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00)
바닥에 뭔가 흔적이 있긴 했지만, 황보엽이 알아볼만한 건 없었다.
“안내해라.”
“예.”
무사가 빠르게 움직였다.
흔적이 뚜렷하게 남았다더니 중간에 전혀 지체하는 일도 없이 쭉쭉 이동했다.
방향을 몇 번쯤 꺾은 걸로 봐서 그냥 무작정 도망치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남창을 빠져나갔고, 그 뒤로도 제법 이동하고 나서 무사의 걸음이 멈췄다.
“흔적이 여기서 끊어졌습니다.”
“뭐?”
황보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사는 차분히 말했다.
“대신 좀 이상한 흔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흔적?”
무사는 제법 넓은 범위를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보엽이 짜증을 냈다.
“언제까지 보기만 할 생각이냐! 아직 못 알아낸 거냐!”
“아닙니다. 알아냈습니다. 일단 여기에서 잠깐 싸움이 있었습니다.”
무사가 가리킨 곳은 벽태산이 혁련휘를 제압한 자리였다.
대략적으로 어떤 식으로 싸웠을지 유추해서 설명한 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혁련휘의 부하들이 모여 있던 곳을 바라봤다.
“왜 그러나?”
“저기에서······ 뭔가가 흔적을 싹 지웠습니다.”
황보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더 이상 추적을 못하겠다는 건가?”
무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기서 싸우던 놈들은?”
“흔적이 다시 남창 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적해.”
“그것이······.”
“또 왜?”
“저기 흔적이 지워진 부분에서 남창으로 돌아가던 흔적까지 전부 사라졌습니다.”
황보엽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 세가를 능멸한 놈들을 결국 놓쳤단 말이로구나.”
황보엽은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돌아가자.”
여기서 시간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뭐든 해야 한다. 이 속을 풀든, 아니면 그놈들을 잡든.
“양치백을 불러와!”
* * *
벽태산이 잡아온 세 사람은 현재 하오문에서 심문 중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성과가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오문이 가진 약이 제대로 듣지 않아서 정보가 나오다 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처음 잡은 두 사람에게서는 뭐라도 뽑아낼 수 있었는데, 혁련휘는 아예 그런 것들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할 만큼 하고서 세 명 모두 벽태산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벽태산은 먼저 잡은 두 사람의 혼백부터 뽑아 구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다만 혁련균이나 혁련비광과 관계된 정보 몇 가지를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정보들을 화옥에게 넘긴 벽태산은 객잔 별채 꼭대기 층에서 혁련휘와 마주 앉았다.
드디어 혁련휘의 혼백을 뽑을 차례가 되었다.
혁련휘는 전혀 제압당하지 않은 채로 벽태산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는 솔직히 속으로 좀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굉장한 굴욕을 받고, 심문을 빙자한 고문을 받고, 약까지 먹어야 할 줄 알았다.
한데 그런 건 거의 없었다.
심문을 받긴 했고, 약을 먹긴 했지만, 그런 건 전혀 자신에게 통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막혔던 혈도를 풀어주고, 꽁꽁 묶었던 줄도 전부 풀어주었다.
혁련휘는 은밀히 내공을 돌려 제압당해 있는 동안 크게 떨어진 몸 상태를 되돌리려 애썼다.
그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벽태산과 마주앉은 지금, 혁련휘는 자신의 몸이 최상의 상태가 되었다고 자신했다.
제대로 먹지 않은 점이 좀 문제이긴 했지만, 그 정도야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혁련휘는 야수 같은 눈빛으로 벽태산을 비롯해 방안 곳곳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으면 바로 치고 나갈 작정이었다.
“쥐새끼처럼 눈알 굴리지 마라.”
그 말에 혁련휘가 흠칫 놀라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의 저 담담한 표정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는군. 내가 고작 저런 놈에게 당했다고?’
아무리 살펴도 벽태산의 수준은 자신의 위가 아니었다. 몇 단계는 아래였다. 이건 확실했다.
한데 대체 왜 당했을까?
‘조력자가 있구나.’
한때 벽태산을 조사하면서 세운 가설 중 하나가 바로 강력한 조력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조력자가 지금 여기 있을까?’
그럴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자신이 멀쩡한 상태로 앉아 있는데도 저렇게나 담담한 얼굴일 테고.
혁련휘는 은밀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긴장감으로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내공을 손가락 끝에 한껏 모을 때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없다!’
그렇게 확신한 혁련휘는 벽태산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퍽!
그의 지풍이 벽태산 앞에서 퍽 터졌다. 마치 투명한 막을 때린 것 같았다.
‘저걸 믿고 있었던 거로구나.’
혁련휘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차라리 잘 됐다.
‘저놈을 인질로 잡고 여길 빠져나가면 되겠어.’
혁련휘는 내공을 더욱 많이 끌어올렸다.
그걸 본 벽태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고작 내공으로 깨질 것 같으냐?”
혁련휘가 흠칫하며 불신 가득한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내공이 아니면? 뭘로 하라는 거지?”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모르면 말고. 기회를 줘도 못 먹는구나. 병신같이.”
혁련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새끼가······!”
벽태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굉장히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혁련휘의 내공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위이이이잉!
기파가 퍼지며 주변 집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 문서를 비롯한 가벼운 것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혁련휘의 손에 시뻘건 기운이 맺혔다.
벽태산은 그걸 보며 담담히 말했다.
“꼭 먹어봐야 똥인지 아는 놈이로구나. 역시 병신이었어.”
벽태산의 신랄한 말에 혁련휘가 온 힘을 다해 손을 내질렀다.
꽈아아아앙!
핏빛 기운이 벽태산 앞에 있는 투명한 막에 작렬했다.
그리고 막을 따라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벽태산 앞에 있는 투명한 막에는 조금도 피해가 가지 않았다.
혁련휘는 숨을 헐떡이며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것을 노려봤다.
키이이이이잉!
분노가 그의 영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본 벽태산의 눈에 드디어 호기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영력을 최대한 뽑아 놔야 한다. 그래야. 혼백을 가리고 있는 피가 싹 사라질 테니까.
벽태산은 혁련휘가 영력을 쓰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지금이야 이렇게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상대가 영력을 소모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슬슬 이렇게 하지 않고 증혼마공으로 피만 깔끔하게 태워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혁련휘가 모은 영력이 그대로 벽태산 앞에 있는 투명한 막에 쏟아졌다.
쩌저저저저저정!
투명한 막에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 봤느냐! 그 같잖은 걸 단숨에 부숴주마!”
키이이이이잉!
혁련휘가 남은 영력을 박박 긁어냈다.
그리고 또 쏘아냈다.
쩌저저저정! 퍼서석!
금이 더 많이 생기고 일부 막이 부서져 떨어졌다.
혁련휘는 그걸 보며 바닥에 간당간당하게 남은 영력들을 무리해서까지 뽑아냈다.
“끄으으으!”
혁련휘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번 한 방이면 저 꼴 같지 않은 막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흐아아아압!”
거친 기합과 함께 남은 영력을 투명한 막에 던졌다.
쩌어어어어어엉!
파창!
드디어 투명한 막이 모조리 부서졌다.
혁련휘가 희열에 찬 눈으로 벽태산을 노려봤다.
“이제 네놈 차례다. 곱게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벼려라.”
벽태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영력 쓰는 수준이 낮구나.”
벽태산이 벌떡 일어나 혁련휘의 정수리를 꽉 움켜쥐었다.
“으아아악!”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혁련휘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혼백이 쑥 뽑혀 나왔다.
벽태산은 피 냄새가 쪽 빠진 혼백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웠다.
“끄으아아아아아아아악!”
혁련휘의 비명이 전각을 무너뜨릴 듯이 뒤흔들었다.
끝
양치백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면서도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공자님. 그래도 가주님께 보고를 하고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상황이 끝난 것도 모르고 계실 텐데······.”
황보엽이 코웃음을 쳤다.
“모르실 것 같으냐?”
양치백은 입을 다물었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황보엽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말리고 싶을 뿐이었다.
이대로 가면 분명히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후계자가 되기도 전에 사고를 칠 것 같으냐? 고작 상단의 애송이 하나 건드리러 가는 것뿐이다. 거기에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
“하지만 공자님. 그쪽에서 도는 소문 몇 가지가 심상치 않습니다. 고수들도 제법 있는 것 같고, 유명한 의원도 있는 것 같고······.”
“흥. 그래봐야 여자나 끼고 돌아다니는 한량에 불과하다. 하여튼 잔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가기나 해라.”
“예.”
양치백은 할 수 없이 속도를 높였다.
지금 그들은 벽태산 일행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황보엽의 뒤쪽으로 그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우르르 따라가고 있었다.
부상을 당하거나 심하게 지친 자들은 전부 세가로 되돌려 보내고, 남은 자들 중 열 명만 딱 골라서 데려왔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황보엽은 자신의 부하를 선택할 때, 오직 실력만 보고 뽑았다.
지금 데려온 열 명의 무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능히 헤쳐 나올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이번에 무명과의 싸움에서도 이들이 큰 역할을 했다.
어느새 황보엽은 벽태산 일행이 머무는 객잔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양치백의 말에 황보엽이 객잔을 찬찬히 살펴봤다.
“규모가 제법이구나. 그놈들은 여기 별채에 있다고?”
“예. 일단 객잔에 들어가 기별을 넣겠습니다.”
황보엽이 피식 웃으며 양치백을 옆으로 치웠다.
“됐다. 기별은 무슨. 이럴 때는 그냥 쳐들어가야 효과가 좋은 법이다.”
황보엽은 당당히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별채로 향했다.
객잔에서 별채로 가는 길이 하나뿐이었기에 헤맬 일은 없었다.
뒤늦게 객잔에서 일하는 자들이 나타났지만, 아무도 황보엽을 막지 못했다.
다들 황보엽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는 황보세가 무사들의 기세를 맞아 그저 덜덜 떨기만 했다.
하오문도나 비천단원들은 나서지 않았다.
괜히 나서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자칫 이 객잔의 쓸모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별채로 들어선 황보엽은 나직이 감탄했다.
“호오. 운치가 제법이구나. 이런 객잔이 있는데 왜 내가 몰랐지?”
황보엽은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안으로 더 들어갔다.
넓은 공터가 나타났고, 그곳에서 수련 중이던 사람들이 보였다.
황보엽은 그걸 보고 눈을 번득였다.
그리고 그가 들어서자마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수련을 멈췄다.
“수련하는 모습을 좀 더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방금 순간적으로 보기에는 수준이 상당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좀 더 지켜봤어야 한다.
물론 타인의 수련을 지켜보는 건 굉장한 결례이긴 하지만, 황보엽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수련을 하든 황보세가의 무공보다 나을 게 없을 것 아닌가.
자신이 봐서 한 마디 조언이라도 해주면 그게 오히려 기연이다.
황보엽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수련하는 자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피던 황보엽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굉장하군.”
미인이 너무 많았다.
처음 벽태산의 시비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시선을 옮기던 황보엽은 마지막으로 연하린을 보고는 온통 세상이 멈춰 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