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2)
팔을 내주고 목숨을 건진 것이다.
천경완이 검을 떨쳐 피를 털어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유서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상상 이상이었다.
천경완이 벽을 부수고 한 계단 위로 올라갔다는 건 알았지만, 그 차이가 이렇게 날 줄은 몰랐다.
멍하니 천경완을 바라보던 유서연의 귓가에 벽태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러 터진 놈.”
그 말에 유서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벽태산을 바라봤다.
흑도 나부랭이 세 명은 이미 전의고 뭐고 다 잃은 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뭐해? 저놈들 안 잡고.”
벽태산의 말에 유서연이 아차하는 표정으로 얼른 몸을 날렸다.
그리고 세 명의 흑도 사내를 단숨에 제압했다.
전의를 상실한 적의 혈도를 짚는 것쯤 유서연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팔 잘린 사내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경완이 잡으려고 했지만, 도망치는 사내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특히 어둠 속에서 기척을 숨기는 능력이 대단해서 일단 작정하고 도망치니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천경완은 여기서 멀리까지 뒤쫓아선 안 된다. 그에게 있어 최우선은 벽태산의 안전이었으니까.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생기면 아마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벽태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천경완의 눈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 사내가 보였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놓쳤습니다.”
벽태산은 그런 천경완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물러 터졌어.”
천마였다면 저따위 실수를 저지른 놈을 용서했을 리가 없다.
고작 저 정도로 죽이진 않았겠지만, 다신 천마 앞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왠지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저걸 어떻게 해야 사람 구실을 할지 고민이로군.”
벽태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이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면서.
천경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자, 그럼 이놈들을 처리해 볼까? 그냥 죽여 버리는 게 제일 낫겠지?”
그 말에 흑도 사내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왠지 정말로 자신들을 그냥 죽여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벽태산의 말에 깃든 진심이 그들의 위기감을 두드린 것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뭐든 물어보시면 전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벽태산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역시 그냥 죽이는 게 낫겠어.”
흑도 사내들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신 차렸습니다!”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벽태산은 그런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흑도 사내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살폈다.
벽태산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전부 말하겠다면서? 얼른 말 안 하고 뭐해? 뭐야, 설마 정말로 죽고 싶은 거였어? 그게 제일 쉽긴 하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적룡방입니다!”
“부방주의 명령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보호비 안 내는 놈을 잡아다가 족쳤습니다!”
마지막에 말한 놈이 흠칫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놈이 그놈을 흘겨봤다.
왜 쓸데없는 얘기를 끼워 넣느냐는 질책이었다.
벽태산이 씨익 웃었다.
“재미있네. 그렇게 하면 돼. 말 나오는 동안은 살려두지.”
벽태산이 천경완에게 턱짓을 했다.
“들고 따라와.”
천경완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놈들도 낙화루에 데리고 가는 겁니까?”
“말했잖아. 말하는 동안은 살려둔다고. 낙화루에서 사람 몇 명 구해서 이놈들이 말하는 거 싹 적어둬. 말 끊어지면 그냥 죽이고.”
천경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유서연은 황당한 눈으로 그런 천경완과 벽태산, 그리고 무릎 꿇고 앉은 흑도 사내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황당과 당황을 오가고 있었다.
“지금 이 와중에도 기루에 가신다고요?”
벽태산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유서연을 쳐다봤다.
“그럼 이런 불쏘시개 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원래 하려던 걸 포기해야 하나?”
유서연이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이 사람, 정말 예전의 그 벽태산이 맞나 싶었다.
* * *
유서연은 멍하니 천경완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벌써 자신이 찍어뒀던 기녀를 데리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그 기녀를 봤을 때도 어이가 없었다.
벽태산이 찍었다고 하기에 얼마나 대단한 기녀일지 궁금했었다.
한데 막상 보니 대체 저런 여자를 왜 찾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하린과 비교할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이곳에서 마주쳤던 그 어떤 기녀보다 못해 보였으니까.
한데 그보다 더 어이없는 일을 천경완이 하고 있었다.
정말로 낙화루에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을 모아서 데려온 것이다.
그리고 아까 잡은 흑도 놈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라고 시켰다.
설마 시킨다고 정말로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흑도 놈들이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굴려 열심히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말이 잠시라도 끊어질라 치면, 천경완이 검을 뽑아 목에 갖다 댔다.
짜르르 살기가 흐르는 검을 목에 댄 것만으로 흑도 놈들은 죽음의 위기를 느껴야 했고, 아무 말이나 막 쏟아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들이 그동안 했던 모든 일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평소에 주로 하던 일과도 나왔고, 적룡방에서 앞으로 하려고 계획한 나쁜 짓들도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저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말을 하는 중이었다.
거짓을 말할 생각도 못하는 듯했다.
‘저걸 대체 언제까지 하려는 걸까?’
유서연은 무표정하게 검을 들고 서 있는 천경완을 힐끗 바라봤다.
‘고지식하기는.’
한데 그 고지식함이 왠지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있을 때, 전각에서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흐으아아악!”
유서연이 깜짝 놀라 전각을 바라봤다. 당장 뛰어 들어갈 뻔했는데, 어느새 다가온 천경완이 그녀의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뭐, 뭐죠? 뭐예요, 방금 그거!”
“이래서 같이 오기 난감했습니다.”
유서연이 경악어린 시선으로 천경완과 그의 뒤에 우뚝 솟은 전각을 번갈아 바라봤다.
여전히 전각 안에서는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유서연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어어, 어, 그, 그러니까······!”
유서연의 시선이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천경완과 전각을 오갔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가씨, 진짜 다시 잘 생각해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유서연의 귀에는 저 소리가 고통을 토해내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흑도의 세 사내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사방에서 풍기는 분냄새, 그리고 전각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들의 감각을 자극했다.
‘젠장, 차라리 고문을 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이 소리가 앞으로 세 시진 정도 더 이어질 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천경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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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냄새가 난다
해가 중천을 지날 즈음, 벽태산이 전각에서 나왔다.
밤새 혼백에 붙은 영력을 흡수하고, 그걸로 증혼마공을 돌려 끊어진 기맥을 이어붙이는 작업을 모두 끝낸 다음에 나온 것이다.
전각 앞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벽태산에게 집중되었다.
천경완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유서연은 짐승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흑도의 세 사내는 경악과 존경이 뒤범벅 된 경이어린 표정이었다.
벽태산의 시선이 제일 먼저 닿은 곳은 흑도의 세 사내였다.
“뭐야, 아직도 살아 있었어?”
그 말에 흑도 세 사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천경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계속 말하고 있었습니다.”
벽태산이 눈에 이채를 띠고 세 사람을 쳐다봤다.
세 사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간절한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이번엔 유서연을 쳐다봤다.
유서연이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밤 새 그 소리를 들었으니 경계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정리해 봐.”
“예?”
“밤 새 들었을 거 아냐. 정리해 보라고.”
유서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 지금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절 희롱하시는 겁니까!”
벽태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뭐야, 너도 슬슬 혼백에 때가 묻기 시작하는 건가?”
혼백에 때가 묻는다는 말에 유서연이 발끈하려고 했다. 하지만 벽태산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밤 새 저놈들이 떠든 말 들었을 거 아냐. 정리해 보라고. 설마 그냥 흘려듣기만 한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정말 실망인데······.”
유서연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해 버렸다. 밤새 들려온 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너무 휘저었던 모양이다.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른 외치듯 말했다.
“저, 적룡방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건 나도 어제 들어서 알고 있고.”
유서연은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차분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잔챙이들입니다. 적룡방에서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놈들을 선발해서 보냈습니다.”
“딱 봐도 그래 보여. 다른 놈들에 비해 많이 더럽지도 않고.”
저게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유서연은 일단 할 말부터 끝내기로 했다.
“어제 함께 왔던 사내의 정체는 적룡방의 부방주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서연은 그 뒤로도 차근차근 어제 들은 말을 정리해서 풀어냈다.
사실 많은 말을 쏟아내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 잘 조합하면 쓸 만한 정보로 둔갑할 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어제 그 자의 실력을 봤을 때, 절대 적룡방 수준에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즉, 다른 조직이 적룡방 뒤에 있었다.
저들이 받은 명령은 벽태산을 죽이라는 게 아니라, 벽태산을 적룡방으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어제 그 사내가 천경완을 잡고 있는 사이 이놈들이 벽태산을 납치하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계획이었다.
저들이 예상치 못한 건, 천경완의 실력이 그들의 계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과 유서연이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저들은 공자님에게 살짝 겁만 줄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저들이 공자님을 납치했다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즉, 벽태산을 죽일 거라는 뜻이다.
아마 그렇게 되면 적룡방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거기 얽힌 자들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네 생각은 저들 뒤에 종리세가가 있다?”
“합리적 추측입니다.”
벽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경완을 쳐다봤다.
“넌?”
천경완의 표정에 오랜만에 감정이 떠올랐다. 정말 당황한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천경완이 고개를 살짝 숙여 유서연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종리세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벽태산이 씨익 웃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밥 먹고 자야겠다.”
벽태산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천경완이 얼른 물었다.
“저들은 어쩝니까?”
벽태산이 힐끗 돌아봤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세 사내가 애처로운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데려와.”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종리세가가 아닌 것 같은 이유가 뭐죠?”
유서연의 물음에 천경완이 머뭇거렸다.
“설마 제가 기분 상했을까봐 그러시는 건 아니죠?”
맞지만, 맞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묻는데 대답은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종리세가에서 그렇게 대놓고 움직일 것 같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 말에 유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종리세가는 교활하다. 벽태산이 말했던 것처럼 비열한 구석도 있지만, 유서연이 보기에는 비열보다는 교활이 더 어울렸다.
그런 자들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세가에 소속된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려고 해도 말릴 것이다.
그들이라면 이보다 훨씬 은밀한 수를 쓸 것이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이 상황을 이용했다는 건가?’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으면서 어제 팔이 잘리고 도망친 그놈처럼 강한 무인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
‘헤아릴 수 없이 많긴 하지.’
하지만 굳이 이런 일을 벌일 만한 곳을 추려내면 몇 남지 않는다.
‘천금련?’
유서연의 표정과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