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ing Captain RAW novel - chapter (83)
83화 지긋지긋한 악연-2
“함장님. 함장님.”
“으응? 어, 으응.”
누군가의 부름에 꺼졌던 의식이 돌아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기지개를 피자, 잠이 깬 직후의 노곤함을 연료 삼아 의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잠이 깬 직후의 이 애매한 기분 좋음에 금방 도로 빠지려는 것을 거부하며, 손을 더듬거려 불을 켰다.
군청색 머리카락과 큼직한 안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뒤로 별로 가득 찬 우주를 보여주는 조종석 화면이 비쳐 보였다.
“어, 에나야.”
“화물칸 다 찼어요.”
“응 그래. 가야지. 어흐으 잘 잤네.”
하품이 반쯤 섞인 잠긴 목소리를 내며 나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후후후.”
에나의 낮은 웃음소리에 왜 그러냐 물었다.
“그냥, 웃기고 신기해서요. 세상에 이런 방식으로 공장이 돌아가다니.”
그 말에 나도 어깨를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러게나 말이다.”
조종실로 나가자, 화물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물칸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2층 구름다리 복도 위까지 연갈색 봉투들이 잔뜩 탑을 쌓은 것이 보였다.
-우이이이이이!
그 꼭대기에서 슬라임이 힘차게 떨어졌다.
녀석은 금화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만화 속의 한 장면처럼 전투식량 봉투를 헤집고 다녔다.
-마싯다! 재밋다!
이미 까먹은 빈 봉투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맛대가리 없는 우주 비상식도 잘 먹는 녀석인데, 맛있다고 평가받은 전식이라 그런지 정말 걸신들린 듯이 먹어대고 있었다.
그래. 맘껏 먹어라. 많으니까.
라디오를 진 소형 드론 몇 대가 작동을 멈춘 채 조용히 제품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저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내 노동력을 줄여주고 ‘자동화 생산’을 가능케 해준 건 바로 라디오였다.
***
아이템 코드를 수없이 읊어야 되는 최악의 사태가 코앞에 닥쳐온 상황.
어떻게든 그 생지옥을 피할 방도를 궁리하던 와중 떠오른 생각은 ‘녹음을 해볼까?’였다.
아이템 스폰은 아이템 코드를 채팅창에 ‘입력’함으로써 발동된다. 그 채팅창 기능은 이 우주에선 내가 ‘말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럼 스폰 조건이 내 목소리인가?’
앤젤라는 물론이고 다른 선원도 내가 코드 읊는 목소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뻐끔거리는 것으로 보건대,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그걸 근거로, 어쩌면 목소리에 비밀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에 희망을 걸고 녹음을 시도해 봤다.
앤젤라를 통한 녹음은 당연히 실패. 소리조차 안 나왔다. AI가 적용되지 않는 평범한 단말기는 될까 했지만 이 또한 마찬가지.
‘젠장! 망했다!’를 외치던 와중, 나는 네브라가 보는 TV채널에서 옛날 골동품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홀로그램 화면 단말기 보편화 이전의 구형 전자기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라디오?’
거기엔 매우 낡은 라디오도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라디오도 녹음기능이 있긴 하지?’
내가 살던 21세기 시점에서도 저런 라디오는 점점 사라져가는 골동품 취급이라 미처 생각을 못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라디오(장식용 가구)를 스폰으로 뽑아내 보았다. 있다는 것만 알지 아이템 코드를 몰라서 유추하느라 제법 진땀을 뺐다.
코드는 compactcassetteradio.
영어사전까지 뒤져 찾아낸 단어를 이리저리 조합해서 겨우 찾았다.
게임이 만들어진 지 좀 된 게임이라 라디오의 모습은 어릴 적에 보았던 형태였다.
둥그스름한 몸체에, 위에는 접을 수 있는 디귿자 손잡이가 달렸고, 잠자리 얼굴을 크게 확대한 것처럼 검은 스피커가 좌우에 큼직하게 달린 물건.
어렵사리 만들어낸 라디오에 들어있는 카세트에 내 목소리를 녹음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더니.
[/itemspawn mre 9999.]“된다!”
기적이 일어났다.
신이 은총을 내려주듯 라디오 근처 허공에서 물건이 생겨나 후두둑 쌓이는 모습은 참으로 뭐라 형용하기 힘들었다.
모두들 어이없어했다.
양자 창조라는 최첨단 기술이, 이런 구닥다리 기계를 통해 구현이 될 줄이야!
라디오에서 나오는 녹음된 목소리는 나를 제외하면 역시나 다른 선원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목소리를 이상하게 하고 녹음을 해도 스폰이 되는 걸 보면, 채팅창에 텍스트를 복사붙여넣기 하는 것과 비슷하게 취급되는 게 아닐까 했다.
단, 테이프 한 번에 백 번 정도만 된다는 한계는 있었다.
아마도 반복 재생을 하며 테이프에 미세하게 변화가 생겨 음질이 변하면, 시스템이 ‘아 이건 관리자 목소리가 아니다’라고 인식해 그런 것으로 생각되었다.
딱 백 번이 되는 순간 안 되는 게 아니라, 테이프마다 스폰이 안 되는 횟수가 조금씩 달라서 제법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게임 기능의 꼼수를 이용해 내 성대와 혀의 혹사를 막는 쾌거를 이루었다.
에페드라 군구에 납품할 물량은 다 충족했지만, 지금 이렇게 보이는 것처럼 페넬로페 가문에서의 요청을 고려해 템창의 한계까지 전투식량을 뽑아내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공장이 어딨어!’
나는 헛웃음을 계속 내뱉으며, 드래그로 전식 밑에 묻힌 상자에 차곡차곡 제품들을 옮겼다.
허공에 내젓는 손짓을 따라, 전식 무더기가 뭉텅뭉텅 사라졌다.
“와아아아……”
에나의 낮은 탄성을 들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낱개를 빼고는 모두 상자에 수납했다. 가득 쌓인 상자도 손가락질 몇 번으로 사라지며 화물칸은 텅 비어버렸다.
“/itemspawn plasticcrate 9999.”
아이템 스폰으로 상자를 만들어 드론으로 바닥에 쫙 깔게 시켰다.
벌써 에페드라 군구 납품량의 1.5배를 생산했다. 단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아니, ‘자동생산’을 돌려놓은 시간만 따지면 사흘? 라디오를 만들어서 수많은 카세트에 녹음하는 것까지 합하면 한나절이 더해진다.
자동화는 자동화인데, 참 기묘한 자동화 공정이었다.
“앤젤라, 템창 꽉 차 가니까 안 넘치게 개수 조절해 줘. 슬라임 너는 이제 그만 먹고.”
-황송! 아랏다!
상품 수납을 끝낸 나는 다시 우르르 쌓이기 시작하는 물건들을 보고는 아직도 서 있는 에나를 보았다.
“무슨 일 있어?”
“헤헤, 엑시움 더 있나요? 파편으로요.”
“/itemspawn exiumfragment 100.”
“감사합니다 함장님!”
비싸디 비싼 광물의 파편을 슥 만들어주자 에나는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행복한 표정으로 파편을 끌어안았다.
***
조종실로 들어간 나는 다시금 내 할 일을 시작했다.
“어디~ 르으을~ 가볼까아~ 요오오~”
아침에 무슨 양말을 신을까 흥얼거리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용병 길드 홈페이지를 뒤졌다.
사업으로 잠시 빠지긴 했지만 내 본업은 모험가다.
우주 모험가.
말 그대로 이곳저곳을 무작위로 탐사하면서 정보를 팔거나 채굴을 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에 소유권이 생긴 지금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직업이다.
아니, 직업도 아니고 값싼 용역 혹은 프리랜서 용병으로만 취급되는 게 현실이다.
나 역시 군납에 도전하기 전까지는 공기관 및 군부의 의뢰와 용병 일로 먹고 살았다.
‘군납도 끝났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야지.’
평범한 사업가라면 바빠서 멀리 나다니지 못하겠지만, 나는 아니다.
관리? 운영?
핫하! 다 안 해도 되지롱!
많은 사업가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는 영역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납품 시기가 되면 덜렁 가서 하역만 하면 끝!
그럼 남는 시간엔 뭘 한다?
‘당연히 의뢰 뛰어야지.’
세 부문의 군납 규모가 ‘고작’ 5천억 안팎 밖에 안 되는 만큼 부지런히 뛰어야 부활비를 마련할 수 있다.
“에이, 다 없어졌네.”
나는 사이트를 뒤적거린 끝에 결국 혀를 찼다. 홈페이지를 늘 채우고 있는 의뢰 수 자체가 줄어 있었다.
정보부가 컷이어 작전을 벌이는 것에, 각 행성 공기관과 군부들이 적극 참가하면서 의뢰가 팍 줄어버린 것이다.
남은 건 잔챙이 소탕 아니면 시간 대비 이득이 별로라 아예 검색 분류에서 제외시킨 종류들.
잘못하면 일일이 도시 행성에 찾아가서 갱단 소탕 제의를 해야 할 판이다.
“앤젤라, 이제 내려가자.”
안 그래도 장비 팔 때가 되어서 데스페라도에 오긴 한 상황.
이렇게 된 이상 장비도 팔고 직접 본사에서 정보를 얻어 봐야겠어.
***
“핫핫핫! 축하하네! 이야, 세 부문 입찰 성공이라니 이거 대기록이야?”
“별거 아닙니다.”
“역시 배포 큰 친구라니까!”
제이슨 회장은 축하를 하면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순수한 감탄도 있었지만, 앞으로 있을 장비 공급도 있어서다.
내 이름값이 올라가서 판매하는 무기 가격이 올라가기 전에 얼른 땡기잔 속셈이셨다.
일단 나는 미리 준비했던 무기들 2천만 크레딧 어치를 팔았다.
200억을 빌릴 때 약조한 대로 40%나 싸게 팔았지만 아깝진 않았다. 덕분에 사람 하나 살렸는데 뭐가 아까우리요.
그리고 돈독이 좀 있어서 그렇지 회장은 참 좋은 사람이다. 그 돈독마저도 죽은 용병 가족에 대한 보상금 때문에 그러는 거라 밉지 않았다.
“용병 의뢰가 마땅한 게 없다고?”
“예. 이번에 정보부가 싹 쓸었잖아요.”
“하긴 그랬지. 나도 애들 보내주면서 쏠쏠하게 챙겼고. 그러고 보니까 자네도 정보부에서 같이 싸웠다며? 꽤 벌었을 텐데 좀 쉬지 않고. 공장 관리도 해야 될 텐데 안 바쁜가?”
“기계가 제품 생산하는 동안은 시간이 남으니까요. 뭐라도 해서 돈 벌어야죠.”
그 말에 회장이 낮게 탄성을 흘렸다.
“부지런도 하지. 우리 애들도 자네처럼 그러면 좋을 텐데. 1위 명성만 믿고 설렁설렁 하는 놈들이 하도 많아서……”
게임 설정에서 데스페라도 용병들의 허당 끼는 괜히 적힌 게 아니었다.
“어디보자…… 값이 높은 의뢰가 없진 않아. 대소탕 때문에 귀족 호위나 위험지역 탐사 같은 제법 시간이 걸리는 것밖에 없어서 그렇지.”
이런 거는 원래 관련 부서의 직원들이 해주는 거지만 회장은 마침 시간도 남았겠다, 나랑 친하기도 하겠다 해서 고맙게도 직접 의뢰를 찾아 주었다.
“자네는 딱 보니까 시간 대비 많이 주는 걸 원하는 거지?”
“잘 아시네요. 역시 1위 답습니다.”
“내가 눈치랑 사람 보는 눈 하나만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어. 대표이사랑 비서실, 하여튼 그 둘도 내가 직접 뽑은 유능한 녀석이지.”
에파바르에게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비서실장이 생각나 그런지 회장의 입매가 굳어졌다.
“밑에 애들한테 제한 없이 좋은 거 집어서 추천하라 전해 주겠네. 물론 데스페라도에 고용된 프리랜서로서 수행하는 건 알지?”
“그럼요.”
이 와중에 브랜드 가치 알뜰하게 살리는 걸 보면 빈틈이 없으시다.
“아 그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김에, 조사 임무 하나 있다는 건 알아둬.”
“조사 임무요?”
조사 임무는 길고 지겹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라 애초에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
“여러 지역 공기관에서 걸어놓은 건데, 대상도 대상이고 뭔가 심상치가 않아서.”
“뭔데요?”
“귀쟁이들이 안 보인다네?”
귀쟁이가?
“그냥 해적이 아니고 에파바르 해적만요?”
“맞아. 따악 집어서 귀쟁이들이 특히 잠잠하다 해. 소탕이 안 된 잔챙이조차도. 어디보자, 의뢰 걸어놓은 걸 대충 보면…… 한 이쯤부터?”
달력을 보면서 한 날짜를 가리키는 회장.
정보부의 대대적인 소탕이 끝난 지 얼마 안 지난 시점이다.
“그 식탐 많고 사나운 놈들이 그렇게 오래 잠잠할 리가 없는데요.”
뭔가 등골이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르닥 전쟁 직전에 딱 이랬지 않아요? 갑자기 활동 줄이고 숨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