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04)
벽태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꿈은 오랜만인데?”
이 몸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꿈을 꿨다.
아니, 사실 천마이던 시절에도 꿈을 꾼 지가 굉장히 오래 되었으니, 몇 년 만인지 계산도 되지 않았다.
“쯧.”
나직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어제 백화루주의 보고를 받으면서 무림맹 놈들을 떠올리는 바람에 이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 무림맹 놈들이 나오는 꿈을 꾼 것 아니겠는가.
어젯밤 꿈은 오래전 기억의 한 자락이었다.
무림맹 놈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꿈으로 꿨다.
어제 백화루주를 만나면서 떠올렸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 돌아간 유일한 이유였다.
협상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누군가 굴복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저 술자리였다.
물론 그들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랬다.
술을 마시며 얘기를 듣다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들이었다.
당시 그놈들이 무림맹의 주력을 데려왔었는데, 아마 자신의 기분이 엇나갔다면 전부 죽었을 것이다.
그곳에 있던 천마신교 측 사람은 오직 천마인 자신 혼자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홀가분히 움직이려고 혼자서 그곳으로 갔다.
어떤 함정이 있든 박살 낼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술자리는 작은 누각이었는데, 그 누각을 천 명이 넘는 무사가 둘러싸고 있었다.
당연히 전부 무림맹 놈들이었다.
누각에 서서 그들을 쭉 둘러보다가 잠에서 깼다.
꿈이 너무 생생했다. 아마 당분간 이 기억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했다.
벽태산은 천천히 침상을 벗어났다.
그러자 문밖에서 소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씻으실 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소소와 단영이 커다란 통을 들고 들어왔다. 통에는 깨끗하고 따뜻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공을 익혀 힘이 세지는 바람에 둘이서도 충분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벽태산은 익숙하게 두 사람의 목욕 시중을 받아 몸을 개운하게 씻었다.
두 사람이 통을 들고 나가자, 다른 시비들이 들어와 음식을 벽태산 앞에 차렸다.
벽태산은 시비들의 음식 시중을 받으며 아침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시비들이 우르르 들어와 벽태산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벽태산은 일단 자신의 개인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천경완과 유서연이 새로 익힌 무공을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몇 가지를 가볍게 짚어준 다음 그곳을 나서 단체 연무장으로 향했다.
무량보를 수련하는 자들의 상태를 파악하다가 연하린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해.’
그냥 독한 것도 아니고 지독했다. 이제 조만간 연하린에게도 적합한 무공 하나를 건네줘야 할 듯했다.
‘저 독기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쓸 만한 무공이······.’
벽태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연무장을 나섰다.
연무장에서 나온 벽태산이 다음 목적지로 삼은 곳은 벽태수의 집무실이었다.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총관까지 챙겨줬는데, 정작 가족인 벽태수는 방치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최소한 총관에게 준 흡정결보다는 괜찮은 걸 벽태수에게 줘야 마음이 충족될 것 같았다.
그래서 미리 적당한 무공까지 준비해뒀다.
벽태수가 바쁘다는 것까지 감안해서 들이는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이 많은 제법 쓸 만한 마공을 변형시켜 비급으로 엮은 것이다.
원래 이름은 탐혈마공이다. 피를 마시면서 수련을 하는 기괴한 마공인데, 그걸 변형시켜 적당한 약초를 달여서 마시는 걸로 변형시켰다.
그러니 이걸 만드는 데 상당한 공이 들어간 셈이었다.
탐혈마공을 수련할 때는 보통 짐승이나 가축을 잡아 그 피를 모아 마시면서 수련하니 귀찮기는 해도 따로 돈이 들어갈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변형된 탐혈마공은 약재를 달여 먹어야 하니 무공 수련에 제법 많은 돈이 들어간다.
돈이 많은 금벽상단의 주인 정도나 되어야 수월하게 익힐 수 있는 무공인 것이다.
그렇게 무공에 대해 잠시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벽태수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 벽태수의 집무실에서 초서란이 나오고 있었다. 벽태수에게 인사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초서란은 벽태산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얼른 달려왔다.
“장주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그나저나 어떻게 한 번도 절 안 찾아오실 수가 있나요? 그래도 같이 술도 마신 사이인데.”
벽태산은 대꾸도 하지 않고 초서란을 슥 지나쳤다.
초서란이 황당한 눈으로 벽태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벽태산이 벽태수의 집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얼른 외쳤다.
“저, 그분들을 도와서 약을 만들고 있어요! 그러니 이따가 오셔서 응원이라도 해주시면 안 될까요?”
벽태산은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하지만 초서란은 빙긋 웃으며 천추신의와 일침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벽태수에게 탐혈마공을 전해준 벽태산은 천추신의와 일침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원래 약을 만들던 정원은 이제 너무 비좁아서 더 큰 공간으로 옮겼다.
그곳은 벽태산이 머무는 전각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오가기가 좀 불편하긴 하지만, 전에 쓰던 정원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연무장으로 만들기 위해 터만 다져놓았기에 약을 만드는 공간으로 쓰기 딱 좋았다.
공터에 도착하니 바쁘게 움직이는 천약방 의원들이 보였다.
천약방에서 고르고 골라 데려온 의원들인데,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약초를 다듬어 말리고, 솥을 주걱으로 휘젓고, 배합이 끝난 약재를 단약으로 만드는 등,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을 잡아먹는 잡일이었다.
원래 그 일을 하던 천추신의와 일침괴는 아주 편안하게 초서란과 마주앉아 새로운 약에 대한 논의를 했다.
사실 논의는 핑계고 그냥 쉬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쉬고 있을 때, 벽태산이 나타났다.
천추신의와 일침괴는 벽태산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이구, 좀 쉬었으니 이제 슬슬 일을 해 볼까?”
꼭 누가 들으라는 듯 제법 큰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천추신의는 가까운 곳에 쌓인 약초더미로 가서 작두질을 했다.
당연히 일침괴도 마치 천추신의와 한몸이라도 된 것처럼 똑같이 움직여 약초를 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난데없는 행동에 함께 있던 초서란은 크게 당황했다.
마치 자기 혼자서만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모양새가 되었다.
“역시 와주셨네요.”
초서란은 얼른 벽태산에게 다가가 살짝 눈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했다.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고 천추신의와 일침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초서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벽태산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래도 제가 와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거 아닌가요?”
초서란이 도착한 이후부터 약 만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그러니 도움이 되고 있는 건 맞다.
더구나 초서란은 천추신의, 일침괴와 함께 약에 대한 연구를 함께 진행했는데, 자신이 아는 지식을 아낌없이 풀었다.
물론 천추신의와 일침괴도 초서란의 태도에 따라 가진 지식을 많이 풀었고.
그래서 지금 만들고 있는 약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천추신단만 해도 벌써 처음 천추신의가 만들었을 때보다 세 배 정도의 성능 향상이 이뤄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발전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일단 목표는 열 배인데, 그걸 이뤄내면 웬만한 영약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니, 오히려 훨씬 대단한 약이 된다. 천추신단은 내성이라는 게 없어서 오랫동안 복용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초서란은 벽태산이 대꾸를 하든 말든 자기가 할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한 번만 해주세요.”
벽태산은 걸음을 멈추고 초서란을 쳐다봤다.
초서란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에 그러셨다면서요. 진맥하려면 약왕 정도는 데려오라고. 그래서 이렇게 왔답니다.”
초서란이 양팔을 활짝 펼치며 그렇게 말했다.
벽태산은 그 말을 들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뭐······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긴 하지.”
초서란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진맥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거절한다.”
“예? 왜요?”
“마음이 변했다.”
초서란은 벽태산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떻게 저런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근처에서 이쪽을 보지도 않고 약초만 썰고 있는 천추신의와 일침괴를 바라봤다.
어찌나 따가운 눈으로 바라보는지 결국 천추신의와 일침괴가 슬그머니 그녀를 쳐다봤다.
초서란은 두 사람에게 마구 눈짓을 했다. 약속을 했으면 지키라는 뜻이었다.
천추신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목을 좀 가다듬으며 벽태산에게 말했다.
“저도 슬슬 공자님을 제대로 진맥할 때가 된 것 같은데······ 한 번 받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천추신의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은 일침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크흠.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예전에 공자님 몸 상태를 확인했을 때 진짜 놀라긴 했으니까요. 많이 괜찮아진 것 같긴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병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참에 확실히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벽태산이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 눈빛이 마치 이놈들이 왜 이러나,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네놈들 속을 다 알고 있다고 하는 듯하기도 해서 굉장히 불안하고 불길했다.
결국 그 불안감을 못 이기고 천추신의가 말을 툭 뱉었다.
“아니, 그거 한 번 한다고 닳습니까? 그냥 잠깐 손목만 맡기시면 되는 일인데.”
벽태산이 피식 웃으며 초서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여자 온 거, 하린이도 아나?”
천추신의가 갑자기 입을 헙 다물었다. 당연히 아직 모른다. 연하린은 지금 수련 때문에 주변 모든 걸 차단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예전 약왕에 대한 얘기를 할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때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끝까지 쫓아오며 추궁하던 연하린 때문에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그때의 일이 떠올라 천추신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침괴는 낄낄 웃었고.
초서란은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벽태산은 그런 초서란을 보며 말했다.
“천약방이 꼭 무림맹과 손을 잡아야 할 이유가 있나?”
“예?”
초서란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피식 웃었다.
“됐다. 길이 꼭 무림맹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라.”
초서란은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때 그녀의 코앞으로 손이 불쑥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나니, 벽태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싫으면 관두고.”
그건 벽태산의 손이었다.
초서란은 벽태산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목을 살며시 쥐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맥에 집중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맥을 통한 벽태산의 몸 상태가 차근차근 그려졌다.
병의 유무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기맥의 흐름, 체형이나 체질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렇게 한 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한 다음, 다시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무려 세 번을 진맥했다.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단순했다.
‘너무······ 평범해.’
벽태산의 몸이 너무 평범해서였다.
초서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리도 평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도 호무련에서 벽태산이 한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얘기를 들었다.
한데 지금 이 몸으로는 절대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없다.
누군가 뛰어난 사람이 도와줬거나, 아니면 소문이 와전되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적어도 그녀의 상식 안에서는 그랬다.
“아직 멀었나?”
벽태산의 물음에 초서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놓았다.
“아뇨. 다 끝났어요.”
“그래, 살펴본 소감은?”
초서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병은 하나도 없네요. 절맥이라고 들었는데, 그 흔적도 전혀 없고요.”
그렇게 말한 초서란은 약간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천추신의와 일침괴를 바라봤다.
“확실히 두 분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사실 아무리 절맥을 완치한다고 해도 흔적은 남는 법인데, 그런 게 전혀 없다니, 솔직히 좀 놀랐어요.”
하지만 정작 그 얘기를 들은 천추신의와 일침괴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벽태산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솔직히 자신들이 한 게 없지 않은가.
벽태산은 혼자서 절맥을, 그것도 시체나 다름없는 몸을 되살려놓은 것이다.
“고, 공자님. 저도, 저도 진맥을 해보고 싶습니다.”
“저도 하고 싶습니다.”
천추신의와 일침괴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나서자, 벽태산이 씨익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신중한 표정으로 진맥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자님은 정말······ 알 수 없는 분이시군요.”
일침괴의 말에 천추신의가 동의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벽태산의 몸은 예전 절맥일 때와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세 의원이 아주 복잡한 시선으로 벽태산을 바라보고 있을 때, 화옥이 다급한 걸음으로 그곳에 들어왔다.
“공자님!”
그녀의 목소리도 걸음만큼이나 다급했기에 다들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봤다.
화옥은 벽태산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호무련의 순찰당주가 찾아왔습니다.”
호무련의 순찰당주는 서문덕이다. 이곳 무한에 호무련 무한지부를 세우는 일 때문에 왔고, 지금까지 별다른 잡음 없이 일을 진행 중이었다.
한데 화옥이 저렇게 다급한 표정인 걸 보면 그게 주가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벽태산의 물음에 화옥이 대답했다.
“의창에 반강시가 떼로 쏟아져 나와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벽태산의 눈이 번득였다.
“메뚜기 같은 놈들이로군.”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초서란을 슬쩍 쳐다봤다.
아무래도 이쪽은 조금 미뤄둬야 할 듯했다.
끝
“공자님, 어쩌실 겁니까?”
천추신의는 금벽장을 나서는 서문덕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방금 서문덕과 만나 얘기를 들었는데,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습격에 동원된 반강시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예전 벽태산이 의창에 있을 때는 제대로 된 반강시의 습격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강시의 습격이 있을 때마다 벽태산이 개입했으니까.
게다가 나중에는 반강시를 보관하는 곳으로 가서 모조리 쓰러뜨려 버렸으니 반강시를 제대로 겪은 경험이 거의 없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