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67)
평자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혁련휘 또한 마찬가지였다.
혁련휘는 평자림을 마주하고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벼운 술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그걸 본 혁련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술이 넘어갑니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갖은 방법을 동원해 여유를 잃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평자림도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 쪽은 난리가 났습니다.”
혁련휘의 말에 평자림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명의 거점 세 군데가 동시에 사라졌으니 난리가 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이 뭘 어쩌겠는가.
솔직히 황천무관 쪽에는 장사에 있던 모든 무사들을 싹싹 모아서 보냈다.
그리고 그 모든 무사를 잃었다.
금월상단으로서도 뼈아픈 손실이었다.
“저희 금월상단도 지금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휘하 방파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날이 섰던 혁련휘의 말투가 좀 누그러졌다.
“이번에 황천무관에 무사들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인사가 좀 늦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야 애초에 서로 돕는 관계 아닙니까. 황천무관과는 무공 교류도 꾸준히 해왔으니 돕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성과가 없었으니 많이 아쉽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합니다.”
혁련휘는 좀 민망해졌는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한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미 당한 것, 어쩔 수 없지요. 더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과거는 반성으로 끝내야지요. 그래서 말씀인데······.”
평자림이 말을 끌자, 혁련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번에 우리가 당하는 동안 제가 따로 사람들을 움직였습니다.”
“따로 움직였다고요?”
“하오문의 움직임이 이상해서 좀 들여다보다가 습격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습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 따로 연락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너무 늦어서 거의 효과는 없었지만, 그런 얘기를 덧붙일 수는 없었다.
“그놈들이 무려 세 군데나 되는 곳을 기습하려면 자신들의 전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좀 무리를 해서 벽태산 그놈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자들에 대해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아아! 훌륭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배후를 알아내셨습니까?”
평자림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예?”
혁련휘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평자림이 얼른 설명을 이어갔다.
“현재 벽태산의 일행들 외에 나중에 따로 합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저희 금월상단이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하면 현재 벽태산의 일행 중에 강력한 배후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까?”
평자림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전부 강했습니다. 하지만······ 벽태산의 배후라고 하기에는 좀 모자랐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만으로 월천락, 월천득 어르신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거야······.”
그거야 월천락과 월천득이 당한 건 무한이었으니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혁련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곳 장사로 오는 길에 시도했던 습격의 결과를 설명하지 못하니까.
“하면 상단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평자림이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니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벽태산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혁련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까 왜 평자림이 이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지금까지 계속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모든 배후에 벽태산이 있다고 가정하면 대부분 맞아 떨어져.’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는 생각이 드는 건, 벽태산이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혁련휘는 문득 혁련비광이 떠올랐다.
어쩌면 혁련비광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당했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혁련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우리 이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 장보도 계획을 시작해야지요. 하면······ 언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벽태산이 장사에서 떠날 때까지 좀 기다릴까요?”
“준비를 훨씬 철저히 해서 벽태산까지 끌어들일 작정입니다.”
평자림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제법 고수 소리 듣는 자들이 잔뜩 몰려올 텐데.”
“그놈이 장보도 쟁탈전에 뛰어들면 피해가 더 커질 테니 이득입니다. 그리고······ 비동에는 제가 좀 더 신경을 써보겠습니다.”
혁련휘는 그렇게 말하고 금월상단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금월상단주는 혁련휘의 시선을 가만히 받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도 좀 더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비로소 좀 풀어졌다.
그리고 그제야 술잔을 비울 수 있었다.
* * *
각월객잔의 별채에서 벽태산 일행이 한창 수련 중이었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벽태산이 또 무슨 기괴한 수련을 시킬지 두려웠다.
한데 막상 수련할 때가 되니, 벽태산은 별 말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다들 수련을 하면서도 수시로 벽태산의 눈치를 살피느라 집중을 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벽태산은 수련을 지켜보는 게 아니었다.
벽태산은 지금 딴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붙어서 수련을 시켜줄 수도 없고······.’
벽태산이 수련에 개입하면 엄청난 효과가 따라온다는 건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벽태산의 시간을 써야 한다. 그것도 제법 많이.
즉, 벽태산이 수련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저 녀석들 수련을 도와줄 적당한 놈 하나 없나······.’
벽태산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나헌탁이 찾아왔다.
“공자님,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벽태산은 고개를 돌려 나헌탁을 쳐다봤다.
나헌탁은 문서 꾸러미를 공손히 내밀었다.
“얼마 전 소란이 일어났을 때, 금월상단에서 빼돌린 문서들입니다. 혹시 참고하실 것이 있을지 몰라 가져왔습니다.”
벽태산은 그걸 받지 않고 고개를 돌려 화옥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화옥은 나헌탁이 등장할 때부터 수련을 멈추고 이쪽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벽태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나헌탁으로부터 문서 꾸러미를 받았다.
이제 당분간은 이걸 보고 분석해야 한다. 어쩌면 재미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혹시······.”
나헌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향후 일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왜? 얼른 가라고?”
나헌탁이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저 미리 알아두면 저도 도울 일이 있을지 몰라서 드린 말씀입니다.”
나헌탁은 말을 마무리 하며 화옥이 손에 든 문서 꾸러미를 슬쩍 바라봤다.
벽태산은 그걸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미리 알아두고 하오문과 잘 연계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슬슬 장보도 터질 때가 됐지?”
“예.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일로 공자님을 끌어들이려 할지도 모릅니다.”
벽태산이 씨익 웃었다.
“재미있겠구나.”
문득 벽태산이 나헌탁을 쳐다봤다.
나헌탁은 갑자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벽태산의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네 이름이 나헌탁이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그래, 이제 생각났다. 너 혹시 나충길 어디 있는지 아느냐?”
나충길이라는 말에 나헌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이름을 어떻게······.”
“네가 나충길 동생이었던가?”
나헌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나충길이라고 하니까 못 알아듣겠어? 그럼 검귀라고 말해야 알아듣는 건가?”
나헌탁에게 말을 하다 보니 점점 더 많은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벽태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끝
검귀 나충길.
세상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별호 역시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적어도 천마신교 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천마신교에서 가장 검을 잘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검마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천마는 예외였다.
실제로 천마가 검을 쓰는 광경을 본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일단 본 사람은 무조건 천마를 검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할 테니까.
아무튼 신교제일검은 검마다.
그렇다면 검마 다음은 누구일까?
이에 대한 답은 무수히 많다. 천마신교에는 검을 쓰는 무인이 모래알처럼 많고, 그 중에서도 고하를 가리지 못한 무사의 수도 여럿이니까.
하지만 누가 가장 검마의 자리를 탐하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같은 이름을 말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검귀 나충길이다.
검귀는 말 그대로 검에 미친 자였다. 그리고 검마에 미친 자이기도 했다.
검귀의 목표는 검마였고, 검마는 그런 검귀를 제법 좋아하고 아꼈다.
가끔 실전을 통해 가르침을 내릴 정도로 말이다.
물론 당하는 놈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예전 검마가 그러했듯이.
아무튼 그렇게 하면 대부분 가르쳐주는 사람에게 이를 가는 법이다. 그것을 원동력으로 해서 더 강해지는 법이고.
역시 검마가 그러했듯이.
검마가 천마인 자신에게 이를 갈지 않았다면 어떻게 심검의 경지에 발을 들였겠는가.
아무튼 검귀는 검마를 능가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교에서 나갔다.
수련 환경은 솔직히 천마신교를 따를 곳이 없었다.
천마신교에서는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자주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양한 무공을 구비하고 있으며, 대부분에게 그걸 열람할 기회가 열려 있으니까.
하지만 검귀는 그 모든 것을 등지고 나갔다.
검마보다 강해지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그리고 그걸 직접 허락해준 사람이 바로 천마인 자신이었다.
그래서 벽태산의 기억에 제법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물론 나헌탁을 보지 않았다면 다시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벽태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나헌탁을 가만히 쳐다봤다.
나헌탁의 표정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그분과는······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벽태산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내킬 때 찾아오곤 했는데, 발길이 끊긴 지 조금 더 있으면 삼 년입니다.”
나헌탁에게 방금 문서 꾸러미를 받아 마침 근처에 있던 화옥이 굉장히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헌탁과 벽태산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거처 정도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화옥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헌탁이 난감한 표정으로 화옥을 바라봤다. 화옥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알 수 있는데 모르고 있는 걸 견디지 못하잖아요.”
정확히 심장을 찌르는 듯한 말에 나헌탁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너무 앞서 나갔다면 죄송합니다.”
화옥의 사과에 나헌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거야 사실 당연한 것이니······ 하지만 공자님.”
나헌탁이 벽태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분은 원하지 않을 겁니다. 굳이······ 평정을 깨고 싶지 않습니다.”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원하지 않을지, 원할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함께한 세월이 벌써 십오 년입니다. 비록 가끔 만났을 뿐이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벽태산의 눈에 살짝 흥미가 감돌았다.
“그래서 네가 알아낸 것이 무엇이냐?”
“망설임입니다.”
“검을 놓을지 말지 고민한다고 본 모양이구나.”
나헌탁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귀의 재능과 실력, 그리고 열정이 정말 아깝긴 하지만, 그가 검을 놓겠다고 마음먹으면 최대한 그걸 도와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형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에게 삶을 준 은인이기도 했으니까.
“그걸 왜 네가 결정하느냐?”
“제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제 형님이······.”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멋대로 조율하려 하느냔 말이다.”
나헌탁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얘기해봐야 길어지기만 할뿐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어디 있는지 말해라. 내가 얘기해보마.”
나헌탁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벽태산에게 말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부디······ 제 형님을 너무 흔들지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내가 보기에 검귀를 흔드는 건 오히려 너 같은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나헌탁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악록산에 있습니다.”
“지척이구나.”
악록산은 여기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이었다.
원하지 않는다느니, 평정을 깨지 말라느니 하더니, 고작 악록산에 있으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헌탁도 좀 민망했는지 얼른 다른 얘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곳이 장보도가 가리키는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시 재미있는 놈들이야.”
벽태산이 씨익 웃고는 다시 시선을 수련하는 자들에게로 향했다.
조만간 저들의 수련을 도와줄 사람이 올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벽태산은 옆에 있던 나헌탁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칠절마공을 익혔구나.”
나헌탁이 깜짝 놀라 벽태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그걸 어찌 알았단 말인가.
자신은 단 한 번도 벽태산 앞에서 무공을 드러내거나 그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
하면 그저 곁에서 지켜본 것만으로 무공의 내력을 꿰뚫었다는 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