내고 내부를 파내기까지 했지.]전쟁이 끝난 뒤부터 황제는 지구를 인류 결속의 상징물로 삼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황량한 지구에 수십 년을 들여 홀로그램 기기를 설치하여 푸른 행성으로 위장해 ‘너희들도 할 수 있다!’면서 타 행성의 복구 의지를 고취시켰다.
그에 따라 달을 관광명소화하고, 달의 무게를 줄이려 공동(空洞)화한 곳에 군기지를 설치하여 방문 절차도 까다롭게 만들었다.
대기권에서의 지구 진입 금지, 지구 이주 금지, 지구 투자 금지 등등 황제가 있는 곳이랍시고 접근 불가지역으로 만들어버려, 일종의 성역화를 노렸고 또 성공했다.
“지구 뉴스도 가짜, GDPP(행성의 GDP)도 가짜, 모습도 가짜….. 왜 진짜 복구는 안 했습니까?”
[어허, 자네 상상력이 좋은 줄 알았더만 그 말은 취소해야겠어. 안 되니까 그런 거 아니겠나? 나름 내 고향인데 그 정도 노력도 안 했겠어?]“음.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다 외계인 때문이지. 그놈들이 몹쓸 짓을 벌였거든.]놈들은 달만 밀친 게 아니었다.
[박테리아는 물론이고 바이러스까지 박살내는 단백질 분해 파장을 방출하는 말뚝을 박아 넣은 거야. 두 마리 새를 잡으려고 한 건지, 말뚝이 맨틀까지 자극하는 바람에 지구는 늘 지진과 화산이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어.]“제거는 못했군요.”
[그래. 지금도 그 말뚝들은 활동을 하고 있지. 그래서 체류는 최대 일주일밖에 못해. 그 이상 있으면 단백질 기반 생명체는 녹아버리니까.]황제는 우울한 표정으로 지구 홀로그램을 띄웠다.
파르스름한 둥근 구체는 투명해지며 곳곳에 못처럼 박힌 길쭉한 것들을 표시했다. 그중 하나는 아예 안쪽으로 파고들어 외핵과 맨틀의 경계부까지 닿아 있었다.
[보복으로 다섯 종을 멸종시켰지만, 그런다고 이렇게 되어버린 고향이 돌아오진 않았지.]홀로그램을 바라보는 황제는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가족을 보는 사람 같았다.
[이제는 빼고 싶어도 못 빼.]“이유가 뭡니까?”
[사람 몸 곳곳에 칼침을 박아놨다 생각하면 돼. 뽑는 즉시 피가 분출되겠지? 마찬가지로 큰 지각변동이 일어날 텐데, 그러면 지구의 자기장도 크게 흔들릴 거야. 외기권에 띄워둔 홀로그램 장치는 현재의 자기장을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그렇게 되면 지구의 맨얼굴이 드러나겠지.]사방에 세간이 눈이 가득하다. 아무리 통제를 한다 한들 모든 이들의 눈과 입을 막을 수는 없다.
진실이 알려진다면, 인류의 자존감은 단번에 박살날 거고 윗선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이 하늘을 찌르며 소요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를 명분으로 야심만만한 이들이 독립이라도 해 제국이 쪼개진다면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
“흠……”
나는 흉하게 박힌 ‘칼침’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구 홀로그램은 내 앞에 내려와 있어 나도 조종할 수 있었다. 좀 더 확대해 보니, 저 기둥들, 어쩐지 모양이 낯익었다.
일단 나는 나머지 궁금증부터 풀기로 했다.
“그럼 어쩌다가 폐하는 그런 모습이 된 겁니까? 누가 칼로 찌르기라도 했습니까?”
[예끼 이 사람아. 내 얼굴을 봐라. 난 늙어죽었어. 물론 그 이후도 내 선택이야.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의식을 복제해 옮겼지.]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는 위협적인 외계인이 너무 많아. 자네도 알잖나? 통합전쟁 때 인류가 보복으로 절멸시킨 외계종이 다섯이나 되는데 아직도 곳곳에서 남은 놈들이 지랄을 하거든.]고귀하신 황제 폐하는 입이 참 걸걸하셨다. 밑바닥부터 시작한 군인 출신이라 그렇다.
지구와 달 설명 책자에서 나온 황제들의 이력에서 봐서 안다. 초대 황제 빼고는 죄다 거짓이었지만.
[통합전쟁은 내겐 아직 진행 중인 전쟁이나 다름없어. 그런 개새끼들이나 할 짓을 한 놈들 중에 두 놈이나 살아남아서 아직도 싸움을 걸고 있거든.]그게 바로 제국이 국경에서 살벌한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 이유였다.
[그런 상황이라, 황제가 교체되면서 정책이 바뀌어 혼란스러워지거나 폭군이 권력을 잡으면서 제국이 쪼개질 위험성을 남기기엔 난 너무 두려웠어. 어떻게 고생해서 이 제멋대로인 인류를 한데 묶었는데.]그리고는 진저리를 치며 덧붙였다.
[하필이면 남은 두 놈 중 하나가 결속력으로 악명 높은 벌레새끼기도 하거든.]곤충형?
갤럭시바운드는 곤충형 외계인이 없…… 이런 시발.
‘로치 종족!’
종족 추가 모드를 일일이 찾아서 클릭하기 귀찮다고 종족 추가 모드팩을 통째로 다운받았던 과거의 나를 저주했다.
‘미안하다 우주야. 미안해! 미안해!’
모드 탓인지 아닌지는 모르긴 한데, 어쨌건 미친 듯이 이 우주에게 미안했다.
나는 생각만 해도 함선 탈출 뒤 먹었던 보존식이 올라올 것만 같은 키틴질 외모를 떠올리곤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 황제 역시 나와 마찬가지 심정인지 표정이 똑같았다.
“그래서 AI가 되어 수명을 늘리고, 입헌군주제에 항성계 자치제도가 완비된 것치곤 폐하께서 권력을 강하게 잡고 있는 거군요.”
아마 황제를 대면한 각료들도 제국의 대들보가 무너질 위험성을 익히 알고 지금껏 입을 다물어왔던 것일 테지. 약간의 협박도 가미당해서 말이다.
‘우주 바퀴벌레가 우주선 타고 돌진해오는 마당에 독재고 자시고.’
통합전쟁으로 생겨난 경각심이 떠오르기 이전에, 인류의 본능에 각인된 공포가 모든 걸 용인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자네의 고발은 내겐 참으로 고마워.]서론이 끝나고 본론이 시작되었다.
[바깥으로 두 놈 이상이 지랄인데 안에서부터 좀먹으려 드는 기생충 새끼들의 위험성을 증명해줬으니까.]황제는 흡족함을 감추지 못하며 반투명한 팔로 내 어깨를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분명 뭔가 의심은 갔지. 그런데 정보부가 사방팔방을 뒤지는데도 이상하게 꼬리가 영 안 잡혀서 말이야. 그래서 의심되는 것들에게 현상금을 걸었는데 자네가 그렇게 탁 모아서 사살을 해주기까지 했으니까 한시름 놓았어.]의심되는 놈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었다는 것. 이는 정보부의 정보수집 능력도 덩달아 검증받은 셈이다. 정보부 장관이 잘 대해주던 이유가 있었군.
이후로 연속적인 칭찬 세례가 이어졌다.
[거기다 자네가 에파바르를 상대할 때 상세한 사살 영상까지 남겨준 덕에 죽었나 살았나 의심할 여지도 없어서 정보자산을 아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 [정보부 장관한테 몬칸토의 배신행위에 대해서도 보고받았네. 정말 장한 일이야. 이 씨벌 찢어죽일 배신자 새끼는 확실히 척살해서 기둥뿌리 하나 남기지 않을 예정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단순 외부 협력자가 아니라 아예 정보부에 공무원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정보부도 못 발견한 이런 극비사항을 캐온 걸 보면 능력도 괜찮은 거 같은데.]어이구 부담스러워라.
나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저는 프리랜서입니다.”
[프리랜서라. 이렇게 제국의 일에 끼어들려고 그렇게 안달을 내면서 정작 공직자는 되기 싫다니. 자유는 보장받고 싶단 건가?]나는 대답 대신 미소로 답했다.
[그래. 맘에 들었어. 통합전쟁 시절 날 보는 것 같아. 내 통 크게 봐주지. 지금껏 자네가 나라를 위해 해준 일이 있으니까.]“감사합니다.”
[맨 처음에 날 보고 싶다고 제이슨 회장에게 말했다는 것도 그렇고, 장관한테 참 간 크게도 검사 운운한 것도 그렇고. 내 예상하기론 여기서 얘기가 끝날 것 같진 않은데, 더 할 말 있나?]원래는 진짜 황제를 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나, 이렇게 된 이상 뽕을 뽑자.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야.
“귀쟁이를 때려잡을 때 제가 선봉에 설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