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ing Captain RAW novel - chapter (7)
7화 빈털터리가 된 고인물-6
며칠 뒤.
의뢰를 받은 알라스파 행성으로 가는 우주선이 도착했다.
듣자하니 다른 임무를 위해 이동하던 배를 잡아챈 모양인지라 뭔가 미안했다.
“처단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주선 앞에 마중 나온 선원이 차렷 자세를 취하곤 빠릿빠릿하게 외쳤다.
—–
성명 : 존 크릭(27)
종족 : 인간
직업 : 선임 선원(용병 길드 소속)
상태 : 존경
독심 : 세상에, 전설을 만날 줄이야!
—–
어이쿠 전설이라니.
여기의 나는 숱하게 들어서 무덤덤했지만 기억이 혼재된 지금은 꽤 어색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예! 영광입니다!”
손을 내미니 무슨 예수라도 영접한 것처럼 두 손으로 꽉 잡는 게 내가 다 민망해졌다. 뒤에서 에나가 웃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저 탈출선도 같이 챙겨 주시죠.”
원래는 스크랩 처리할 예정이었지만 기능 자체는 멀쩡하고 따로 쓸 일도 생겨서 잠시 보류했다.
“예. 즉시 싣겠습니다.”
선임 선원이라는 직위답게 그는 다른 선원들을 시켜 탈출선을 싣도록 했다.
“그럼 내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성간 항해가 시작되었다.
우주 시대에는 140광년이라는 까마득한 거리라도 고작 14일이라는 시간으로 주파가 가능한 거리가 되었다.
‘초광속 수준이 아니라 무슨 워프 수준인데.’
정작 워프 기술은 한 술 더 떠서, 거리에 따른 연료 소비를 바탕으로 ‘한순간에’ 움직이는 기술이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내게 배정된 방을 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배가 넓기도 하지만 용병 길드 입장에선 내가 VVIP 그 이상이니까 방해하지 못하도록 접근 방지까지 해 둔 모양이다. 아니면 꿍꿍이가 있던가.
나는 옆방 문을 슬쩍 두들겼다.
똑똑
“아, 들어오세요 함장님.”
에나는 기분이 좋은지 큼직한 안경 밑으로 밝게 웃었다. 손에는 웬 황동빛 큐브를 들고 있었다.
“끝났어?”
“아아, 네. 끝났어요. 여기요.”
조그만 큐브가 내 손에 쥐여졌다.
나는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큐브를 톡톡 두드렸다.
-아이템 정보 : 고성능 인공지능의 전자두뇌. 홀로그램 구현 외에는 다른 기능이 온전하나 별도 장치에 삽입되지 않아 70% 수준.
-쓰임처 : 장착(장비 및 장신구), 투척, 분해, 파괴 등 [더 많은 쓰임처를 알려면 클릭]
나에게만 보이는 검은 창이 뜨며 흰 글씨가 적나라하게 이 큐브를 설명했다.
‘역시. 장착이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나에게 전자두뇌 분리하느라 수고했다고 말했다.
“뭘요. 함장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에나는 화학공학자이자 생물공학자이자 전자공학자다. 학위도 박사로 화학계열 둘 생물계열 하나 전자계열 하나로 총 4개다.
이곳의 나는 그런 깡스펙을 보고, 갤럭시바운드를 플레이하던 나는 연구율을 무려 400퍼센트나 올려주는 등의 여러 내정 버프 깡패 캐릭터라는 걸 보고 고용했다.
그런 에나에게 AI의 전자두뇌를 분리하고 기능을 유지시키는 것쯤은 간단했다.
큐브를 작동시키자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앤젤라?”
[아. 함장님.]“당분간은 불편하겠지만 참아줘. 홀로그램 기기까지 여기에 넣을 수는 없어서.”
[괜찮아요. 함장님이랑 함께 있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더 좋은 걸요.]홀로그램으로 마주하는 것보다 이렇게 손에 쥐여지는 게 취향이라느니 하는 저질 농담을 툭툭 던져대는 앤젤라.
누가 얘를 AI라 하리오.
“아, 그러고 보니까.”
나는 문득 생각나서 에나에게 말했다.
“에나. 이만 비서 직위는 그만두는 게 어때?”
“네?”
“원래 넌 연구직으로 들어왔잖아.”
우주 시대에는 관리AI가 보통은 비서 일을 도맡는다.
정작 게임상에서는 AI가 단순 알림판일 뿐이고 비서 임명 기능은 오로지 선원만 가능했기에 내 첫 번째 선원인 에나가 엉겁결에 비서로 임명되었다.
여기서는 당시 앤젤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전요?’하고 물었었다. 그때의 나는 ‘그냥’이라는 말로 대충 넘어갔다.
“그동안 이중으로 고생했어. 앞으로 비서와 총괄 보고는 원 역할대로 앤젤라가 하게 될 거야. 시설이 없으니 연구 같은 것도 못하고. 그동안 고생했으니 당분간은 마음 놓고 푹 쉬……”
“안 돼요.”
일이 줄어서 좋아할 것이란 생각과는 다르게, 에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눈에 불이 붙은 것처럼 이글거리는 게 꽤 살벌했다.
예전에 실험 한다고 며칠 밤을 지새면서까지 일에 매달렸던 그때를 보는 것 같았다.
“비서는 제 자리예요.”
“그동안 힘들었잖아.”
“괜찮아요.”
“그래도 당분간은 할 일도 딱히 없을 텐데.”
그동안 연구 테크 트리는 다 올렸다. 그래서 그 뒤로는 에나는 오로지 비서직만 수행해 왔다.
연구와 비서 말고도 에나는 할 수 있는 게 많지만 그 역시 많은 자원과 시설과 돈이 필요한 일이 대부분.
나는 앞으로 꽤 오랫동안 용병으로 떠돌이나 다름없이 일해야 하는 처지라 에나에게는 당분간 일거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 휴가라도 줄……”
“아뇨. 괜찮아요.”
[그냥 비서 시켜주세요 함장님.]나는 그 딱딱 끊는 말투와 앤젤라의 요구도 있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좋다니까 어쩔 수 없지.
***
진 테일러 함장이 나간 뒤, 에나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
영상을 빠르게 돌리는 것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쥐어뜯었다.
살점이 뿌득하고 일부 뜯겨 나와 바닥에 투둑 떨어졌다. 사람에게서 보여야 할 붉은 피는 새나오지 않았다.
‘폭발, 폭발만 아니었더라면!’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함장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지 않았을 텐데!
폭발의 원인이 무엇이건, 에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장치의 나사가 잘못된 거면 그 나사를 만든 공장을 뒤집어 버릴 것이고, 누군가 잘못 손을 댄 거면 그 손을 자르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자신과 함장님의 사이를 감히 파탄낸 죄를 물어야 하니까.
비서 직위에서 내려오라고?
안 돼. 그럴 순 없어.
‘내가 눈에 차지 않으신 거야. 폭발 때문이겠지. 성과. 성과를 내야 해. 어떻게든 함장님에게 도움이 되어야 해, 함장님의 눈에 들어야 해……!’
가문을 뛰쳐나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우주 선원직에 몸을 던졌을 때, 사람이 무서워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AI교수 밑에서 스펙만 쌓았지 숫기가 없어 사람 앞에선 말도 제대로 못하는 폐급인 자신을 받아준 유일한 인물이 바로 진 함장님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함장의 바로 옆자리를, AI를 제치고 임명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가.
말만 비서지 정작 대부분의 보고는 AI를 통해 받았지만, 에나에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런 요직에 자신을 믿고 앉혀줬단 것 자체다.
늘 다른 이들의 그늘에 가려 지내며 꺾이기만 했던 그녀의 자존심은 그 임명 하나로 드디어 바로세워질수 있었다.
그건 그녀의 인생이 바뀌는 전환점이었다.
처음에는 대인공포증과 불안장애로 인해 연구직이나 비서직이나 실수를 연발했지만, 함장님은 그녀에게 질책 한 마디 없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만 주었다.
그 조용한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에나는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악을 썼다.
그 결과, 에나는 바뀔 수 있었다.
실수 연발이었던 연구실 업무는 초광속 항행 저리가라 할 정도로 거침없이 할 수 있게 되었고, 앤젤라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초기에 오류를 잡아냈기도 했으며, 선원들 사이를 중재하면서 통제하고 파악하고 정리하는 등 업무 역량은 하늘을 뚫었다.
과거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에나.
그 변화의 시작이자 증거가 바로 비서 직위였다. 그건 어느새 그녀의 존재 의의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함장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해. 날 버리지 못하게 해야 해.’
함장님한테서 버려진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용서 못해. 폭발을 일으킨 놈을 알게 되면 손수 찍어 죽여버리겠어.’
다시금 이를 갈았다. 금속 드릴 같은 까드득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침대 가에 앉아 몸을 웅크린 그녀에게서는 한동안 섬뜩한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
내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문을 잠갔다. 그 다음 앤젤라로 이 방에 도청장치나 감시카메라가 없는지 스캔하게 했다.
[깨끗해요.]앤젤라의 목소리에 묘하게 기대가 담겨 있었다. 뭘 말하려고 그런 걸 확인하라 한 건지에 대해 들뜬 건가.
“잠깐만……”
나는 혹시 몰라서 부가적으로 조치를 취했다. 모드로 설치했던, 주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려주는 광범위 스캔 기능이었다.
‘깨끗하네.’
슬슬 말할 수 있겠어.
“앤젤라. 너는 이제부터 내 전용이 될 거야.”
[어머, 그거 고백인가요? 과묵하신 함장님이 그런 폭탄선언을? 어머나♡]아. 조금 이상하게 들렸으려나.
“내 말은 너는 이제 앞으로 나한테 종속, 아니 이건 더 이상한데. 하여튼 말 그대로 다른 기기에 장착되지 않고 나를 중점으로 서포트하게 될 거란 얘기야.”
[어차피 저는 만들어질 때부터 함장님 거였는데요 뭘. 다른 사람한테 갈 생각도 없고 다른 일 할 생각도 없어요.]홀로그램은 없지만 왠지 어깨를 으쓱하는 것만 같았다.
[다만 이 상태로는, 기능이 떨어질뿐더러 함장님이 설치해주신 외형도 더 이상 못 보여준단 얘기네요. 그건 아쉬운걸요.]글쎄다?
갤럭시바운드에 캐릭터를 개조하는 기능은 없다. 하지만 개조가 아니라 직접 스킬을 부여할 수는 있다.
2단 점프를 하게 해준다거나, 돌격 스킬을 쓰게 해준다거나 하는 등의 소소하지만 쓸 일 많은 부가기능 등이다.
나는 최종 테크를 찍은 사람답게, 여러 기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스킬 하나만 끼고 다니고 있다.
이 말은 나머지 스킬 칸이 비어있단 얘기.
재밌게도 시스템 상 허점인지 버그인지는 모르지만 스킬 칸은 일종의 장신구 칸 취급이었다.
그래서 전자두뇌를 장착할 수 있다.
AI 전자두뇌와 내 게임 시스템상의 여러 기능들이 합쳐진다면……
‘앤젤라가 어드민의 영향을 받을지도 모르지.’
관리자 권한의 기능은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대부분에 적용되니까 말이다.
내게 장착되어 스킬 취급이 되면, 어쩌면 그것에 영향을 받아 기존 성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궁금하게.]“음…… 글쎄.”
이 요망한 AI가 주인 놀리려고 끈적한 목소리를 낼지도 몰라 말을 아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내가 숨겨왔던 기술이야.”
[또 있었어요? 함장님은 비밀도 많으시네요.]그야 게임 시스템이니까 설명을 못하지.
템창에서 물건 꺼냈다 뺐다 하는 건 도저히 숨길 수가 없어서 얼마 전에 개발한 신기술이라 대충 둘러댔었다.
그래도 앤젤라는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존재다.
이곳 세계관에서도 아직 불가능한 기술인 반물질 기술 연구트리를 찍은 것도 꽤 오래 전 일이다.
앤젤라는 내 비밀을 지금껏 그래왔듯 잘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까 널…… 어디다가 장착을 좀 할 거야.”
[어디요? 장치 같은 건 안 보이는데요.]나만 볼 수 있는 그런 장치야.
“네 동의를 얻고 싶어서. 여기에 널 끼우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 하지만 손해는 없을 거야 아마도.”
[그럼 당연히 해야죠. 생명체가 더 편안한 삶을 원하듯이, AI들은 더 발전하는 걸 원하거든요.]어쩐지 우주선 업글하면서 같이 업글 될 때마다 좋아하더라.
“그럼 동의하는 거지?”
나는 지체하지 않고 빈 스킬을 삽입하는 칸에 앤젤라의 전자두뇌를 통째로 ‘장착’시켰다.
손이 텅 비었다.
전자두뇌가 나에게만 보이는 게임 시스템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뭐가 바뀌었나?
[우와. 이게 뭐야 세상에나!]갑자기 귓가에서 앤젤라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앤젤라?”
[함장님, 이 비밀 많은 남자 같으니. 이런 걸 숨겨두고 있었단 말이에요?]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뭐가 달라졌는데?”
[전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