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ing Captain RAW novel - chapter (87)
87화 지긋지긋한 악연-6
펄서로 인해 모행성이 쪼개진 뒤, 일부 강성한 에파바르 부족들은 부서진 행성의 파편을 터전 삼아 끌고 다녔다.
전함이란 이름과는 달리 크기에 비해 전투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반쯤 부서진 파편에 억지로 엔진을 붙이는 식으로 개조하고 사람이 사는 영역이 대부분이라 에파바르 부족 피난민 집결소라고 부르는 게 더 맞았다.
물론 ‘크기에 비해 전투력이 별로’라는 거지, 크기만 따지면 사실상 전함들이 일렬로 붙어있는 거라고 봐도 된다.
백여 년 동안 숱한 소탕과 추격전 끝에 크고 작은 해적 부족의 대륙급 전함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딱 하나 빼고.
“역시 귀쟁이 새끼들은 믿을 게 못 돼!!”
함교 전체가 떠나갈 정도로 티베리우스 후작이 꽥 소리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유일하게 살아남은 에파바르의 대륙급 전함은 인간에게 우호적인 부족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내심 충격이었다.
채식주의자 집단까진 아니더라도 물류업을 중심으로 건실하게 살아가던 부족이었기 때문.
독립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친일로 돌아선 인사들을 보던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이 이럴까?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물류업과 해적질을 병행해왔을지도 모른다. 대항해시대에도 상선이나 화물선이 툭하면 해적으로 변신하는 일이 잦았지 않은가. 이 시대 역시 그런 일이 빈번하고.
‘진짜 이판사판인가보다.’
그동안 쌓아온 지위까지 포기하면서 모든 민간인들 가득한 부족 터전까지 끌고 온 걸 보면, 저들도 정말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전쟁 터졌으면 정말로 에파바르 대학살이나 절멸수용소 생겼겠네.’
뒤통수도 이런 뒤통수가 없어.
정보부 눈에 안 걸린 걸 보면 비밀조직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으로 활동한 모양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스캔 화면으로 대륙급 전함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행성 파편을 개조한 것답게 비대칭적인 형태의 대륙급 전함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무력화하려면 피해가 크겠어.’
크기에 비해 안이 텅텅 비어 있는 함선과는 달리, 저건 통짜 소행성이라 안에까지 뭐가 꽉꽉 들어차 있을 거 아냐.
내부에서의 저항까지 고려하면 절로 눈앞이 아찔해진다.
스캔 결과를 보다 보니, 눈에 띄는 형상이 추가로 보였다. 다른 함선들과는 다르게 뭔가 비죽하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드로칸 함선으로 보여요.]드로칸 함선이 하나밖에 없는 걸 보면, 제대로 된 지원은 아닌 모양인데. 연락선이라도 되나?
내가 스캔 결과를 보는 동안 후작들은 필담(홀로그램 키보드)을 나눴다. 그 내용들은 앤젤라를 통해 죄다 내 귓가로 흘러들었다.
[이 씨발 좆같은 귀쟁이 새끼들 같으니라고! 감히 우릴 배신해!] [귀쟁이를 믿는 게 아니었어! 기껏 제국의 일원으로 받아줬더니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지금껏 주요 부족 해적들이 잘 안 잡히고 계속 꾸준히 나타나는 게 저놈들 때문이었구만?]사관학교 동기들이라 그런지 그들은 걸쭉한 입담, 아니 필담으로 분노를 토해냈다. 나랑 대화할 때의 말투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근데 저거 상대할 수는 있을까? 지금 전함이 다 합쳐서 3백 밖에 안 되는데.] [물류업 하던 놈들이라 무장은 그리 좋진 않을 거야.] [저 안에 더 있을 무장 선박도 고려해야지. 아무리 우리가 전함이 있다지만 숫자에는 장사 없다고. 지금 스캔 결과의 두 배라고 상정해야 돼.] [저 정도 크기면 적어도 전함 4백 대는 있어야 숫자 감당이랑 돌려깎기가 동시에 되겠는데?]돌려깎기는 앞줄 함선들의 실드가 다 깎일 때쯤 되면 뒤로 빠져서 쌩쌩한 상태의 뒷선이 앞으로 나서고, 뒤로 빠진 함선들은 피해가 회복되면 다시 앞으로 나서는 방식이다.
[최전선에서 못 빌려오겠지?] [당연히 못 빌려오지. 병력 빠지는 순간 바로 그쪽으로 촉수대가리 밀고 들어올걸? 애초에 귀쟁이가 그걸 노리는 걸 수도 있고.] [하, 타이탄급 전함 한 대라도 있으면 될 텐데.] [그런 건 죄다 최전선만 쓰는 거 알면서.] [좆됐네 이거. 어떡하냐.]타이탄급 전함?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체급구분이었다. 저 말대로 최전선에만 쓰여서 그런 모양이다.
[전함으로 안 되면 결국 보딩 뿐이지.] [지금 지상군 안 챙겨왔는데.] [야이 등신아.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지상군을 안 챙겨와?] [멀쩡하던 놈들이 배신하고 저것까지 끌고 나올 줄 누가 예상하냐? 그리고 지상군 챙기려면 집결 시간 더 걸린단 건 알잖아!] [학생 때부터 맨날 하나씩 빼먹더니만 여기서도 터지냐 이새끼야!]셋 중 가장 후방인 제이드 군구의 후작이 샌드백처럼 얻어맞았다. 얼굴도 유순하게 생겼던데 저 삼총사 중에 저런 역할이군.
[니들도 안 챙겨왔잖아! 강습수송선 없던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드로칸 함선이 있어. 저게 어떤 용도인질 몰라.] [광범위 실드라도 치는 놈이면 최악인데. 그건 특수탄환 있어야 하잖아.]오, 드로칸이 그런 강력한 실드를 가지고 있다고?
[탄 있어?]탄이 있냐는 물음에 티베리우스 후작은 긴 콧바람을 내쉬고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얼마 없어. 기껏해야 몇 분 뚫어놓을 정도?] [고작?] [그런 건 생산하자마자 최전선이 다 가져가니까 당연하지.] [그 정도면 전단 하나만 겨우 들어가겠네.]티베리우스 후작은 이를 부득 갈았다.
[할 수 없다. 일단 기습해서 숫자부터 줄이고 생각하자. 드로칸 놈들 함선은 크기만 빼고 죄다 똑같이 생겨먹어서 용도를 모르니 원. 일단 부딪쳐보고 생각해야지. 어쩌면 단순히 사신단을 태운 수송선일 수도 있어.] [대륙급은?] [강습병 부대한테 호출 넣을 거야. 맥쿼리 남쪽에 부대 하나 있으니까.] [워프로 오려면 몇 시간은 걸릴 텐데 버틸 수 있겠어?] [시발 버텨야지 어쩌겠냐. 그쪽은 특수탄환도 제법 가지고 있을 테니까 무조건 불러와야 돼. 저건 침투 후 엔진 폭파나 과부하밖에 답이 없어.] [그럼 전술은 E형?] [콜.]필담으로 회의를 끝마친 세 후작들은 작전, 아니 훈련 시작을 알렸다.
“모두들 바로 진입한다. 놈들이 눈치 채기 전에 사방에서 덮쳐서 최대한 숫자를 줄이고 진형을 갖춘 뒤 강습병 부대가 올 때까지 버틴다.”
[그럼 우리는 좌측.] [나는 우측으로 향하겠네.]“흥, 그럼 내가 전면으로 부딪히란 얘긴가?”
[자네 군구잖나. 당연히 그래야지.] [나중에 물자 지원은 충실히 해주겠네.]아까의 필담을 나누던 사람들이라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제되고 우아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후작들이었다. 티베리우스 빼고.
“쳇, 평소에도 기어 들어오는 드로칸 정찰함 잡는 게 난데. 전군 발진!”
‘아무것도 없는 우물’에서의 전격적인 ‘합동훈련’이 시작되었다.
***
에파바르 해적은 우물의 중앙에 있는 게 아니었다. 신호가 오면 곧바로 최전선 군구의 뒤를 치려는 건지, 최전선 군구와 인접한 북동쪽 가장자리 근방에 있었다.
그 잔뜩 모인 놈들을 향해 세 군구의 전력이 기습을 시도했다.
창밖의 별빛이 쭉 늘어지더니 검던 우주가 백색으로 뒤덮였다. 초광속 항행이었다.
그 백색의 세상 안에는 세 군구에 맞는 각자의 도색을 한 함선들만이 존재했다.
‘평소에도 훈련을 하나보네.’
진은 내심 감탄했다.
함선들 중에 딱히 흐릿하거나 뒤처지는 게 없다.
같은 군구의 함선이야 엔진이 서로 달라도 함대끼리 한꺼번에 묶어서 초광속 항행을 하는 방식이 있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군구가 속도를 맞추기에는 쉽지 않다.
초광속 항행이 끝나자 우주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별들 역시 위치가 살짝 달라진 것을 빼고는 그대로였다.
다만 시야의 아래쪽 우주 부분에 반짝이는 빛의 개수가 몹시 늘어나 있었다.
‘세상에, 저게 다 해적이라고?’
늘어난 불빛들은 죄다 크고 작은 에파바르 해적선들이었다.
창밖이 기울어졌다. 포격을 위해 선체의 방향을 트는 것이다. 아래가 오른편이 되고, 원래 오른쪽이 위쪽이 되었다.
“전군 발포!”
세 군구의 무자비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원거리 공격의 대부분을 이루는 고출력 레이저와 플라즈마 포가 첫 포문을 열어젖혔다.
어두웠던 우주는 순식간에 어린아이가 검은 도화지에 형광 사인펜으로 죽죽 그어버린 것 같은 꼴이 되었다.
‘쩌네.’
진의 소감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카메라 셔터를 터뜨리듯, 밝은 빛이 쉴 새 없이 번쩍이자, 갑작스런 기습을 받은 해적선들이 삽시간에 펑펑 터져나갔다.
민수용을 개조한 1km미만 체급(소형함)은 제식 군함의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스치는 것만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1km 이상 체급(중형함)들은 나름 버텼지만 배터리를 아끼지 않는 포격으로 인해, 포신을 향하기 전에 무력화되기 일쑤였다.
[경고. 적 순양함급 크기 함선이 접근 중입니다.]“옆구리 방향으로 접근 중. 보딩 시도로 보입니다.”
초광속 항행을 끝마친 군구 병력과 하필 운 없게 가까이 있던 해적선이었다.
전함 실드는 혼자의 포격으로는 뚫을 수 없으니, 육탄돌격으로 실드를 지나 과감히 함내침투를 시도할 속셈이었다.
“전함 상대로 어딜. 고체 탄환 준비.”
기본 수백 km거리에서 서로 회피기동을 하며 쏴대는 넓은 우주전이지만 탄환 무기는 낮은 원거리 명중률에도 여전히 현역이다.
에너지 실드의 배터리 소모는 고체 탄환을 막을 때 더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온 대형 해적선을 향해, 근거리 전용 포문들이 좌라락 열리며 불을 뿜었다.
전함의 월등한 화력 앞에 해적선의 실드가 순식간에 절반 이상 날아갔다. 일부분은 아예 깨져나가 표면 일부까지 걸레짝이 되며 내부에서 폭발이 펑펑 터져나갔다.
“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물류업으로 쓰이던 곳이라는 걸 증명하듯, 대륙급 전함 안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불빛들이 폭포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은하수가 찰랑이는 것만 같은 저 불빛들은 죄다 크고 작은 함선들이었다.
그들은 엔진을 풀파워로 틀고 있었다. 앞에서도 뒤편의 엔진 불빛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다.
화력 자체는 군구가 압도적이었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수 없듯 에파바르들이 군부의 진형 내로 파고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주위로 적 함선 다수 접근 중.]“지금 호위함은 뭐하는 거야! 뭐하는데 기함에 접근을 시켜!”
“대륙급 전함과 적 군함 체급 함선들이 원거리 견제 중입니다!”
어마어마한 길이의 대륙급 전함에서 시퍼런 플라즈마 광선과 어뢰들이 빠르게 날아와 기함 주변의 함선들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맥쿼리 쪽 말고도 다른 두 군구쪽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여기서 끝나면 뒤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대륙급 전함은 아군이 그 화망에 걸리더라도 가차 없이 쏴댔다.
그렇게 제국 측의 진형에 무수한 해적선이 섞여버리며, 그대로 난전이 되어버렸다.
세 군구 병력은 기습 공격으로 적의 전열이 흐트러지면 넓게 포위하는 식으로 공격을 하려 했다.
적이 당황하는 사이 가까이에 있는 함선들을 빠르게 처리해 아군과 적군 진형 사이를 벌리고, 진형을 갖춘 채 차근차근 조이며 시간을 버는 것이다.
일반적인 해적이었다면 기습 공격에 첫타를 얻어맞고 우왕좌왕하면서 세 후작의 예상처럼 그림이 그려졌을 터다.
하지만 상대는 그냥 해적이 아니었다.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겠다는 황태자의 선언에 눈이 돌아간 상태의 에파바르였다.
지금 그들은 항시 도주 각을 노리고 제 한 몸 건사하는 걸 최우선으로 두는 비열한 해적이 아니었다.
에파바르들의 극단적인 사회체계 특유의 엄격함은, 확고한 지도자와 목표가 있는 지금 자신들의 목숨을 아낌없이 불태우게 만드는 전사로 만들었다.
말벌한테 뜯겨 죽을 가능성이 큼에도 망설임 없이 달라붙으려는 꿀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