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22)
백화루주는 그것을 받아 벽태산 근처에 있던 탁자 위에 펼쳤다.
“이것이 태원의 지도입니다.”
벽태산은 그것을 슥 둘러보다가 한 군데를 짚었다.
“여길 확인해라.”
“예?”
백화루주는 벽태산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대꾸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바로 조사하겠습니다.”
하오문의 손길은 당연히 산서 태원에도 닿아 있었다.
그곳에 있는 문도들에게 지시해 방금 벽태산이 짚은 부분을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벽태산이 백화루주와 대화하는 동안 그의 방에 있던 청음마군의 시신을 하오문도들이 깔끔하게 치우고 정리했다.
할 말을 다 했으니 다시 움직이려는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벽태산이 힐끗 쳐다보니 초서란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초서란의 표정은 반가움과 서운함, 안도와 성취감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벽태산에게 달려들다시피 해서 와락 끌어안았다.
아니, 끌어안으려 했다. 벽태산이 한 걸음 옆으로 피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벽태산이 피하는 바람에 훅 지나가 버린 초서란은 얼른 속도를 줄여 멈추고는 황당한 눈으로 벽태산을 돌아봤다.
“와······ 너무하세요.”
벽태산은 그런 초서란을 가만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을 떠난 지 제법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초서란의 혼백이 제법 익었다.
그걸 보니 천약방의 의원들도 혼백이 숙성되었을 것 같았다.
오늘 온 김에 초서란을 비롯해 천약방 의원들을 한 번씩 구워주고 갈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숙성시키는 편이 나았다. 지금 약간의 영력을 얻자고 다 익지도 않은 과실을 따는 건, 오히려 손해였다.
“제가 걱정돼서 오신 건가요?”
초서란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벽태산이 담담히 대답했다.
“산책이다.”
“예?”
초서란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백화루주까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장사에서 여기까지요?”
벽태산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산책이 좀 길었다.”
두 사람이 멍하니 바라보자, 벽태산이 밖으로 나가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시는지요.”
백화루주가 깜짝 놀라 물었다.
“산책이 끝났으니 돌아가야지.”
벽태산은 그 말을 남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백화루주와 초서란이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초서란은 벽태산 옆에 나란히 바짝 붙었다.
“공자님, 정말로 지금 돌아가시는 건가요? 여기서 장사까지요?”
“그래.”
“그냥 하루 주무시고 가시지요?”
벽태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서란은 끈질겼다.
“저 오늘 혼자 자기 싫은데.”
초서란이 그렇게 말하며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요염해졌다.
벽태산이 피식 웃으며 초서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기다려라. 아직 때가 아니니까.”
초서란의 입이 삐죽 나왔다.
“지금이 바로 그때거든요?”
벽태산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백화루 밖으로 나왔다.
초서란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자님, 설마 정말로 그냥 가시는 거예요?”
반쯤은 농담으로 여겼다. 이 한밤중에 다시 장사로 돌아가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거기가 어딘데 이 밤중에 가시려고요? 잠은 주무셔야지요!”
“영약을 먹어서 괜찮다.”
초서란이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영약을 먹은 거랑 자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 아무리 내공이 깊어도 사람이 잠을 자지 않으면 몸 상태가 나빠지는 법이다.
그리고 어떻게 자신이 이러는데 그냥 갈 수 있단 말인가.
초서란은 굉장히 복잡해진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하지만 벽태산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오늘 반강시들 덕분에 영력을 제법 많이 키웠다.
그러니 올 때처럼 그 짓을 하면서 돌아가면 충분히 잠 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벽태산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초서란은 벽태산을 따라가려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벽태산이 훅 멀어졌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빠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벽태산은 마치 깜빡이듯 멀어져갔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때는 백여 보 앞에 있었다.
그렇게 몇 번 깜빡이고 나니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초서란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벽태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나도 영약 많이 만들어 놨는데······.”
* * *
산서 태원에도 하오문 지부가 있었다.
사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태원에는 딱히 집중해서 지켜봐야할 정도로 규모가 큰 문파나 가문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있는 하오문도들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오문이 암영보를 되찾은 이후, 하오문도들의 평균 실력이 상당히 높아졌다.
모든 하오문도의 실력이 균일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실력이 떨어져도 웬만한 세력의 정보조직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췄다.
하오문 태원지부에 본단의 명령 하나가 내려왔다.
지급으로 내려온 명령이었는지라 하오문도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태원 내에 있는 장소를 확인하라는 지시였는데, 본단의 명령이었는지라 지부에서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실력 좋은 하오문도를 열 명이나 추려서 그곳에 보냈고, 그들이 지금 막 그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가 언제 이렇게 된 거지?”
하오문도 중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이 살펴봐야 할 목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불에 타버린 장원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왔으니 확인은 해야지.”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원이 있던 곳에 우르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샅샅이 뒤졌다.
명령 자체가 명확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걸 찾으려 했다.
하지만 어찌나 세심하게 태웠는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하오문도들은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리고 그렇게 철수하는 하오문도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오문도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꼼짝도 않고 확인했다.
하오문도들이 전부 돌아가고 나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정말로 하오문 놈들이 와서 살펴보고 갔군.”
“주군의 말씀대로야.”
“그럼 이제 어쩌지?”
“어쩌긴. 하오문 놈들을 쫓아가서 조용히 살펴봐야지.”
이번 일은 굉장히 중요했다.
혁련비광이 태원에서 철수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 하니까.
여기에 오기 전에 혁련비광이 신신당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혁련비광은 들켰다고 했다.
그리고 상대는 하오문을 이용해 그것을 확인할 것이 분명하다고도 했다.
그러니 하오문이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본단에서 그들에게 내린 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오라고 했다.
혁련비광은 하오문도들이 이곳이 전부 불타버린 걸 확인하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만일 자신이 추측한 대로라면, 이곳 태원은 한동안 굉장히 안전한 장소가 되어줄 것이다.
그런 혁련비광의 염원을 담은 무명의 정보원들이 하오문 태원지부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끝
벽태산은 날이 새기 전에 각월객잔에 도착했다.
그리고 길진 않지만 잠도 푹 잤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 평소와 마찬가지로 시비들의 시중을 받으며 씻고 식사를 마쳤다.
벽태산의 아침을 책임지는 시비는 보통 세 명 혹은 네 명이었다.
그 정도면 씻을 준비를 하고 식사를 나르고, 나중에 청소까지 하는 데에 충분하니까.
나머지는 전부 다른 볼일을 보거나 수련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벽태산은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오늘 시중을 들었던 시비들이 벽태산의 방으로 우르르 들어가 청소를 시작했다.
역시 시비들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밖으로 나온 벽태산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사람은 제위룡이었다.
제위룡은 별채 전각 앞을 정신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벽태산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번득이더니 득달같이 달려왔다.
“공자님! 기침하셨습니까!”
그의 얼굴에 떠오른 짙은 미소를 가만히 보던 벽태산이 손을 휙 내저었다.
그 손짓에 제위룡이 뒤로 휙 나가 떨어졌다.
쿠당탕탕!
“으아악!”
제위룡은 바닥을 몇 바퀴 데굴데굴 구르고는 벌떡 일어났다.
제위룡은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공자님? 제가 뭔가 실수라도······.”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제위룡은 황당한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니. 그런 어이없는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제 표정이 어쨌기에······.”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안달 난 표정.”
제위룡이 뜨끔해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잘난 척을 하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실력과 성과를 가져온 다음에 해라.”
물론 그래도 잘난 척을 하면 방금 그 꼴이 되겠지만.
그 말을 들은 제위룡이 고개를 휙 돌려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서 이렇게 왔습니다! 실력과 성과를 가지고 말입니다! 으하하하!”
벽태산이 손을 휙 내저었다.
제위룡이 또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아악! 왜 이러십니까!”
벽태산은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제위룡은 꿋꿋이 다시 일어나 벽태산에게 후다닥 다가갔다.
“금월상단을 작살냈습니다. 예정을 무려 두 달 이상 단축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면 보름, 짧으면 닷새 안에 끝장을 내겠습니다!”
제위룡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어서 칭찬을 해달라는 듯 눈을 반짝이면서.
벽태산은 그런 제위룡의 곁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슥 지나가 버렸다.
제위룡이 황당한 눈으로 벽태산을 돌아봤다.
“저기, 공자님! 공자님? 그냥 가시면 어쩌십니까! 칭찬 한 마디 정도는 해 주셔야지요. 공자님?”
제위룡이 애타게 불렀지만 벽태산은 성큼성큼 걸어 이내 그곳을 벗어나 버렸다.
“와아, 뭐 이런······.”
제위룡이 황당한 표정으로 벽태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서 화옥이 나타나 사뿐사뿐 다가왔다.
제위룡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화옥 소저, 오셨소? 내 방금······.”
화옥이 차가운 표정으로 제위룡을 쳐다봤다.
제위룡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흠칫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왜, 왜 그러시오?”
“금월상단이 예정보다 일찍 무너지게 된 것은 그들의 기습을 완벽하게 막아냈기 때문입니다.”
“그야······ 그렇긴 하오만······.”
“그 뒤로 금월상단이 크게 흔들리게 된 것 역시 하오문과 비천단이 애쓴 덕분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오문과 비천단이 금월상단을 제대로 흔들 수 있었던 것은 천뇌의 지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위룡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화옥의 말이 더 빨랐다.
“습격 이전까지의 천뇌는 인정하지만, 습격 이후에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당연하다. 습격 이후 금월상단이 크게 흔들리고 나니, 제위룡이 이전처럼 전력을 다하지 않고 약간 설렁설렁 했으니까.
“아니, 그걸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좀 억울한데······.”
화옥의 눈에서 냉기가 쏟아져 나오는 듯하자, 제위룡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작정하고 정색할 때의 화옥은 정말 무서웠다.
“방금 공자님께 무슨 말을 하시려 했습니까?”
“아니, 난 그저······.”
화옥이 가만히 제위룡을 쳐다보자, 제위룡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오. 내가 실언을 할 뻔했소.”
화옥은 그런 제위룡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저는 천뇌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선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제위룡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의 입가가 쭉 늘어났다.
“염려 마시오, 소저. 내 그 기대, 절대 무너뜨리지 않을 테니.”
화옥은 희희낙락해서 돌아가는 제위룡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 공자님한테 한 번 크게 당할 것 같은데······.”
과연 그 시련을 견뎌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었다.
그녀는 이번에 천뇌가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했다.
금월상단의 움직임을 미리 읽고 몇 수 앞을 대비해 함정을 파는 것을 보고 있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천재 군사들이 이럴까?
화옥은 천뇌가 벽태산에게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벽태산이 어떤 마음으로 천뇌를 데려왔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걸 생각하니 화옥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자신이 모자라니 그걸 보충할 사람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벽태산에게 제대로 도움이 되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더 발전해야만 한다.
당장 제위룡과 천뇌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지략을 얻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