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95)
천경완이었다.
* * *
천경완은 침상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옆에 유서연이 바짝 붙어서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걱정이 있는 표정은 아닌데······ 뭔가 일이 있긴 있고. 설마 다른 여자 생겼어요?”
유서연의 말에 천경완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절대 그럴 일 없으니 말도 꺼내지 마.”
그래도 이렇게 정신이 번쩍 들고 나니, 상황이 좀 더 명확히 보였다.
“내가 이번에 상대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알지?”
“번천혈응이잖아요. 왜요? 흑련 소속이라서 마음에 걸려요?”
천경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 사람, 내 원수야.”
유서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얘기를 왜 지금 해요?”
“안 그랬으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나?”
유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안 달라진다. 생각해보니 화옥이나 벽태산이 대충 상대를 정해주지는 않았으리라.
“어쩌면······ 알고 붙였을 수도 있겠군요.”
“그랬을지도. 그랬든 아니든 달라질 건 없지.”
유서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무조건 이겨요.”
천경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어. 번천혈응은······ 내 손에 죽는다.”
유서연의 눈빛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그녀가 천경완에게 바짝 다가갔다.
천경완의 눈빛이 조금 전과 달리 살짝 불안함으로 흔들렸다.
“아니, 잠깐······. 우리 방금······.”
천경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끝
환마는 눈앞에 펼쳐진 뿌연 막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 막이 천마신교를 세상과 분리한 현천진이었다.
현천진의 원래 목적은 천마가 없는 천마신교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천마신교가 가진 힘의 절반은 천마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마가 보기에 그건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이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제 천마신교는 예전과 다르다.
그러니 이 현천진은 천마신교의 발목을 잡는 족쇄라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환마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현천진을 연구했다.
현천진을 처음 만들고 설치한 사람은 초대 천마의 수하였던 초대 환마였다.
환마라는 별호를 처음 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의 환마는 그 초대 환마를 넘어서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초대 환마는 무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자신이 초대 환마보다 재능이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진법에 대한 재능 하나만큼은 고금제일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도 초대 환마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노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재능이라는 이름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특별함을 초대 환마가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환마는 손바닥을 뻗어 현천진이 만들어낸 뿌연 막을 만져봤다.
마치 물의 표면을 만지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축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참으로 신비로운 감각이었다.
초대 환마를 넘어설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현천진을 완벽하게 정복하는 건 실패했지만,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그 대부분은 현천진과 관계되지 않은 성과였다.
현천진을 연구하다보니 다른 방향으로의 진법 지식과 경험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가 현천진을 연구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러니 지금 환마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아무리 봐도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야.”
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현천진의 구성 또한 진법을 통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 구성을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면 수십 년까지 투자하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으리라.
환마가 수십 년의 세월을 통해 알아낸 건, 현천진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 빈틈을 이용하는 법을 알아내는 데 무려 오 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빈틈을 열 수 있게 되었다.
환마는 천천히 돌아서서 천마신교의 전경을 내려다봤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높은 산의 정상이었다.
현천진을 뚫을 수 있는 빈틈은 정확히 이곳 정상에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천마신교의 전경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산 아래에 거대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천마신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었다.
안에 사는 사람의 수도 많고, 무인의 수도 많았다.
저 안에서 나름대로 생산 활동을 하며 심지어 장사꾼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저곳에 있는 모두가 무공을 익혔다는 점이었다.
천마신교에서는 굳이 무인이 아니라 해도 무공을 익힌다.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무공이 모두에게 제공된다.
물론 아주 특별한 무공은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천마신교 내에서 세력을 이룬 가문들이나 그렇게 한다.
천마신교에서 무인이라는 칭호를 받으려면 보통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마 저기 살고 있는 어린아이가 세상에 나가면 웬만한 작은 무가의 무인들로는 상대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얼마나 무서운 힘이 응축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어.’
천마신교는 그런 곳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천마신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을 지배할 교주만 있다면.
이곳의 교주가 곧 이곳의 왕이다.
그리고 환마는 그 교주를 손아귀에 쥐고자 했다.
“그러니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환마가 근처에 미리 깔아두었던 진법을 발동시켰다.
근처라고 하지만 사실 이 봉우리 전체에 걸쳐서 깔아둔 진법이었다.
은은한 빛이 환마가 서 있던 자리에서 시작해 주변으로 선을 그리며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빛의 선이 산을 타고 쭉쭉 내려가며 몇 갈래로 갈라졌다. 그렇게 갈라진 선이 산을 휘감으며 이어졌다.
환마는 진법의 중심에 서서 그 진법에 흐르는 힘에 전율했다.
이미 몇 번이나 똑같은 힘을 느꼈지만, 그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그 막대한 힘이 현천진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힘으로 진법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힘으로 현천진 자체를 엮은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힘으로 압박했다면 절대 이 정도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으리라.
현천진에 담긴 힘은 그 정도로 거대했다.
우우웅!
봉우리 전체가 은은히 진동했다. 진동이 점점 커졌는데,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러다가 봉우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봉우리 절반을 가르고 있는 현천진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환마는 그 구멍에 작은 호리병 하나를 휙 던졌다.
구멍은 언제 열렸냐는 듯 다시 닫혔다.
하지만 환마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구멍을 키울 일만 남았구나.”
구멍이 더 커지면 사람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천마신교의 힘이 천하에 투영되기 시작한다.
환마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돌아서서 봉우리를 내려갔다.
당분간 폐관이다. 진법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환마의 눈에 야망과 집착, 독기가 뒤섞여 일렁였다.
* * *
무명의 혁련가는 본단의 가장 중심에 위치했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자들은 본단의 위치를 아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이번에 천무련으로 간 혁련광은 그 거의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 자였다.
혁련광은 지금 천무련의 뇌옥에 갇혀 있었다.
천무련에서 지독할 정도로 심문을 했는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명 소속 무인들을 심문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제 천무련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심문도 형식적으로 이어지곤 했다.
본격적인 심문은 하오문이 개입하면서부터였는데, 하오문은 특별한 약물의 힘을 이용해 정보를 뽑아낸다.
하지만 무명에게는 그 약조차 통하지 않았다. 물론 하오문에서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약을 몇 차례 개량해서 효과가 많이 달라졌다.
무명의 다른 무사들로부터 약간의 정보를 뽑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약의 근간은 암영보에 포함된 지식이었다. 한데 하오문주와 화옥이 거기에 영력의 힘을 담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약의 성능이 좀 달라졌다. 무명에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혁련광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혁련광은 뇌옥에 갇힌 채, 다양한 방식의 심문을 받으며 대체 무명에 대한 정보가 왜 그렇게 많이 빠져나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오문에서 영력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뭔가가 더 있어.’
무명의 무인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자가 나서면 자신의 뇌리에 담긴 정보도 모두 빠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천마도 아니고, 그런 사람이 과연 정말로 있을까?’
천마가 증혼마공을 통해 혼백에 남은 사념을 읽어낼 수 있다는 건 무명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정 지위 이상에 있는 사람이거나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자들은 혼백에 쓰레기 기억을 매일 추가로 덧씌운다.
그렇게 세월이 쌓이면 아무리 증혼마공을 익힌 자라고 해도 쉽게 정보를 뽑아낼 수 없었다.
한데 혁련광이 보기에 그런 조치를 해도 정보를 뽑아낼 방법이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좀 있었다.
혁련광은 고민했다. 만일 자신의 정보를 뽑아낸다면 어떻게 될까?
‘본단 위치가 밝혀져.’
혁련광이 고민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본단 위치가 알려진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자신이 짐작한 이 사실을 무명의 본단에 알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자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자신이 죽으면 된다.
하지만 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뇌옥으로 다가왔다.
의선이었다.
혁련광은 의선을 보자마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의선이 혁련광 앞에 서서 말했다.
“나오게. 나랑 같이 갈 곳이 있으니.”
혁련광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무명에 알리지 못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르륵!
의선은 혁련광의 머리가 갑자기 확 타오르자 깜짝 놀라 뇌옥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불길은 그냥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그건 영력의 불길이었다.
불의 색은 특이하고 불길하게도 검붉은 핏빛이었다.
“이런.”
의선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나 강렬한 불길이었다.
잡아오면서 영력을 전부 없애버렸는데, 이런 강력한 영력이 남아 있었다니 너무나 의외의 상황이었다.
영력의 불길은 혁련광의 뇌를 말끔히 녹여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뇌만 도려낸 것 같았다.
“허어, 이를 어쩐다······ 분명히 화를 낼 터인데.”
사실 벽태산으로부터 혁련광을 데리고 무한으로 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기뻐하고 기대했다.
무한에 가면 천추신의와 일침괴가 있다.
그 둘이 자신만만하게 기대하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기대했는데, 혁련광이 이렇게 죽어버렸으니 무한으로 갈 명분이 없었다.
의선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동안 뇌옥 안에서 죽은 혁련광을 내려다봤다.
* * *
무명의 본단, 혁련가의 심처에 위치한 가주의 집무실, 혁련가주가 서탁에 앉아 몇 가지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사실 중요한 서류는 아니고, 향후 의선을 어떻게 상대할지, 또 무한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의견들이었다.
썩 마음에 드는 내용은 없었고, 다들 고만고만했다.
“골치 아프군. 어르신들이 거절하면 정말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어.”
의선이 이렇게 전면에 등장할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무림의 일에 한 번도 개입한 적 없는 사람이다. 그것도 수백 년 동안.
그러니 골치 아픈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골치가 아플 뿐, 의선 때문에 대계에 지장이 갈 거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대계는 결국 이뤄진다. 될 때까지 시도할 테니까.
그렇게 서류를 뒤적이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가주님, 신교에서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혁련가주는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외쳤다.
“어서 가져오게!”
문이 열리고 총관이 들어왔다. 혁련가주의 시선이 총관의 손에 꽂혔다.
총관은 호리병 하나를 들고 있었다.
호리병을 보는 혁련가주의 눈이 번득였다. 그가 보냈던 바로 그 호리병이었다.
총관이 호리병을 서탁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혁련가주는 호리병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짜르르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스며들었다.
영력이 담긴 호리병이었다.
“이것 하나만 달랑 오지는 않았을 텐데?”
혁련가주의 말에 총관이 소매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이것이 호리병에 묶여 있었다고 합니다.”
혁련가주는 서찰을 펼쳤다.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글자들이 가득했다.
미리 환마와 약속한 암어였다. 해석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복잡한 암어였다.
혁련가주는 암어를 능숙하게 해석했다. 워낙 이런 서찰을 자주 주고받았기 때문에 암어 사용에는 아주 익숙했다.
비밀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서찰을 읽던 혁련가주의 입가가 조금씩 올라갔다.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왔구나.”
서찰의 내용은 별 거 아니었다.
조만간 현천진을 뚫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내용과, 호리병에 담은 혼백이 누구인지였다.
“혼천마라고?”
혁련가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혼천마는 천마에 가장 가까웠던 자로 인정받은 자였다.
천마신교 내에서 죄를 저질러 뇌옥에 갇혔는데, 수십 년 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오긴 했는데, 그 때마다 죄를 지어서 다시 갇히는 일을 반복했다.
한데 그런 혼천마의 혼백을 호리병에 담아왔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