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91)
무림연합 수뇌부 중 한 명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백혈궁주가 보는 쪽을 바라봤다.
“응?”
그곳에는 진짜로 누군가가 있었다. 그가 이 일을 벌인 자임이 분명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그 한 사람만이 주변과 달라 보였으니까.
조금만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사람 혼자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가 천천히, 아니, 느긋하고 여유롭게 새외 쪽 수뇌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다들 그걸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팽팽한 긴장감이 좌중에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대체 누구지?”
수뇌부 중 한 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저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다들 의아함과 불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사람, 벽태산은 느긋하게 걸어 백혈궁주 앞에 섰다.
“네가 새 백혈궁주로구나.”
척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때 죽였던 놈과 똑같은 기운을 품고 있었으니까.
백혈궁주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벽태산을 똑바로 바라봤다.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시는 거요?”
“혹시 살아있다면 쥐죽은 듯 살아야 하는 놈이 여기까지 와서 참으로 당당하게도 묻는구나.”
그 말에 백혈궁주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그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무, 무슨······!”
방금 그 말은 예전 천마가 백혈궁을 박살 냈을 때, 주변에 있던 자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혹시 살아남은 놈이 오거든 전하라면서.
“그, 그분과는 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백혈궁주는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말투도 처음과 달리 굉장히 공손해졌다.
벽태산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파천회주를 쳐다봤다.
“낯익은 놈이 있구나.”
저 파천회주는 예전 벽태산이 박살 냈던 파천회의 잔당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그때의 일을 저놈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제법 어린놈이었는데, 어느새 저리 늙어서 다시 여기에 온 것이다.
벽태산은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파천회주는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벽태산 앞으로 후다닥 달려와서 섰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도 눈치 하나는 제법이더니, 여전하구나.”
그 말에 파천회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는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심하게 떨었다.
“대, 대체 어떻게······.”
벽태산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어찌 살라고 했느냐?”
파천회주는 머뭇거리다가 벽태산의 눈빛이 살짝 달라지려는 걸 보고는 얼른 대답했다.
“쥐, 쥐죽은 듯 조용히 살라고 하셨습니다.”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구나. 잊은 줄 알았더니.”
파천회주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걸 어찌 잊는단 말인가. 당시의 일이 화인처럼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데.
“잊지도 않았는데, 사람을 모아서 여기에 온 것이냐?”
파천회주가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곧장 돌아가서 다시는 이쪽 땅을 밟지도 않겠습니다! 쥐죽은 듯 조용히 살겠습니다!”
“살려주마.”
파천회주가 이마를 땅에 퍽퍽 찧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어나라.”
파천회주가 벌떡 일어나 감격한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이제 살았다는 실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널 살려주는 이유는 귀찮아서다.”
“예! 알겠습니다!”
이유가 뭐 중요한가. 살았다는 게 중요하지.
“사람을 보낼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하면 내가 굳이 찾아갈 일은 없을 게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못 돌아가니 그리 알아라.”
파천회주는 즉시 고개를 깊이 조아린 후, 돌아섰다.
그리고 당당히 외쳤다.
“우린 돌아간다!”
애초에 여러 방파가 모인 것이 파천회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파천회주가 굳이 저러는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아까 벽태산이 등장할 때의 강렬함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었다.
굳이 저런 괴물을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왠지 벽태산이 나서면 자신들이 전부 몰살당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끊임없이 들었다.
파천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남은 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그 남은 자들을 슥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얼른 끝내자, 산책이 너무 길었다.”
끝
파천회주는 한동안 미친 듯이 달렸다. 목적지는 당연히 새외였다. 새외에 있는 자신의 문파로 돌아가서 한동안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
물론 그분이 사람을 보낸다고 했으니, 그 이후는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섬서를 넘어 감숙으로 들어갈 무렵,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공포가 조금씩 빠져나가 제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다.
물론 제정신을 차렸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무서웠다. 경각심도 더 올라갔고.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조금 전까지 하던 비이성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쯤에서 쉬어갑시다.”
파천회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달리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돌아보니 따라오던 모든 파천회 사람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지나친 강행군으로 너무 지친 것이다.
그래도 감숙까지 넘어왔으니 별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가만히 쉬면서 파천회주는 당시 일어났던 상황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나한테 손가락을 까딱였지. 내 얼굴을 아는 것 같았어.’
파천회주는 거기서부터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쪼르르 달려갔을까? 마치 왕이 노예를 부르는 듯한 손짓에 말이다.
한데 그때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파천회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를 보고 있으니 아주 오래전 그 일이 계속 떠올랐다. 절대 같은 사람일 리 없는데, 계속 예전의 그 사람과 겹쳐 보였다.
‘아니, 어쩌면 같은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어떻게? 아! 아들이나 손자인가?’
파천회주는 고개를 숙이고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사람을 보낸다고 했지? 대체 뭘 시키려고 그러는 거지?’
거기에 덧붙인 말이 떠올라 또 몸이 떨렸다.
시키는 대로하면 굳이 찾아갈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찾아올 거란 말 아닌가.
그렇게 고민하는 파천회주의 곁으로 몇몇 사람들이 다가왔다.
파천회는 새외에 있는 방파들의 모임이다.
백혈궁이나 흑사단, 만독림 같은 거대한 방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작은 방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설픈 자들은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는 제법 방귀깨나 뀌는 방파들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파천회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다.
어쨌든 거대 방파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니 말이다.
지금 다가온 자들은 그런 방파들 중에서도 제법 힘이 있는 방파의 주인들이었다.
그들도 슬슬 머릿속을 채웠던 공포가 빠져나가면서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이성이 돌아오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고, 지금 이 모든 일을 주도한 파천회주는 무언가를 알 거라 여겼다.
“회주, 아무래도 설명이 좀 필요한 듯하오만.”
파천회주는 피식 웃었다.
“설명은 무슨 설명. 다들 꽁지 빠지게 같이 도망쳤지 않소. 그 이유야 각자가 알 텐데 굳이 내 설명을 들어야 하오?”
“그 말이 아니잖소. 회주와 대화하던 그······ 분. 그분은 대체 뭐하는 분이기에······.”
파천회주가 말을 꺼낸 자를 매섭게 노려봤다.
“왠지 어조가 불순한 느낌인데? 그분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다는 걸 명심하시는 게 좋을 거요.”
파천회주의 말에 다들 깜짝 놀라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요. 그냥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 그분이 사람을 보내시면 고개를 숙이시오.”
다들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거기서 그 꼴로 도망쳐 왔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차피 그들은 패배자다. 그리고 패배자의 말로는 언제나 굴욕으로 귀결된다.
그 중 한 명이 화제를 돌리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남은 자들은 어찌 되었을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주저앉아 쉬고 있는 수하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인원이 처음 왔을 때보자 삼 할이나 줄어들었다.
고작 그 짧은 싸움에 삼 할이나 죽은 것이다. 아마 백혈궁이나 만독림, 흑사단은 이 정도로 피해가 크진 않을 것이다.
“우린 많이 죽었군.”
“흥, 많이 살아남았으면 뭐 하겠소? 거기 남았는데.”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걸 본 파천회주가 냉소했다.
“가식은 집어치우시오. 그들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할 거요. 죽을지 고문당하고 갇힐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어찌 되겠소? 한동안 새외가 시끄러워질 거요. 우린 그 기회를 잡은 거고.”
파천회주가 피식 웃으며 앞에 있는 자들을 슥 둘러봤다.
“설마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거요?”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다만 그들은 변수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분이 보내신다던 사람을 만나봐야 어느 정도 앞날을 예측할 수 있으리라.
파천회주가 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아마 그분 또한 우리가 하려던 일을 허락하실 거요.”
그가 확신하는 이유는 벽태산이 말했던 살려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귀찮아서 살려줬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 그게 무력이든 아니면 세력이든.
“쉴 만큼 쉬었으면 갑시다.”
파천회주가 다시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미친 듯이 달리는 건 아니었지만, 제법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다른 자들 역시 조용히 따라갔다. 그들 역시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새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무림연합 수뇌부들은 한데 모여서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일단 새외의 힘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거기에 무림맹의 손발처럼 굴던 묵검산장이 배신했다.
원래는 무림연합이 몰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한데 그걸 단 한 사람이 나타나 모조리 해결해 버렸다.
그리고 상황을 해결한 후,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산책이 끝났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그 사람에 대해 알아낸 분, 혹시 없소?”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자라면 어디에 있건 이름이 알려질 수밖에 없다.
다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호무련에서 나온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소.”
“본 적이 있다고 했소? 언제 어디서 봤소?”
손을 들었던 사내가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히 그때 봤던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왠지 그때와는 분위기가 좀 다른 것 같아서였다.
“예전 우리 호무련에서 후기지수모임을 개최한 적이 있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호무련이 후기지수 모임을 주기적으로 개최해서 소속된 무가들 간의 관계에 깊이를 준다는 건 유명한 얘기였으니까.
“그럼 그때 참여했던 분이오? 후기지수로? 만일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로군.”
호무련의 사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오. 그는 그저 후기지수로 온 사람의 일행이었을 뿐이오. 내가 듣기로······ 상단의 둘째공자쯤 되었던 것 같소.”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함께 온 후기지수가 워낙 미모로 유명한 연하린이었기 때문이다.
연하린이 정혼자를 동행해서 데려왔는데, 당시 호무련주의 관심을 좀 받는 바람에 제법 인상에 남았다.
다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호무련의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얘기를 모두 들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아까 분위기만 봐서는······ 솔직히 천마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듯했소. 뭐, 그럴 리는 없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오. 한데 고작 상단의 둘째 공자라니. 그런데 어느 상단인지는 기억나지 않으시오?”
호무련의 사내가 한동안 끙끙대더니 눈을 번쩍 떴다.
“금벽상단이라고 했소!”
“금벽상단?”
상단의 이름이 나오니, 그제야 다들 눈빛이 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금벽상단에 대해서는 무림맹이든 흑련이든 신경을 써서 관리하고 있었으니까.
“하면 아까 왔던 사람이 벽태산 공자?”
벽태산이라는 이름 역시 최근 빈번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 세력 내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올랐기에 그 정도 정보는 항시 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래 알던 것과 오늘 본 벽태산 사이에는 온도차가 너무 심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그동안 뭔가를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오.”
“우리 역시 마찬가지요.”
한동안 그곳에 모인 무림연합의 수뇌부는 심각한 논의를 이어갔다.
물론 뾰족한 결론이 나올 만한 논의는 아니었다.
어쨌든 새외 세력을 물리쳤으니 그들이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남은 건 무명이라는 은밀하고 음험한 조직을 상대하는 것과, 향후 무림의 향방에 대해 고민하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포로가 너무 많은데, 저들을 전부 데려가야 하는 거요?”
그 말을 하는 자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까 벽태산이 워낙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는지라 그가 하자는 대로 계속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으면 파천회가 그냥 물러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벽태산이 새외 세력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만 쏙쏙 골라서 데려가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테고.
왠지 남은 자들은 쭉정이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벽태산이 아니었다면 다들 여기서 뼈를 묻었을 터인데.
“일단······ 돌아가서 각자 보고부터 합시다. 아무래도 몇 차례 모여서 논의를 해야 할 듯하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가 끝나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뇌리에는 벽태산이 보여준 그 강렬한 모습이 화인처럼 새겨져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 새외 세력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벽태산이 그저 단순한 상단의 공자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