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
벽태산은 천경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즐기면서도 날 지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가까이에라도 있어.”
벽태산은 그 말을 남기고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천경완이 따라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천경완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벽태산의 등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봤다.
* * *
커다랗고 화려한 방에 술과 요리가 잔뜩 올라간 상이 쫙 깔렸다.
그리고 무려 열 명이나 되는 기녀가 우르르 들어와 벽태산 주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그럼 즐겨볼까?”
솔직히 천마로 살아갈 때에도 기루에 간 적은 손에 꼽았다.
굳이 기루를 찾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기루에 갔던 기억이 무려 이십 년 전이었다.
그러니 벽태산 입장에서도 오늘의 경험은 제법 기대되고 즐거웠다.
벽태산은 옆에 앉은 기녀에게 물었다.
“아까 나랑 왔던 호위는 어쩌고 있지?”
“같은 층 계단 입구에 길을 막고 서 있어요.”
“하여간 융통성 하고는.”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고는 술잔을 들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천경완의 태도는 예전 천마로 살아갈 때, 그의 직속 무사대였던 천영대 놈들과 닮았다.
융통성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이 오직 교주인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놈들이었다.
옛날 놈들을 떠올리며 술잔을 입에 갖다 댔던 벽태산은 멈칫하고는 다시 술잔을 내려놨다.
지금은 술을 마실 때가 아니다. 이 몸으로 술을 마셨다간 뒤를 장담할 수 없다.
솔직히 지금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돈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벽태산은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영약의 기운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이 몸에 쏟은 영약의 양이면 일백으로 이루어진 천영대 전원을 한 단계 위로 올려줄 수 있을 것이다.
벽태산은 기녀들을 슥 둘러봤다. 입가가 슥 올라갔다.
‘딱 적당하군.’
첫 시도이니만큼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공자님, 왜 안 드세요? 다른 술을 준비할까요?”
벽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이나 마셔라. 난 몸이 좋지 않아서 지금은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지금은 못 마시지만 몸이 조금만 좋아지면 잔뜩 마실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건 새로운 기회였다.
천마의 몸일 때는 아예 술에 취하질 않았다.
조절조차 못할 정도로 난폭한 힘이 온몸을 꽉 채우고 있어서 술기운이 들어오자마자 모조리 증발해 버렸으니까.
“술도 안 드시고······ 그럼 무엇을 할까요? 금을 타거나 가벼운 춤사위를 보여드릴까요?”
벽태산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굳이 금벽상단과 관계없는 기루로 온 이유는 다양한 관점으로 자신의 주변을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보다는 그냥 얘기나 좀 하자꾸나. 내가 누군지 아느냐?”
“금벽상단의 둘째 공자님이시잖아요.”
“둘째 공자라······ 외부에서는 날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구나.”
“불편하시면······.”
“됐다. 남이 어떻게 부르건 신경 안 쓴다. 피에 절은 살인마보다는 금벽상단 둘째 공자가 훨씬 낫지 않느냐.”
“아하하핫! 농담도 잘 하시네요. 얼굴만 잘 생기신 줄 알았는데.”
벽태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로 얻은 몸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바로 얼굴이었다.
“흥, 잘 생기긴.”
그 말에 기녀가 곱게 눈웃음을 치며 다른 기녀들을 슥 둘러봤다.
“쟤들 표정 좀 보세요. 다들 공자님 곁에 앉고 싶어서 안달이 났잖아요.”
“남자 얼굴은 자고로 사내다운 구석이 있어야지.”
“어머머? 충분히 사내다운데요? 그러면서도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구석도 있고, 아마 공자님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드물 걸요?”
기녀의 말은 칭찬이었지만, 벽태산은 또 마음에 안 들었다. 저 얘기는 과거의 자신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시답잖은 외모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다른 얘기나 해봐라.”
기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떤 얘기를 할까요? 여기 있는 애들 전부 외모만 고운 게 아니라 머리도 든든하니 제법 얘기할 맛이 날 거예요.”
향화루에서 첫 손에 꼽히는 기녀 열 명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래? 그거 기대되는구나. 그럼 요즘 무림 정세에 대해 얘기해볼까?”
기녀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무림에 관심이 있으시구나?”
“무한이야 금벽상단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필요 없으실 테고······ 요즘 무림맹 얘기가 제일 뜨거운데, 그것부터 시작할까요?”
“무림맹 좋지. 그래, 요즘 그놈들은 뭘 하고 있느냐?”
기녀들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아무리 듣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다간 곤욕을 치르실 수도 있어요.”
벽태산은 피식 웃었다. 감히 누가 곤욕을 치른단 말인가.
‘뭐······ 지금 이 몸으로는 조심하긴 해야겠지.’
괜히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도 않고 말이다.
“됐으니까 얘기나 해라. 무림맹이 어쩌고 있다고?”
“난리죠. 마교와 싸우려고 단단히 준비했는데, 마교가 안으로 꽁꽁 숨어버렸으니까요.”
“뭐? 마교가 숨어?”
벽태산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어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기녀를 쳐다봤다.
“마교 주변을 절진으로 감싸는 바람에 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되었다고 하던데요? 아주 특별한 진법이라던데?”
“현천진?”
“아! 맞는 거 같아요. 분명히 그런 이름의 진법이었을 거예요. 듣기로 열쇠가 되는 신물이 없으면 해체가 불가능한 진법이라던데요?”
“그거야 그렇지. 그래. 현천진이 있었구나.”
벽태산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천진은 특별한 발동조건을 가진 진법이었다.
일단 펼쳐지고 나면, 그곳을 드나드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정도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진법의 내부와 외부를 철저하게 분리해 버린다.
그리고 그 발동조건이 바로 교주의 죽음이었다.
해제하기 위한 열쇠 역시 교주였고.
즉, 새 교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현천진을 해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교주의 증명은 증혼마공이었다.
‘그럼······ 내가 나서기 전에는 현천진을 못 열겠네?’
교주 후보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벽태산이 죽기 전에 그 다섯을 전부 쳐죽였다.
벽태산으로서는 거리낄 게 전혀 없었다. 그놈들이 먼저 덤벼서 죽인 것뿐이니까.
“그래서 어쩐다더냐?”
“그건 저도 모르죠. 그냥······ 감시를 강화하고 말 것 같던데요?”
“조만간 자기들끼리 싸우겠구나.”
기녀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과 눈빛으로 자신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벽태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기녀를 쳐다봤다.
안목이나 정보력이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에서 기녀 노릇을 하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는 건가?’
벽태산은 묘한 눈으로 기녀를 보며 물었다.
“좋아. 그럼 이번엔 내 얘기를 해봐라.”
“예?”
“금벽상단의 둘째 공자에 대해서 아는 대로 읊어보란 말이다.”
기녀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렸다.
벽태산이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이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하건 절대 뒤탈이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욕을 해도 좋다. 못생겼다고 비난해도 좋고.”
왠지 가장 마지막 말에 진심이 더 담긴 것 같았다.
물론 그래도 기녀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마음 바뀌었다고 난동을 부려도 책임은 모두 자신들이 져야 할 테니까.
“한 명씩 돌아가면서 무조건 한 가지씩 말해. 자, 너부터.”
벽태산은 가장 가까이 있는 기녀를 보며 말했다.
기녀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체념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라고 한 것이 주효했다.
기녀들은 무조건 벽태산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서 벽태산과 관계된 소문을 하나씩 꺼내 놨다.
이건 소소로부터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정보였다.
물론 그걸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 앞뒤 정황, 그리고 지금 가진 정보와 비교 분석해서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만 선별했다.
그렇게 얻은 정보 중 가장 황당한 건 벽태산에게 남은 재산이 금 천 냥과 작은 장원 하나, 그리고 몇 개의 기루와 주루가 전부라는 점이었다.
언제든 벽태산이 독립을 원하면 딱 그것만 받을 수 있었다.
이건 애초에 벽태산의 형인 벽태수가 상단을 물려받을 때, 아버지가 쓸데없는 분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남길 당시, 벽태산의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누구도 그것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소문은 무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했다.
오직 벽태산만 지금 처음 알았다.
물론 몸 주인은 알고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또 몇 가지 새로운 정보를 획득한 벽태산은 옆에 앉은 기녀를 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자자.”
벽태산은 나머지 기녀들을 슥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전부 상대하기엔 버거울 것 같고······ 너 하나만 있으면 될 거 같구나.”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금조각들을 꺼내 기녀들에게 휙휙 던져 나눠주었다.
기녀들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그걸 받고 얼른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벽태산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옆에 앉은 기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침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그럼 즐겨볼까?”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며 기녀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기녀가 의아한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씨익 웃고는 기녀의 백회혈에서 혼백을 쑥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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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공이지만 마공이 아니다
천경완은 약간의 자괴감에 빠져 벽태산이 들어간 방을 가만히 바라봤다.
길쭉한 복도에 총 네 개의 문이 있었고, 벽태산은 열 명의 기녀들과 함께 마지막에 위치한 문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서 기녀들이 우르르 나왔을 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안 다음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향화루의 꼭대기 층이었다.
향화루는 다섯 개 층으로 이루어진 기루였고, 지금 그가 있는 다섯 번째 층은 귀빈들만 모시는 층이었다.
각 방에 설치된 간이 진법은 완벽한 방음은 물론이고 약간의 충격 흡수 기능도 제공한다.
무한에 기루가 많지만, 이렇게 고작 전각 하나만으로 높은 이름을 얻은 기루는 향화루가 유일했다.
네 개의 방이 모두 채워졌고, 각 방 입구에 호위 무사가 두 명씩 자리를 잡고 섰다.
완벽한 방음을 제공한다는 건 이럴 때 유용한 법이다. 문 앞에 서 있지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
천경완은 자신도 문 앞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기 서 있는 무사들 정도야 여기서 눈 감고 지풍만 날려도 단숨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렇게 드러난 놈들이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를 암습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무한에서 금벽상단의 둘째 공자를 감히 누가 암습한단 말인가.
게다가 암습하거나 납치해 봐야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전혀 없었다.
벽태산을 납치하는 것보다는 벽태수의 부인이나 자식을 납치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아니, 차라리 금벽상단의 총관을 납치하는 편이 낫다.
벽태산이 가지는 금벽상단에서의 위상은 딱 그 정도였다.
그렇게 상념에 젖어들고 있을 때였다.
“하아아아악!”
천경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명인지 신음인지 구분이 안 가는 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얼른 다른 무사들을 확인하니, 그들 역시 들었는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하고 가장 끝 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 소리가 난 방, 바로 벽태산이 들어간 방을 말이다.
“흐으으으응!”
안에서 또 신음 비슷한 것이 울렸다. 왠지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여기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향화루 오 층이잖아?’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방에서는 일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직 벽태산이 들어간 방에서만 그런 야릇한 소리가 났다.
‘대체 뭘 어쩌고 있기에······.’
소리는 그 뒤로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처음에는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 시간이 한 시진을 넘어 두 시진이 지나자, 결국 질려버렸다.
다른 방을 지키던 무사 중 하나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아프다던 사람 맞아?”
건강을 잃은 대가로 정력이라도 얻은 건지 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은 세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소리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고 벽태산이 나왔다.
복도에 있던 세 명의 무사는 충혈된 눈으로 벽태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의 표정에는 부러움과 존경심이 뒤섞여 있었다.
“잠이라도 자고 있지, 결국 밤을 꼴딱 새운 건가?”
벽태산의 말에 천경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천경완의 눈빛은 처음 기루에 올 때와는 아주 약간 달라져 있었다.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괜찮으십니까?”
천경완의 질문에 벽태산이 씨익 웃으며 자신이 나왔던 방을 힐끗 쳐다봤다.
“누구, 나? 아니면 저기?”
“둘 다입니다.”
“아주 좋아.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지. 나도 가서 좀 쉬어야겠으니까.”
“모시겠습니다.”
천경완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복도에는 짙은 적막이 맴돌았다.
네 개의 방 안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진법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 * *
“화령 언니, 괜찮아요?”
화령이라 불린 기녀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아, 괜찮지. 그럼, 괜찮고말고.”
몇몇 기녀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아요?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난리가 났다고 하던데······.”
꼭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는 건 아니었다. 호기심이 더 컸다. 어제의 일은 기녀들 사이에 쫙 퍼졌다.
화령이 밤새도록 지른 비명은 비단 꼭대기 층에 있던 무사들만 들은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