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53)
혁련균의 검이 허공을 훑고 지나갔다. 검에 담긴 영력도 허무하게 흩어졌다.
물론 이 공격으로 적을 죽였으면 좋았겠지만, 혁련균은 애초에 그럴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렇게 틈을 만들어 도망칠 시간을 벌고자 했을 뿐이었다.
혁련균은 검을 휘두르는 힘을 이용해 달리는 방향을 살짝 틀었다.
덜컥!
“커억!”
혁련균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 뒷목을 꽉 움켜쥐었는데, 그 바람에 몸이 허공에 붕 떴다.
그리고 그 충격 때문에 순간적으로 앞이 깜깜해진 것이다.
목이 뜯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리고 목을 쥔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꽈앙!
“커어억!”
이상하게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 온몸에 힘을 둘러 바닥에 아무리 강하게 부딪히더라도 아무 타격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바닥에서 올라오는 모든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견뎌내야만 했다.
“푸화악!”
입에서 피가 확 튀어나갔다.
혁련균은 그제야 시야가 환해졌다. 누운 상태에서 확인해보니 벽태산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하하. 어이가 없구나.”
혁련균이 헛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냥 싸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한 건 무작정 도망치려고 했기 때문이리라.
혁련균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끄응.”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바닥을 보니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얼마나 세게 처박혔는지 알 수 있었다.
혁련균은 일단 몸 상태부터 정리했다.
우우웅.
영력을 돌리니 내상이 좀 가라앉았다.
피가 있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었으니 됐다.
벽태산은 그런 혁련균을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영력이 제법이었다.
흑의 여인이나 경백준과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아까 잡았던 두 노인, 월천락과 월천득은 아예 영력을 쓰지도 못했다.
그 두 사람은 오직 무공만으로 그 정도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예전에 싸웠던 곡양두 같은 놈들과 비교하면 몇 수는 위였다.
하지만 벽태산 입장에서 보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토리 키 재기였다.
아무튼 혁련균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궁금해졌다.
저놈들의 정체가 뭔지, 그리고 뿌리가 뭔지 말이다.
벽태산이 혁련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혁련균은 가진 바 모든 힘을 끌어냈다. 내공이고 영력이고 전부 박박 긁어서 양 손에 모았다.
이내 벽태산이 혁련균의 간격 안에 들어섰다.
혁련균은 그럼에도 기다렸다.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좀 더 다가올 때까지 견뎌야 한다.
벽태산이 두 발 더 다가가 혁련균의 지척에 이르렀다.
혁련균은 기다렸다는 듯이 양 손을 냅다 내질렀다.
콰우우우!
막대한 힘이 혁련균의 양손에 모여 있다가 폭풍처럼 쏟아져 나갔다.
벽태산의 대응은 아주 단순명료했다.
마치 파리라도 쫓아내듯 손을 휙휙 흔들었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쏟아지던 힘이 벽태산의 손짓에 이리저리 휘말리더니 마치 길이라도 열어주는 것처럼 뻥 뚫려 버렸다.
벽태산은 그렇게 힘의 공백이 생긴 공간으로 성큼 들어갔다.
혁련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리고 벽태산이 그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거짓말처럼 혁련균이 축 늘어졌다. 온몸의 힘이 쫙 빠져 버린 것이다.
혁련균은 허무한 눈으로 벽태산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어설픈 것들이 우물 안에서 헤매고 있구나.”
혁련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굴욕적이고 치욕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저 말이 진짜인 것 같아서.
“기대되는구나. 혁련비광인지 뭔지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는데, 넌 그럴 수 없을 것 같으니.”
벽태산의 말에 혁련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혁련비광을 안다고? 어떻게?”
“말했잖느냐. 꼬리 자르고 도망쳤다고.”
혁련균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그제야 지금까지 혁련비광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해도 아주 처절하게 당했다.
그놈은 자기 혼자 당하기 싫어서 자신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애초에 무한에 관심을 둬선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긴 그냥 혁련비광에게 맡겼어야 한다.
혁련균이 초점이 흔들리는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내 혼백을 뽑아서 태울 건가?”
“잘 아는구나.”
혁련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정말로 증혼마공을 익힌 것인가?”
벽태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혁련균은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증혼마공을 익혔지? 설마 네가 차기 천마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차기는 무슨. 내가 당대 천마다.”
혁련균이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저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난 천마를 만난 적이 있다. 거짓말 하지 마라.”
혁련균의 말에 벽태산이 눈을 반짝였다.
“날 만난 적이 있다고? 언제, 어디서?”
솔직히 말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혁련균 정도 되는 자를 만났다면 당연히 기억해야만 한다.
영력을 다루는 놈이 세상에 흔치 않은데 그걸 잊을 리 없었다.
혁련균은 혼란스러워졌다.
방금 벽태산이 한 말은 자신을 진짜 천마라고 여기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벽태산이 천마일 리 없지 않은가.
“장난하지 마! 천마는 너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아! 실제 나이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서른은 훨씬 넘어 보인단 말이다!”
벽태산이 묘한 눈으로 혁련균을 쳐다봤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왠지 정말로 자신을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만났다고? 날?”
“네놈은 오늘 처음 보는 거고!”
벽태산이 혁련균을 쳐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왜 기억이 나지 않을까? 이상한 일이야. 너 같은 놈을 봤다면 잊었을 리가 없는데.”
혁련균은 점점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혁련이라, 혁련······.”
벽태산은 왠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혁련이라는 성을 계속 되뇌었다.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내 피식 웃은 벽태산은 다시 혁련균을 쳐다봤다.
“뭐, 상관없다. 과거에 만났든 말든, 기억이 나든 말든. 어차피 넌 여기서 죽는다.”
벽태산이 혁련균의 목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꽈드드득!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목뼈를 부러뜨린 건 아니었고, 목과 이어지는 혈도를 망가뜨린 것이다.
벽태산은 혁련균을 휙 던졌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혁련균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상체를 세워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벽태산이 혁련균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기대가 크구나.”
아마 혁련균은 지금까지 만나서 혼백을 뽑았던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벽태산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그의 혼백을 쑥 뽑았다.
그리고 살살 구웠다.
막대한 양의 사념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끄으아아아아아악!”
혁련균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벽태산이 혼백을 뽑아서 구운 사람 중에서 가장 처절한 비명을 내지른 사람은 경백준이었다.
한데 지금 그 기록이 바뀌었다.
혁련균은 경백준보다 몇 배나 더 처절한 비명을 쏟아냈다.
마치 비명에 자신의 생명을 실어서 내보내는 듯했다.
벽태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은 더 심하구나.”
경백준이나 흑의 여인의 사념도 핏물에 잠겨 있다시피 해서 그림이 명확하지 않았다.
한데 혁련균은 그것이 훨씬 더 심했다.
핏빛이 어찌나 짙은지 가끔은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경백준이나 흑의 여인은 최소한 혁련균의 얼굴과 새하얀 장포 정도는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혁련균이 아는 건 가장 많은지 몰라도 사념을 통해 전달하는 정보는 가장 모호했다.
벽태산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혼백을 완벽히 뽑아냈다. 그리고 단숨에 태워버렸다.
주르륵.
엄청난 양의 핏물이 흘렀다.
핏물에 담긴 영력의 질과 양도 엄청났다.
벽태산은 증혼마공을 통해 그것도 깔끔하게 태워 버렸다.
핏빛 알갱이가 허공에 무수히 떠오르며 터지고 흩어졌다.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순간적으로 주변에 핏빛 안개가 펼쳐진 것 같았다.
“영양가가 없어.”
영력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 중에 쓸 만한 영력이 어찌 하나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벽태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반강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혁련균의 혼백을 태우면서 그놈이 반강시를 모아뒀을 가능성이 높은 장소를 몇 군데 추릴 수 있었다.
이제 무한을 정리했으니 슬슬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끝
백화루주는 요즘 정말 행복했다.
잠깐 힘든 시기가 있긴 했지만 그걸 넘기고 나니 좋은 일이 연달아 찾아왔다.
어떤 불한당 같은 놈들이 백화루를 기습했을 때는 정말 끝인 줄 알았다.
그때 죽은 하오문도의 수가 최근 십 년 사이에 죽은 하오문도의 수에 버금갈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사실 지난 십 년 동안은 하오문이라는 이름만 있었지 변변한 활동을 하지 않아서 문도가 죽을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벽태산이 적절한 순간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 함께 있던 화옥도 죽었을 테고.
‘만일 그랬다면 어찌 되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화옥이 죽었다면 과연 벽태산이 화를 내주었을까? 그래서 복수를 해주었을까?
아마 벽태산을 처음 만났을 때라면 단호히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 망설여진다.
왠지 화를 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했다. 애매하다는 뜻인데, 그것만 해도 굉장한 변화 아닐까?
벽태산을 떠올린 백화루주가 잠시 멍하니 그와 침실에 들어갔던 일을 떠올렸다.
“아······ 좋았는데, 분명히 좋았는데 기억이 안나······.”
그래서 그 뒤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좀처럼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꼭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명확히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백화루주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은 거기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좋은 상황이 된 하오문을 제대로 키워야 할 시기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하지 않겠는가.
백화루주는 서탁 위에 놓인 얇은 책자를 펼쳤다.
그것은 이번에 사로잡은 자들을 심문해서 얻어낸 비급이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이용해 신호를 주고받는 비법이었다.
사실 그건 하오문도들이 익힐 수 없는 수법이었다.
어릴 때부터 특수한 약물과 지독할 정도로 무식한 수련을 통해 목과 귀를 변형시키지 않으면 익히는 것이 불가능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벽태산의 도움을 좀 받고, 암영보를 거기에 접목하니 제법 그럴듯한 수법이 되었다.
수련 과정이 좀 고되긴 하지만 암영보와 함께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기도 했고.
그야말로 이번 일의 최대 성과라 할 수 있었다.
하오문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하오문도들도 점점 강해져 이제는 웬만한 상황에서는 낭인이나 흑도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수법을 통해 훨씬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수법 하나만으로 하오문의 힘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내가 너무 힘들다는 건데······.”
백화루주는 비급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벽태산과 침실에서 시간을 보낸 후부터 굉장히 몸도 좋아지고 무공에 대한 효율이나 이해력도 높아졌다.
그래서 암영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고, 내공도 많이 늘었다.
거기에 천추신단까지 쓰고 있으니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수법으로 무한 전역에 있는 하오문도들에게 신호를 한 번 보내고 나면 녹초가 되고 목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을 잘 배분하고 충분히 쉰다고 해도 하루에 두 번이 한계였다.
아니, 무리하지 않으려면 하루 한 번이 적당했다.
지금이야 굳이 이걸 쓸 일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나중에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이걸 연달아 써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었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언제 또 지난번처럼 하오문을 습격하는 무지막지한 놈들이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까.
벽태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겠는가.
무한 전역에 있는 우리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걸 확실히 쓸 수 있도록 단련해야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화옥이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백화루주는 화옥을 반갑게 맞이하며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비급을 내밀었다.
이 비급은 화옥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통해 신호를 주고받는 수법은 하오문뿐 아니라 비천단에도 굉장히 쓸모가 있었으니까.
암영보를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쓸 수 없기에 비천단에게 암영보의 일부를 전수했다.
사실 백화루주가 나서지 않았어도 암영보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벽태산이 충분히 가르칠 수 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