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0)
밥이지
한동안 평범한 나날이 이어졌다.
벽태산은 여전히 매일 밤 기루에 갔고, 증혼마공을 통해 절맥을 조금씩 치료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생활이었다.
하지만 벽태산은 그러면서도 나름 신경 쓰고 있었다.
곳곳에 포진한,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방해할 만한 요소들을 조만간 싹 정리할 생각이었다.
벽태산과 얽힌 곳은 일단 두 곳이었다.
하나는 종리세가였고, 다른 하나는 향화루였다.
종리세가는 아직 움직임이 없지만, 실제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지는 더 확인해 봐야 한다.
그리고 향화루는 벽태산을 직접 습격한 놈들의 배후 중 하나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배후의 연결고리였다.
그 부분도 지금 열심히 조사 중이었다.
천추신의의 부하들이.
그리고 그 조사한 내용을 벽태산이 쭉 훑어보고 있었다.
서류를 모두 확인한 벽태산이 그걸 탁자에 툭 던지며 천추신의를 쳐다봤다.
“이게 전부야?”
벽태산의 어조가 못마땅하다 느껴졌는지 천추신의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조사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정보라는 것이 그냥 길 가다가 돌멩이 줍듯이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전작업부터 시작해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그걸 내가 알아야 돼?”
천추신의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맞다. 그걸 지시 내리는 상급자가 알아서 뭐 하겠는가. 실제로 일하는 놈들이 알아서 해야지.
천추신의는 벽태산과 이렇게 마주 앉아 얘기할 때마다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꺼림칙했다.
솔직히 돈만 많은 상단의 어린 공자에 불과한데, 이러고 있으면 까마득하게 높은 상급자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이 생활에 젖어서 그런 거 같구나.”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천추신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너무 편해서 이러는 거 같다고.”
“아이고, 편하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매일 수련하는 그 두 사람 치료하는 일만 해도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거기에 금창약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래서, 몸을 둘로 쪼개줘?”
“어이구, 무슨 농담을 그리 과격하게 하십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실 때마다······ 옛날 일이 떠올라서 견디기 힘듭니다.”
“그래? 옛날에는 사고 좀 쳤나봐?”
“에이, 사고라뇨. 저 이래봬도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였습니다. 의술 쪽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다들 엄지를 들었죠. 다만······ 그때는 잘 하든 못 하든 다들 힘들고 무서운 시기였는지라······.”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천추신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기 때문이다.
천마신교에서는 무슨 조직이든 신참을 교육할 때는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굴린다.
다들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해서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아무튼 그러니 제 사정을 좀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벽태산은 천추신의의 당당한 표정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천추신의는 굉장히 불안했다. 저런 웃음과 좋지 않은 기억이 항상 공존했으니까.
“애들 치료하는데 왜 부하가 넷이나 필요해? 너 혼자서도 충분하잖아.”
“예?”
“그 넷을 정보 쪽으로 돌렸으면 벌써 원하는 결과가 나왔을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려?”
천추신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틀리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절대 안 될 것 같았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고.
그의 부하들은 열두 명이 동시에 움직였을 때 항상 최적의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천추신의가 어떻게 변명을 할지 고민하며 벽태산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한데 벽태산의 눈빛을 보고 나니 더 비벼볼 생각이 싹 날아가 버렸다.
‘시발, 다 알고 있어. 다 알고 말하는 눈이야.’
천추신의가 고개를 푹 떨구며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보수집 하는 게 너희뿐이야?”
“예?”
천추신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리고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너처럼 끈 떨어진 연 신세 된 애들은 없느냐고.”
천추신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솔직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교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건 분명한데, 얘기를 하다보면 교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세부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
‘에이, 그건 말도 안 되지.’
순간 그럴 만한 사람이 한 명 떠올랐는데,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으니까.
“일단 제가 아는 바로는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놈들은 전부 따로 관리한다고 했었지?’
원래는 대충 흘려들어서 기억이 잘 안 나야 정상이지만, 이럴 때마다 제법 자세한 기억이 떠올랐다.
천마신교에서는 천하 곳곳에 정보 수집을 위한 조직을 파견했다.
각 조직들은 다양한 직군으로 위장하면서 살아갔는데, 천추신의도 그 중 하나였다.
천추신의뿐 아니라 다른 의원들도 몇 명 있다고 들었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밖에 천마신교가 세워서 운영하는 표국이나 상단도 있었다.
아마 지금쯤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대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그놈들이야 나쁠 게 없다.
어차피 천마신교 소속이라고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었다. 만일 큰 싸움이라도 생긴다면 언제 어떻게 휘말려들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그 부분은 기억을 좀 더 더듬어 봐야 할 것 같은데······.’
제대로 세세한 보고를 받지 않고, 뭉뚱그려 보고 받았기에 세부적인 내용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천마일 때는 그따위 것 알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럼 앞으로 두고 보겠어.”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천추신의가 조심스럽게 인사하고 물러갔다.
벽태산은 홀로 남자, 조용히 몸 상태를 점검해 봤다.
제법 괜찮았다. 물론 여전히 쓰레기 같은 몸이었지만, 그래도 처음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최소한 기맥은 전부 이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기루에 다녀야 한다. 그리고 더 열심히 증혼마공에 매달려야 한다.
오늘도 그런 계획을 세우고 차분히 증혼마공을 수련하려는데, 저 멀리서 기척 하나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척이 향하는 방향이 정확히 이쪽이었다. 벽태산을 찾아오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증혼마공은 하다 만다고 해서 효과가 없거나 위험하지 않지만, 그래도 수련을 하다가 중단하면 기분이 좋지 않으니 일단 저 사람부터 만나고 수련하기로 했다.
다가온 사람은 한 가지 소식을 가지고 온 총관이었다.
* * *
“연가장에서 보자고 했다고?”
“예. 공자님.”
총관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조심스럽게 벽태산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최근 벽태산을 볼 때마다 뭔가 굉장히 어려웠다.
가주인 벽태수를 만날 때도 솔직히 이 정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쪽으로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 보고 찾아오라고 했다 이거지?”
“예. 공자님. 맞습니다.”
“연가장에 지금 누가 와 있는지는 알지?”
“예. 종리세가에서 사람을 보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종리세가에서 온 놈이 날 보면 오,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나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안 그래?”
“그래서 공자님을 지켜줄 분을 한 분 초빙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켜준다는 사람 많아서 좋네.”
벽태산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다만 모든 노력을 다해 설득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믿고 있습니다.”
총관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섬전검 경추황입니다.”
“섬전검?”
벽태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예 모르는 이름이었다.
사실 벽태산이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천하에서 천마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상당히 유명한 분입니다. 그 정도면 아마 종리세가에서도 함부로 일을 벌이지 못할 겁니다.”
섬전검 경추황을 굳이 섭외하는 이유는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령도 갈진협도 함께 섭외 중입니다.”
거령도 역시 섬전검과 비슷한 이름값을 가진 자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 분 다 모시고 싶지만, 최소 한 분은 반드시 모시도록 해보겠습니다.”
벽태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필요 없는데.”
하지만 총관의 태도는 단호했다.
“필요합니다. 종리세가를 가벼이 여기시면 안 됩니다.”
“걔들 비열한 건 아는데, 그래도 필요 없어.”
비열하다는 말에 총관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자칫 그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다.”
“아무튼 지금 내 호위도 둘이나 있으니 굳이 이름도 잘 모르는 놈들은 필요 없어.”
“공자님께서 모르실 뿐이지 그들의 이름은 충분히 유명합니다.”
총관이 고집을 꺾지 않을 것 같자, 벽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든지. 대신 내 앞에서 거들먹거린다거나 그러면 참을 자신이 없다는 건 알아두고.”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받는 돈이 얼마인데요. 언제나 돈값은 하는 자들이니 제안을 받아들이냐 마냐가 문제지 그 이후는 괜찮을 겁니다.”
총관은 자신만만하게 말한 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공자님께서 먼저 도발하지만 않으면 말이지요.”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내가 도발할 일이 뭐가 있어. 고만고만한 놈들 건드리는 취미는 없다. 무림맹 장로쯤 된다면 모를까.”
“하하하하! 배포가 아주 대단하십니다. 공자님 덕분에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하하하하!”
총관은 벽태산의 말을 과장 잔뜩 섞인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께서 아주 어릴 때 자주 하시던 말이 떠오르는군요.”
“나 어릴 때?”
“예.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기억 날 리가 없지.”
그때는 내가 아니었을 테니까. 벽태산은 궁금한 표정으로 총관을 쳐다봤다.
“그때 공자님이 그러셨죠. 나중에 커서 내가 천마를 잡겠다고요. 하하하. 그때만 해도 아주 귀여우셨었는데.”
벽태산의 표정이 확 굳었다.
“누가······ 누굴 잡는다고?”
“기억이 정말 안 나시는 모양이네요. 하긴, 그때가 공자님 나이 고작 네 살 때였으니까요.”
“네 살짜리 꼬맹이가 감히?”
“하하하하. 어리셨으니까요. 뭐······ 그 이후로 몸이 안 좋아지셔서 더 이상은 그런 씩씩한 말은 못 들었지만······ 그래도 이제 금방 다시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좋아지셨잖습니까.”
“뭐······.”
“분명히 더 좋아질 겁니다. 천추신의의 실력이야 겪어보셨으니 잘 아실 테고, 더한 명의도 지금 열심히 수소문 하고 있으니까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알았다. 알았으니까 당연한 얘기를 반복하지 마라.”
“하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총관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벽태산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맹랑한 꼬맹이가 감히 날 잡겠다고?”
벽태산은 피식 웃었다.
왠지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뭐, 다 지난 일인데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지금은 닥쳐올 다른 일이 더 중요하다.
연가장에 머물고 있는 종리세가 사람들은 총 스무 명이었다.
그 중에서 무공을 익힌 사람은 열둘이다.
벽태산은 이미 총관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오늘 천추신의가 가져온 보고 중에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벽태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종리세가라······ 밥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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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얘기좀 할까
연가장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그 사이에 연가장과 금벽상단 사이에서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금벽상단에서는 연가장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도록 조율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연가장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연가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종리세가에서 워낙 완강하게 주장했으니까.
금벽상단에서 만나게 되면 종리세가에서 개입할 명분이 없지 않은가.
연가장은 걸어서 반 시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벽태산을 중심으로 유서연과 천경완이 뒤의 좌우에 포진했고, 벽태산 앞쪽으로는 섬전검 경추황과 거령도 갈진협이 좌우에 자리했다.
그리고 벽태산 바로 옆에 천추신의가 나란히 위치했다.
네 사람이 벽태산과 천추신의를 보호하는 진형이었다.
금벽장에서는 딱 그들만 움직였다.
사실 총관은 여기에 몇 명을 더 붙이려고 했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검룡단을 키운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벽태산이 냉정히 쳐냈다.
총관이 몇 번이나 권했지만 결국 벽태산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게다가 경추황과 갈진협이 검룡단을 한 번 보고는 그들이 따라오면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했다.
그쯤 되니 총관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아쉬워하는 총관의 모습을 보니, 아마 벽태수가 뒤에서 어떻게든 호위를 늘리라고 지시를 내렸던 모양이다.
금벽장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천추신의가 넌지시 물었다.
“공자님, 아무리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인원이 많은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차하면 칼받이로 써도 되고 말이다.
천추신의의 물음에는 그런 의미가 생략되어 있었다.
“불필요한 희생이다.”
천추신의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벽태산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때 앞에서 걷던 경추황이 슬쩍 뒤돌아보며 말했다.
“신의께서는 너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아무리 종리세가라 해도 함부로 칼을 뽑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까요?”
천추신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경추황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