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75)
“호오. 의지력이 제법이로구나.”
벽태산은 그렇게 칭찬 한 마디를 남기고 혼백을 쑥 뽑았다.
“역시.”
벽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혼백의 때를 태웠다.
이 혼백은 살인을 겪지 않은 혼백이었다.
“신기하군. 무명에 소속되어 이런 중요한 임무까지 받을 정도의 여자가 아직 살인조차 경험하지 못했다니.”
살인을 경험하면 혼백의 때와 혼백이 섞인다. 그렇게 되면 때만 골라서 태우기가 굉장히 난감해진다.
그래서 모든 때를 태울 수가 없고, 겉만 살살 구워야 한다.
만일 그러지 않고 깊숙한 곳까지 세심히 작업해 모든 때를 태운다면 혼백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한데 이 여자는 혼백만 남기고 나머지 때를 싹 태울 수 있었다.
벽태산은 그동안 자주 해서 늘어난 숙련도 덕분에 아주 빠르게 작업을 마무리했다.
다시 혼백을 되돌리니 사공예랑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걸 본 벽태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보통 혼백을 태우고 나면 다들 깊은 잠에 빠진다. 혼백의 때를 태우는 것이기에 당사자에게는 좋은 효과를 남기지만, 그럼에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부하를 받는다는 뜻이다.
한데 이 여자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사공예랑은 고개를 들어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제, 제게 대체 뭘 하신 거죠?”
벽태산이 담담히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제 뭘 할까 고민 중이지.”
그 말에 사공예랑이 깜짝 놀라 숨을 흡 들이켰다.
“아무튼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좀 아깝구나.”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사공예랑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벽태산은 그런 사공예랑을 두고 걸음을 옮겼다.
사공예랑이 멀어져가는 벽태산의 뒷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뭘 할까 고민 중이라느니, 죽여 버리긴 아깝다느니 해놓고 왜 그냥 간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놔주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사공예랑은 억지로 몸을 움직여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깜짝 놀라 마구 허우적거렸지만, 일단 허공에 떠오른 이상 몸을 지탱하거나 발을 디딜 곳이 없어 그저 몸부림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허공에 둥실 떠오른 사공예랑은 벽태산이 사라진 방향으로 둥둥 떠갔다.
사공예랑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을.”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느새 저 멀리 벽태산이 보이는 곳까지 둥둥 떠갔다.
그리고 멈췄다.
벽태산은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사공예랑은 눈에 내공을 집중해 시력을 높였다. 그제야 벽태산이 구경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싸움이었다.
심성락, 그리고 그가 데려간 무명의 무사들, 거기에 심성락이 말했던 심가의 어르신들이 뒤엉킨 싸움 말이다.
* * *
무명의 심가에서 나온 심중곽은 놀란 눈으로 앞에 선 여인, 연하린을 바라봤다.
“정말 놀랍구나. 나와 손속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무림에 있을 줄이야.”
상대가 천마신교라면 이해할 수 있다. 천마신교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넘쳐나니까.
물론 지금의 천마신교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고작 스물이나 넘었을까 싶은 어린 여자 아닌가.
심중곽이 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검 주면으로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다가 부서져 흩어졌다.
흩어진 붉은 기운이 녹아들듯 허공에 스며들었다.
연하린은 그걸 보며 긴장했다.
처음에는 저것이 뭘 하는 건지 몰라 하마터면 당할 뻔했다.
저렇게 허공에 녹아든 붉은 기운은 언제 날카롭게 변해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싸우는 도중에 불쑥불쑥 나타나 쏘아질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이젠 당하지 않는다. 기운의 흐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으니까.
심지어 이런 것도 된다.
연하린의 몸에서 영력이 뭉클 쏟아졌다. 그리고 넓게 퍼지더니 허공에 녹아들었다.
그걸 본 심중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너······!”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 연하린이 검을 불쑥 내질렀기 때문이다.
꽈아아앙!
거리가 제법 되었지만, 연하린의 검은 마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듯 심중곽 앞에 나타나 쭉 뻗어 나왔다.
간신히 그걸 막아낸 심중곽이 경악한 눈으로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저정!
어느새 다가온 연하린이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며 연이어 무시무시한 검격을 쏟아냈다.
처음 가괴한 수법을 통해 싸움의 우위를 잡았었는데, 이제 역으로 거기에 당해 밀리고 있었다.
심중곽의 눈이 점점 시뻘겋게 충혈 됐다. 그러더니 이내 흰자위가 몽땅 새빨개졌다.
“크아아아아!”
심중곽이 마치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거친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꽈과과과과광!
검격이 더욱 난폭해졌고, 거기 담긴 기운이 몇 배나 늘어났다.
검과 검이 충돌할 때마다 기운이 폭발했고, 무지막지한 기파가 일어나 주변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연하린과 심중곽 주변에 있던 자들이 멀찍이 물러났다.
심중곽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기운이 점점 더 커지고 난폭해졌다.
하지만 연하린의 눈빛이나 표정, 그리고 검은 시종일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차분했다.
전혀 동요하지 않고 심중곽의 모든 공격을 잘 흘려내고 있었다.
연하린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번득이며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
꽈앙!
폭발적인 속도로 심중곽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연하린이 발을 디뎠던 곳이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심중곽의 가슴 안쪽으로 파고든 연하린의 검이 그의 가슴을 푹 찔렀다.
퍽!
심중곽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연하린은 검을 내지른 뒤에도 돌진하던 힘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돌진해 어깨로 심중곽의 가슴을 찍었다.
꽈아앙!
심중곽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피를 쏟으며 뒤로 날아갔다.
쿠당탕탕!
심중곽이 패대기쳐진 인형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싸움이 끝났다.
연하린은 마지막 순간 공격하느라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후우우우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저 멀리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벽태산과 눈이 마주쳤다.
벽태산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제야 그녀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맺혔다.
연하린은 다시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확인했다.
무사들 간의 싸움은 이미 천무련 측이 승기를 잡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이 싸웠던 노인보다는 좀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대단한 힘을 가진 노인을 상대로 하오문주는 물론이고 천추신의와 일침괴, 초서란에 벽태산의 시비들까지 전부 나서서 싸우는 광경이 보였다.
거기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마위홍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아 있었다.
저 노인과 처음 싸우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시기적절하게 벽태산의 사람들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으리라.
그리고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심성락과 화옥이 싸우고 있었다.
화옥은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연하린은 눈을 반짝였다. 화옥이 막 심성락을 제압한 것이다.
죽인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심성락은 멍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연하린은 다시 한 번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이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일단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자신의 바로 옆에 나란히 달리는 화옥을 발견하고는 풋 웃었다.
두 여인은 그대로 난전에 뛰어들어 단숨에 싸움을 정리해 버렸다.
그렇게 무명과 천무련의 첫 번째 싸움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벽태산은 가만히 서서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걸 보고 있으니 저들을 어떻게 굴려야 앞으로 빠르게 성장할지 머릿속에 착착 그려졌다.
그리고 벽태산의 바로 뒤쪽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사공예랑은 전투가 끝나가는 광경을 허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끝
“어떠신가?”
사마위홍은 천추신의의 물음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의, 신의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몸으로 겪어보니 과연 천추신의라는 별호를 가질 만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소. 정말 대단하시오.”
사마위홍은 감탄한 눈으로 천추신의와 일침괴를 번갈아 바라봤다.
자신이 입은 부상은 굉장히 심각했었다.
그 미친 노인은 자신이 감히 검을 맞대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수였다.
그런 고수에게 달려들었으니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노인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나자빠진 건 아니었다.
자신 역시 그동안 벽태산이 휘젓는 대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제법 강해졌으니까.
노인에게 몇 칼 먹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죽을힘을 다했지만 결국 나가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그 만용의 대가는 쓰디썼다.
일단 단전이 크게 다쳤다. 솔직히 사마위홍은 자신이 다시는 무공을 쓰지 못하게 될 줄 알았다.
부서진 뼈는 또 어찌나 많은지 상처를 입은 후에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거기에 내장도 크게 상해 다친 내장을 찾는 것보다 성한 내장을 찾는 게 쉬울 정도였다.
그 정도 부상을 입었으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리라.
한데 그 지독한 부상을 아주 말끔히 고쳐냈다.
단전이 되살아난 것에 더해 더욱 크고 튼튼해졌으며, 찢어진 기맥도 모두 원상복구 되었다. 더 질겨진 건 덤이었다.
찢어졌던 근육, 부러지고 부서진 뼈, 다친 내장 전부 마찬가지였다.
완벽하게 회복한 것을 넘어 전부 더 강해졌다.
이건 사람의 솜씨가 아니다.
“크흠. 뭐, 마음에 드는 눈빛이로군. 내가 저런 시선을 받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천추신의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그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는 듯 일침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사람을 모시게 되는 바람에 응당 받아야 할 칭송과 대가를 못 받은 기분이었다.
‘뭐······ 대신 훨씬 강해지긴 했지만.’
천추신의와 일침괴는 마치 서로 짜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각자의 손을 들여다봤다.
손바닥에 희미한 기운이 일렁이다가 다시 스며들었다.
이건 영력이었다.
그냥 영력이 아니라 벽태산에게 불과 얼마 전에 새로 배운 영력이었다.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영력을 조금 변화시킨 것인데, 그게 어찌나 원래의 몸과 혼백에 잘 들어맞는지 그 뒤로 영력의 성장이 굉장히 빨라졌다.
게다가 이 새로 얻은 영력은 의술에 특화되어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아무리 대단한 명의라고 해도 사마위홍이 입은 부상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완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완치야 가능하다. 하지만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부서진 단전을 완치하는 데 고작 하루 걸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부러진 뼈를 잇고 부서진 뼈를 짜 맞추고, 찢어진 내장과 기맥을 치료하는데 걸린 시간도 고작 하루였다.
그러니까 사마위홍을 고작 하루 만에 고쳤다는 뜻이다.
“두 분의 치료를 받다 보니 예전 의선이 무림맹을 방문했을 때가 떠오릅니다.”
“의선?”
천추신의와 일침괴의 귀가 쫑긋 섰다.
벽태산이 영력을 새로 가르치면서 이것이 의선의 것과 비슷하다고 했었다.
그러니 관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당시 의선께서도 절맥을 고작 하루 만에 완치시키셨습니다. 순찰당주의 아들 말고도 몇몇 사람들의 병을 봐주셨는데, 손만 갖다 대면 낫더군요. 어제 두 분께서 제게 보여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뭐, 아무튼 치료는 끝났소. 보통 의원들을 이럴 때 당분간 정양하라고 하겠지만, 우린 그런 거 모르오. 오늘부터 우리 공자님이 찾아오신다고 했으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듯하오.”
그 말에 사마위홍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아무래도 아직 몸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왠지 새로운 병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천추신의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하지. 나도 우리 공자님이 찾아올 거라는 말을 들으면 딱 그런 증상이 나타나지 뭐요.”
사마위홍이 살짝 애원하는 표정으로 천추신의를 바라봤다. 하지만 천추신의는 냉정하게 치료를 했다.
“치료법이 아주 간단하오. 내가 공자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리겠소.”
사마위홍이 정색하며 말했다.
“다 나았습니다.”
천추신의와 일침괴가 동시에 낄낄 웃었다.
그리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살짝 안쓰럽게 사마위홍을 바라봤다.
“힘내쇼.”
왠지 벽태산이 사마위홍에게 꽂혀 있어서 상대적으로 두 의원은 한동안 좀 편하게 지냈다.
그러니 이런 응원 한 마디 정도는 꼭 해주고 싶었다.
사마위홍은 멍하니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부상이 다 나았는데, 그래서 몸이 날아갈 것 같은데,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젠장. 그냥 돌아가도 문제, 안 돌아가도 문제로구나.”
이번 싸움으로 확실히 알았다. 벽태산 일행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무명이 얼마나 강한지.
만일 벽태산이 무한으로 돌아간 뒤에 무명이 쳐들어왔으면 그들을 결코 쉽게 막아내지 못했으리라.
물론 막아내긴 막아냈을 것이다.
무사들을 갈아 넣으며 시간을 끌고 사방에 도움을 요청하면 어찌어찌 막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뒤에는 어쩐단 말인가.
보아하니 이번에 온 놈들은 무한에서 간을 보기 위해 살짝 날린 견제에 불과했다.
그러니 진짜 제대로 쳐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렇다고 벽태산이 계속 여기 머무는 것도 문제였다.
“내가 못 버텨.”
벽태산과의 수련은 매일 매일이 새로웠고, 항상 오늘이 어제보다 더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실력은 부쩍부쩍 늘었다.
벽태산 일행이 왜 그렇게 강한지 이제 충분히 이해했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매일 굴려지면 어린아이라도 절대고수가 될 수 있으리라.
사마위홍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의 표정은 세상의 온갖 괴로움을 다 가져와 짓이겨 놓은 듯했다.
아무래도 한동안 그 표정과 몸짓이 계속될 듯했다.
* * *
벽태산은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손바닥을 위로 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영력이 뭉쳐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