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24)
당연히 아니다. 그럴 거면 지금까지 겪은 고통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던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연무장을 나섰다.
* * *
연무장을 나선 벽태산에게 총관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공자님! 미리 연락을 좀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총관은 서운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동안 별 일은 없었고?”
“별 일이 있을 게 뭐 있겠습니까. 아, 공자님. 천약방이 여기 무한으로 이주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벽태산이 약왕인 초서란과 함께 있으니 혹시 들은 얘기가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요즘 그것 때문에 무한이 좀 시끄럽습니다. 천약방 하면 약으로는 천하제일인 곳 아니겠습니까? 다들 천약방이랑 어떻게든 인연을 맺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총관은 그렇게 말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리고 벽태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살짝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는 벽태산에게 말했다.
“공자님. 장주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 지금 가면 되나?”
총관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도착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내일 푹 쉬시면서 여독을 푸시고 모레 저녁에 찾아가시면 됩니다.”
“뭐, 그럼 그러든가.”
“그리고 공자님. 그 자리에 소장주도 나오실 겁니다.”
소장주라 함은 벽태수의 아들인 벽제혁을 말한다.
벽태산이 고개를 돌려 총관을 쳐다봤다.
“난 금벽상단에 발을 걸칠 생각이 없다는 거, 총관은 알지 않나?”
총관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야 알고 있습니다. 아마 장주님께서도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후계자 문제 때문에 보자고 하는 건 아니리라.
“뭐, 알았다. 모레 가도록 하지.”
벽태산이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전각으로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총관은 그런 벽태산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끝
벽태산 일행은 금벽장에 돌아온 후, 빠르게 평소로 돌아갔다.
천경완과 유서연은 연무장에 틀어박혀서 수련에 매진했다.
두 사람은 연하린의 변화에 정말 깜짝 놀랐다.
왠지 이대로 가면 연하린에게 크게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천경완과 유서연은 지금까지보다 더 치열하게 수련했다.
덕분에 연무장의 분위기가 예전보다 훨씬 뜨거워졌다.
천추신의와 일침괴, 초서란은 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동안 천약방 의원들이 열심히 준비해 둔 재료를 이용해 천추신단을 만들고 내상약과 금창약을 잔뜩 만들었다.
천약방의 약은 무한으로 이주가 끝난 뒤부터 차근차근 계획에 따라 만들기로 했다.
어쨌든 이제 함께 가야 할 사이가 되었기에 비법 교류도 훨씬 활발하게 이뤄졌다.
벽태산의 시비들은 벽태산을 모시는 데 집중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무공 수련을 잊지 않았다.
그녀들은 벽태산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부분 흐름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 여파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테고.
거기서 버티려면 약해선 안 된다.
다들 여독도 제대로 풀지 않고 바로 그렇게 일상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벽태산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시비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부하들을 한 번 둘러봤다.
낭인시장과 흑도 무리들, 그리고 백화루까지 들러서 전체적으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다보니 금세 저녁이 되었다.
벽태산은 미리 약속한 대로 벽태수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서 총관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마 벽태산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총관이 얼른 벽태산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벽태산이 그런 총관을 가만히 쳐다봤다.
“공자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벽태수의 집무실인데 안내를 한다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벽태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무명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잡아 족치는 것만 해도 복잡한데, 굳이 금벽상단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둘 생각이 없었다.
“이쪽입니다.”
총관이 안내하는 곳은 벽태수의 집무실 바로 옆에 있는 접객실이었다.
예전에도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벽태산은 저걸 보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뭔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받았었다.
“저 안에서 소장주도 장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벽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아직 철이 다 안 들었습니다. 혹여 기분이 상하시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싫다.”
“예? 고, 공자님!”
이렇게 단칼에 싫다고 말할 줄은 몰랐는지 총관이 당황해서 걸음을 멈췄다.
“뭐, 죽이지는 않으마.”
총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 공자님!”
벽태산은 대꾸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접객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있던 벽제혁이 동그래진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 뒤로 총관이 후다닥 따라 들어왔다.
“소장주, 그냥 그렇게 앉아 있으면 어쩌시오!”
총관이 다급히 말하자, 벽제혁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벽태산에게 고개를 숙였다.
“숙부님을 뵙습니다.”
나이는 비록 한 살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엄연히 숙부는 숙부였다.
그리고 총관이 보는 앞에서 벽태산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금벽상단에서 벽태수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바로 총관 가무진이었으니까.
나중에 벽제혁이 금벽상단을 잡음 없이 물려받기 위해서는 총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벽태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벽제혁의 인사를 받아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벽제혁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 저리도 당당하단 말인가. 문득 예전의 벽태산이 어땠는지 떠올려봤다.
잘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볼 때마다 병색이 완연해서 저러다 금방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데 오늘 보니 건강해도 너무 건강했다.
슬며시 불안감이 생겨났다.
벽제혁도 아버지인 벽태수가 벽태산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다.
예전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야 벽제혁이 가진 소장주라는 지위가 흔들릴 일이 없었지만, 벽태산이 저렇게 건강해진다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벽제혁과 그의 어머니인 채미령의 생각이었다.
다른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벽태수마저도 그랬다.
벽태수는 자신의 생각을 자주 표현했다.
혹시라도 벽제혁과 채미령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봐서였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 모든 불안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벽제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그런 벽제혁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지금 벽태산의 관심을 차지하는 것은 예전에도 겪었던 바로 그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때와 달리 몸이 다 나았고, 증혼마공도 몇 번의 깨달음을 얻어 더 발전했다.
당연히 감각도 예민해지고 폭넓어졌다.
그래서 뭔가를 더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여겨 거기에 집중했다.
오늘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지 대충 포착할 수 있었다.
‘지하에 뭔가 있는 모양인데?’
여기 접객실의 지하가 아니라 벽태수의 집무실 지하였다.
한데 이쪽으로 뚫린 구멍이 있어서 접객실에서 더 강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벽태산은 왜 이 느낌이 익숙한지도 알아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증혼마공인데?’
이건 증혼마공을 통해서만 만들어낼 수 있는 기운이었다.
그것이 장주의 집무실 지하 깊은 곳에 있었다.
벽태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이것 봐라?’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증혼마공의 흔적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역대 천마 중 누군가와 이곳 금벽상단이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리라.
‘내가 여기서 이 몸을 얻게 된 것도 그저 우연만은 아니라는 뜻인가?’
벽태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접객실 문이 열리고 벽태수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느냐. 오늘 중으로 반드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좀 늦었다. 미안하구나.”
벽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아들인 벽제혁과 동생인 벽태산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그가 들어오자, 총관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벽태수는 총관이 나가기 전 의미심장하게 눈을 마주친 후, 벽태산과 벽제혁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자, 일단 식사부터 하자꾸나. 오늘 일이 많아 종일 굶었더니 배가 많이 고프구나.”
잠시 후, 그곳으로 각종 요리가 들어왔다.
세 사람은 편안하게 식사를 하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요리는 정말 맛있었고, 대화는 아주 평범했다.
가벼운 근황에 대한 얘기가 주였고, 가끔 무한에 도는 소문을 화제로 꺼내기도 했다.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식사가 끝났다.
접객실 내부를 하인들이 들어와 정리하고 나자, 세 사람은 차를 한 잔씩 마시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벽태수는 시종일관 대화를 주도했다. 그러면서 벽태산과 벽제혁의 분위기를 살폈다.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벽제혁은 아직 많이 모자랐다. 나이가 어려서 그렇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어설펐다.
심정이나 감정이 고스란히 표정이나 말투에 드러났다.
식사부터 시작해 차를 마실 때까지 고작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 동안 벽제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파악할 수 있었다.
반면 벽태산은 벽제혁과는 전혀 달랐다.
솔직히 말해서 속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벽태산이 일부러 보여주는 모습만 확인했을 뿐이다.
자신은 금벽상단에 전혀 관심이 없고, 조만간 떠날 거라는 마음만 살짝 드러냈다.
그 점이 벽태수는 못내 아쉬웠다.
솔직히 벽태산과 벽제혁이 함께 가문을 이끌어 나갔으면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벽태수가 불쑥 말했다.
“태산이는 금벽장에서 나갈 생각이로구나.”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벽제혁이 놀란 눈으로 벽태산과 벽태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벽제혁이 불안한 눈으로 벽태수를 바라봤다.
‘설마······ 상단을 반으로 쪼개시려는 건 아니겠지?’
벽태수는 벽태산을 보며 말했다.
“금벽상단이 보유한 기루를 전부 넘겨주려고 한다.”
벽태수의 말에 벽제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벽상단이 보유한 기루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전부 준단 말인가.
그래도 금벽상단이 가진 금력을 생각하면 기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벽제혁은 불안했다. 그게 끝이 아닐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벽태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히 표국도 주고 싶은데, 그건 네 생각도 들어야 할 것 같구나. 받기 싫다면 그에 상응하는 돈으로 주마.”
벽태산이 담담한 눈으로 벽태수를 쳐다봤다.
“금 천 냥, 장원 하나, 기루와 주루 몇 개로 정해진 걸로 압니다만.”
벽태수가 빙긋 웃었다.
“그거야 아버지가 남긴 것이고. 난 내 동생이 가문에서 나가는데 아무것도 안 주는 매정한 형이 되고 싶지 않구나.”
벽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이걸로 받네 마네 실랑이 하는 것도 귀찮고.
“그러죠. 기루까지. 표국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돈으로······.”
“아껴두시죠.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벽태수가 입을 다물고 벽태산을 바라봤다. 왠지 벽태산의 말에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도록 하마.”
벽태수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벽제혁을 쳐다봤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혹시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하거라.”
벽제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벽태산이 고작 기루만 가지고 금벽상단에서 나가 준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좋구나.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이제 내가 너희를 부른 진짜 이유를 얘기하마.”
진짜 이유라는 말에 벽제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벽태산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 이유가 지하에 있는 증혼마공의 기운과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내가 굳이 접객실에서 너희를 보자고 한 이유는 여기에 입구를 여는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벽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접객실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구석 바닥을 발로 꾹 밟으니 미약한 진동이 일어났다.
물론 그 진동을 느낀 건 이 안에서 벽태산이 유일했다.
벽태산은 벽태수의 집무실 쪽을 쳐다봤다.
방금 그쪽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따라오너라.”
벽태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갔다.
집무실에 들어선 벽태수는 일단 문을 잠갔다. 그리고 서탁을 옆으로 치웠다.
벽태수는 바닥 어딘가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러자 그곳이 안으로 움푹 들어갔다.
그 안에 있던 손잡이를 쥐고 당기자, 바닥에 만들어져 있던 문이 천천히 위로 열렸다.
* * *
정말 깊었다.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돌아가듯 이어진 계산이었는데, 그걸 타고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이내 넓은 방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천장이며 벽에 야명주가 촘촘하게 박혀 있어 방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건 야명주가 아니었다.
방의 끝에 거대한 벽이 세워져 있었다.
황금으로 만든 벽이.
벽태산은 그 벽을 보고서 이 상단의 이름이 왜 금벽상단이 되었는지 이해했다.
애초에 이 상단은 저 벽을 보유하고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