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86)
의선이 움직이려 할 때, 화옥이 그 앞을 슬쩍 가로막았다.
“의선 어르신께서도 꼭 들으셔야 할 보고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일이 있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의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나도 같이 듣지.”
화옥은 그제야 빙긋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나 벽태산과 의선을 번갈아 바라본 후 말을 꺼냈다.
“현재 천무련 주변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의선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화옥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인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니.”
“아무래도 무명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외 쪽도 묘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의선의 표정에 담긴 절망감이 조금씩 더 깊어졌다.
“새외 쪽은 또 어떤데 그러는 건가.”
“백혈궁이 다른 새외 세력들과 은밀한 만남을 계속해서 추진 중입니다.”
백혈궁이라는 말에 벽태산이 반응했다.
“백혈궁? 거긴 이미 멸문했을 텐데?”
아직도 그놈들을 박살 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당시 백혈궁까지 쫓아가 그곳에 있던 모든 놈들을 증혼마공으로 태워 흡수했다.
“백혈궁은 멸문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받긴 했지만, 결국 재건에 성공해 이젠 새외 쪽에서 굉장히 큰 영향력을 가진 방파가 되었습니다.”
“기가 차는군.”
벽태산은 그놈들을 어찌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놈들 계속 감시해라. 허튼 수작을 부리려거든 바로 알리고.”
당장 백혈궁까지 쫓아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놈들이 허튼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바로 박살을 낼 작정이었다.
벽태산의 반응에 화옥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다행히 새외 쪽은 사해방이 진출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뒀습니다. 그들이 감시 중이니 조만간 더 깊은 정보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해방은 하오문의 영향력이 낮은 곳을 채우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관심을 둔 것이 바로 새외였다.
그들의 주 활동 무대가 감숙이었던 건 맞지만, 지리적 특성 상, 새외 쪽도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인력을 투입했다.
그러던 것이 벽태산 아래로 들어오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새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새외 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건 앞으로도 별 문제 없었다.
화옥의 얘기를 듣던 의선이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천무련 주변에 뭔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는데, 새외 세력까지 날뛸 준비를 한다는 말인가?”
“돌아가는 분위기는 그렇습니다.”
의선이 고개를 푹 숙였다.
“후우. 그럼 내가 가야지. 내가 가서 천무련에 앉아 있어야지.”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벽태산이 그런 의선에게 말했다.
“내가 그놈들 영력에 대해 말해준 적 있던가?”
“응? 그놈들은 영력이 뭐 다른가?”
“그놈들 영력, 피에서 뽑아낸 거야.”
“피에서 뽑았다고? 그럼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의선은 그렇게 말을 하고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이 부작용 따위 생각이나 하겠는가. 피에서 영력을 뽑아 쓴다는 것의 장점만 생각할 것이다.
“영력을 쓰는 놈이 엄청나게 많겠군.”
피에서 영력을 뽑아 쓴다는 건 별다른 깨달음이나 경험, 수련 없이 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가봐야겠군. 그런 놈들이 설치게 놔둘 수야 없지.”
의선이 당장에라도 떠나려 하자, 화옥이 얼른 말했다.
“천무련 보천각주가 하오문주입니다. 낙양에 가시거든 하오문을 잘 이용하십시오. 어르신의 편의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의선이 빙긋 웃었다.
“고맙구나.”
의선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렇게 그냥 가야 한다니.”
의선은 자신에게 남은 모든 감정을 담아 중얼거리고는 훌쩍 몸을 날렸다.
화옥은 떠나는 의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의선의 표정에는 아쉬움과 억울함,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끝
벽태산이 무한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로잡은 무명의 정보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번에 온 놈들은 무명 내에서 제법 중요한 놈들이 분명했다.
그러니 아는 것도 더 많지 않겠는가.
틀림없이 온갖 쓰레기 같은 기억을 머릿속에 잔뜩 담고 있겠지만, 그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정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벽태산이 가장 원하는 건 무명의 위치였다.
그것만 알면 모든 상황은 끝난다. 그냥 가서 모조리 박살 내버리면 되니까.
물론 위치를 알아냈다고 해서 혼자 막무가내로 달려갈 생각은 없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적을 살피고 정보를 파악한 다음,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도록 준비해서 갈 것이다.
“이곳입니다.”
화옥의 안내로 무명의 정보원들이 갇혀 있는 뇌옥에 도착한 벽태산은 뇌옥 안쪽을 슥 둘러봤다.
현천장 지하에 마련된 뇌옥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방의 입구는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밖에서 안을 훤히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각 방마다 십여 명의 사내가 갇혀 있었고, 몇몇 방은 한 사람만 있었다.
“흐음.”
벽태산은 뇌옥에 갇힌 자들을 슥 둘러봤다.
하나하나 실력이 제법이었다. 게다가 저들을 이끄는 자임이 분명한 세 사람은 무림맹의 장로라고 해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과연 무명에서 나온 놈들다웠다. 고작 정보원이 저 정도 무력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저 셋 중에 한 명은 영력까지 품고 있었다. 혈령마공을 익힌 것이다.
벽태산은 혈령마공을 익힌 자, 혁련국에게 다가갔다.
“혁련비광과 비슷한 향이 나는구나. 네놈이 혁련가에서 나왔을 테고······.”
벽태산은 나머지 두 사람을 한 차례씩 보며 물었다.
“둘 중 누가 악가고, 누가 심가지?”
뇌옥에 갇힌 세 사람은 그 말에 표정이 확 굳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소?”
악가에서 나온 자가 차분히 물었다.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든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래야 뭐든 해볼 수 있을 테니까.
“전에 잡은 녀석이 말해주더구나. 무명은 세 가문이 장악했다고.”
“그럴 리가 없소.”
세 사람은 그 뒤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명 소속인 자들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단 말이지?”
벽태산이 그들을 보며 씨익 웃은 뒤, 악가에서 나온 자가 있는 철창 앞에 섰다.
그의 혼백에 꽂힌 혈령의 파편을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없애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화르륵.
당사자는 보지 못하지만 벽태산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의 혼백에 꽂힌 혈령의 파편이 새파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는 모습을.
벽태산이 악가에서 나온 사내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는 벽태산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말을 하고 싶어도 못 하오. 그러니 괜한 짓 할 생각 마시오.”
“일단 뭐든 말을 해봐라.”
“뭘 말이오?”
“예를 들면······ 악가의 위치가 어디인지 아느냐?”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애초에 무명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소.”
“철저하기도 하구나.”
이러니 더 궁금했다. 대체 무명에 뭐가 있기에 위치를 아는 사람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아무래도 무명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를 잡아야 뭐든 알아낼 수 있을 듯했다.
그들이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벽태산이 보기에 무명은 아주 조심성이 대단한 놈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외부에서 진행하고, 내부는 철저히 보호하고 감춘다.
마치 언제든 꼬리를 잘라내고 다시 시작하려는 듯이.
어쩌면 지금까지 여러 번 그런 식으로 꼬리를 잘라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명이 뭔가를 획책했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놈들 하는 짓을 보니 그러고도 남았다.
“그럼 네가 누구에게 지시를 받았는지 한 번 말해봐라.”
“내가 그걸 말할 것 같소?”
그 말에 벽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악가의 사내가 눈을 홉뜨더니 몸을 파르르 떨었다.
“크어허헉!”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사내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허억!”
그는 두려운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자신이 방금 당한 것이 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상상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의 고통이라는 점이었다.
비단 육체적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다신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 이제 말을 해볼 용기가 생겼느냐?”
악가 사내가 얼른 말했다.
“말을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나보고 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어느새 말투도 아까와 달라졌다. 두려움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벽태산이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체념한 듯 말했다.
“가주님의 지시를 직접 받았습니다.”
그는 말을 하고도 화들짝 놀랐다. 설마 정말로 이 말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가주의 지시를 직접 받아? 그럼 가주를 만났단 말이로구나.”
“가주님의 지시를 전달해주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연락 방법은?”
“제가 연락하는 방법은 없고, 모은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
“예. 이 방법은 저희 악가에서 쓰는 방법입니다. 아마 심가나 혁련가는 다른 방법을 쓸 겁니다.”
벽태산은 그 말을 듣고는 혁련국과 심가의 사내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 차례씩 쳐다봤다.
지금 그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실 이건 그들 역시 미리 시험해본 바가 있었다. 만에 하나 수하들이 비밀을 발설할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 비밀을 발설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인정했다.
한데 그 믿음이 지금 박살 난 것이다.
악가의 사내는 그 뒤로도 자신이 아는 모든 걸 술술 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또 한 번 고통을 당한 뒤로는 벽태산이 굳이 묻지도 않을 걸 전부 쏟아냈다.
벽태산은 그 말을 다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법 마음에 드는구나. 그럼 지금까지 한 말을 밖으로 나가서 다시 한 번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사내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였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아니까.
아직도 그 고통의 기억이 생생했다. 이렇게 무명을 배신하는 꼴이 되었지만, 추호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웠으니까.
잠시 후, 뇌옥을 지키던 무사 한 명이 들어와 악가 사내를 데리고 나갔다.
뇌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한심함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했다.
“너희도 나와 똑같은 꼴을 당하고 나면, 아마 날 이해할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왠지 남은 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벽태산은 혁련국와 심가의 사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동시에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다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나무토막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바닥에서 파르르 떨었다.
고통이 사라졌음에도 눈이 확 풀렸고, 다시 제정신을 찾은 뒤에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벽태산의 눈치를 살폈다.
“알고 있는 걸 말할 기분이 좀 드느냐?”
다들 얼른 대답했다.
“예!”
하지만 벽태산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답이 늦구나. 할 마음이 모자란다는 뜻이겠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들 또 다시 뻣뻣한 나무토막이 되어 파르르 떨어야 했다.
지옥 같은 고통의 시간이 끝나자마자 벽태산이 다시 물었다.
“이제······.”
“예! 하겠습니다! 하게 해주십시오!”
벽태산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들 앞 다퉈 대답부터 했다.
그제야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오문도들이 우르르 들어와 뇌옥에 갇힌 자들을 전부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따로 떨어져서 강도 높은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따로 고문을 하거나 괴롭힐 필요는 없으리라. 그들의 뇌리에 방금 겪은 고통이 깊이 박혀서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뇌옥이 텅텅 비었다.
이제 이 안에 남은 사람은 벽태산을 제외하면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심가에서 온 자가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를 정도로 고통을 받은 뒤, 하오문도에게 끌려 나갔다.
혁련국은 두려운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자신만 남긴 이유가 있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일단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주지.”
벽태산은 혁련국의 혼백에 박힌 혈령의 조각을 태워버렸다.
푸른 불길에 휩싸인 혈령의 조각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혼백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겪은 혁련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대체······.”
“너도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혼백에 직접 가하는 금제다.”
혁련국의 표정이 굳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방법도 안다.
자신이 익힌 혈령마공이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자신의 혼백에 박힌 혈령의 조각이 사라질 때 정말 깜짝 놀랐다.
아마 집중하고 있었다면 벽태산이 다른 자들의 혼백에 박힌 조각들을 동시에 태워버렸다는 것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놀랐을 테고.
“일단 너도 다른 녀석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혁련국은 그럴 필요 없다고 외치려 했지만, 벽태산이 좀 더 빨랐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갓 잡힌 활어처럼 바닥에서 퍼덕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보다 강도를 좀 더 세게 했기에 반응이 남달랐다.
혁련국은 입가에 흐르는 침도 못 닦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고통이 사라졌음에도 멍하니 벽태산만 바라보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 가문이 한데 모여 있느냐.”
혁련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