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303)
호리병을 쓰다듬다 보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걸 들고 있을 때마다 더없이 든든했다.
“의선만 딱 처리하고 끝내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판을 다시 짜야겠어.”
아마 이 호리병 속에 든 인물이 새 몸을 얻어 날뛰기 시작하면 천무련은 그날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아마 거기서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천하 무림에 재앙이 떨어지는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천무련이 할 일을 이 호리병 속 인물이 홀로 해내게 될 것이다.
그가 홀로 천하의 이목을 끄는 동안 무명은 할 일을 차근차근 진행하면 된다.
결국 천하는 무명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리라.
혁련가주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호리병이 주는 감촉이 손에 착착 달라붙었다.
* * *
혼천마는 서탁 위에 무공서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무공서의 내용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이 한없이 확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무아지경에 빠진 혼천마는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허어. 안타깝구나.”
혼천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이런 무공서를 자신이 죽기 전에 얻었다면 거의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성과를 얻었을 것이다.
아니, 죽었어도 상관없다. 혼백과 육체의 괴리감이 없다면 큰 성과를 얻었으리라.
한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 육체가 자신의 혼백과 약간 비틀려 있었다.
게다가 혼백에 박힌 금제들까지 방해를 하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혼천마가 깜짝 놀라 바라보니, 벽태산이 서 있었다.
“네 고민을 해결해주마.”
벽태산의 말에 혼천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정말입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벽태산이 씨익 웃었다. 마치 당연히 가능하다는 듯.
한데 그 미소를 보는 혼천마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올올이 돋아났다.
잠깐 고민하는 사이 벽태산이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고 말 테면 말라는 듯이.
혼천마는 화들짝 놀라 그 뒤를 따라갔다.
가는 내내 왠지 모를 불안감이 차곡차곡 쌓였다.
끝
천하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십대고수가 고작 며칠 사이에 모두 패배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들을 쓰러뜨린 자들이 모두 현천장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더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패배했다고 해서 십대고수가 바로 바뀌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그들은 십대고수였다. 하지만 조만간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십대고수를 정하는 건, 사실 예전에는 사람들 사이의 소문과 정보조직들의 정보를 통해서였다.
입소문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십대고수가 정해졌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십대고수라는 명칭이 명예가 되면서 과열되곤 했다.
강함의 순서를 매기는 일이 과열되면 피가 난무하게 된다.
그걸 핑계로 거대 세력들이 슬그머니 관여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십대고수 선정을 무림맹과 흑련이 주도하게 된 것에는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다.
아무튼 뒷이야기가 어떻든, 또 현실이 어떻든, 십대고수가 전원 죽거나 패배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얘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십대고수 일로 천하가 들끓고 있을 때, 흑련주와 무림맹주가 은밀히 만났다.
“오랜만이오.”
무림맹주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흑련주는 그런 무림맹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사이 더 강해졌군. 이래서야 어디 겁나서 만나겠소?”
무림맹주가 피식 웃었다.
“내가 할 말을 가로채시고 그러시오.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데.”
“이렇게 자극을 받으니 죽도록 수련하는 수밖에 없지 않소. 내게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게 해줘서 고맙긴 한데······ 나도 이제 좀 쉽시다.”
무림맹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마찬가지요. 다만 자극을 준 상대가 좀 다르긴 하지만.”
흑련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천마 때문이군.”
무림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만남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소.”
사방에 수천 명의 무사들이 둘러싼 곳에 당당히 들어와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을 보여주던 사람이 바로 천마였다.
한데 앞에 서 있으니 그 자신감을 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천마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강자 중의 최강자였다.
그날의 만남이 자극이 되어 정진하고 또 정진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날의 천마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넘어설 수 있지 않겠소?”
흑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럴 거요. 뭐,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기억 속에서 존재감이 커진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흑련주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지금의 무림맹주는 자신이 보기에도 아득한 수준이었다.
어쩌면 당시의 천마를 지금의 무림맹주가 넘어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자신은 천마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니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항상 만나면 하는 인사 같은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번에 정말 놀랐소.”
무림맹주가 먼저 운을 띄우자 흑련주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십대고수가 애들 이름도 아니고······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소.”
“어쨌든 결론을 내리긴 해야 할 듯하오.”
사실 십대고수를 정하는 데 굳이 맹주와 련주가 만나서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몇몇 사람들끼리 모여서 논의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특별해서 련주와 맹주가 이례적으로 직접 나선 것이고.
흑련주가 말했다.
“천독검을 우리 흑련에서 받아들이기로 했소.”
“천독검을 말이오? 그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소?”
무림맹주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이번에 아주 호되게 당한 모양이오. 슬쩍 운만 띄웠는데 덥석 물더군.”
“독검방도 흡수하기로 한 것이오?”
“그럼 어쩌겠소. 독검방도 이번에 된통 당한 모양이오. 천추신의, 일침괴······ 명성보다 실력이 훨씬 윗줄인 듯하오.”
“그 두 사람만 그런 건 아니지요. 솔직히 난데없이 그런 고수들이 우르르 튀어나올 줄은 몰랐소.”
“그 천경완이라고 했던가? 번천혈응을 죽인 자 말이오. 싸움을 지켜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보통이 아니오.”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오?”
“번천혈응을 압도한다고 했소.”
“그래도 죽인 건 좀 심하군. 실력 차이가 그 정도로 난다면 충분히 살려둘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오.”
무림맹주가 눈살을 찌푸리자, 흑련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원한이 있었던 모양이오. 가문의 원수라더군.”
무림맹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런 속사정이 있을 줄은 또 몰랐다.
“애초에 번천혈응을 들인 것도 그자의 성향을 이용해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목적이었소. 뭐, 뿌린 대로 거둔 것이지.”
그래도 굉장히 요긴하게 잘 써먹었다. 그동안은 말이다.
“그래서 천독검을 영입했소? 똑같이 써먹으려고?”
“맞소. 우리야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흑련주가 깼다.
“현천장의 힘이 너무 커졌소.”
“그냥 힘만 강한 것이 아니오. 그들은 정보를 쥐고 있소.”
“하오문을 말하는 것이오? 그 정도야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소. 그건 무림맹도 마찬가지 아니오?”
무림맹주가 어림없다는 듯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군. 하오문은 그리 만만한 조직이 아니오.”
흑련주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무림맹주가 말을 이었다.
“사마위홍에게 들은 말이 있소.”
“사마위홍? 천무련주 말이오?”
무림맹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하오문을, 그리고 현천장을, 특히 벽태산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했소.”
흑련주가 묘한 표정으로 무림맹주를 바라봤다.
“정말로 사마위홍이 그렇게 말했소? 그 셋을 정확히 언급하면서?”
“정확히 그랬소.”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실 거라 믿소.”
무림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무림맹주에게 했다는 건, 아무리 무림맹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하오문, 현천장, 벽태산을 말이다.
“사마위홍을 만난 모양이군. 천무련으로 찾아갔소?”
무림맹주가 고개를 저었다.
“중간쯤에서 만났소. 의선 문제로 몇 마디 나누었지.”
“아, 의선도 있었군. 대체 의선은 어떻게 된 거요? 천무련에서 영입한 거요?”
“그저 잠시 머물고 있다고 들었소.”
흑련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천하의 의선을 식객으로 두다니.”
“아무튼 중요한 건, 사마위홍의 태도였소.”
“태도? 사마위홍이 뭔가 딴 맘을 먹고 있는 것 같았소?”
“그랬어도 내가 알아볼 수나 있었겠소?”
“하긴.”
사마위홍이 감추고자 마음먹으면 누가 앞에 있더라도 속마음을 캐내지 못할 것이다.
“하면 태도가 어쨌다는 것이오?”
“벽태산에게 넘어간 것 같았소.”
“넘어갔다?”
“벽태산에 대해 얘기하는 표정이 마치 예전 나에 대해 얘기하는 표정을 보는 것 같았소.”
흑련주가 고개를 살짝 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벽태산의 나이가 이십대 초반 아니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소.”
“한데 사마위홍이 벽태산을 모신다고? 고작 몇 번 본 걸로? 좀 이상하지 않소?”
“사람이 사람에게 빠져드는데 나이나 시간이 중요하진 않소.”
“하긴,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흑련주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혼자서 너무 다 해먹는 거 아니오? 하오문에 천무련주까지 홀딱 넘어가고, 현천상단은 천하의 부를 몽땅 쓸어 담고 있다던데, 거기에 십대고수가 대체 몇 명인지······.”
“아무튼 사마위홍이 그랬소. 나보고 꼭 한 번 만나보라고. 아마 만나면 생각이 많이 달라질 거라고.”
흑련주가 놀란 눈으로 무림맹주를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까지 말했단 말이오? 그 사마위홍이?”
무림맹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흑련주가 나직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 하니까 정말 궁금하군. 꼭 한 번 만나봐야겠어.”
“부른다고 달려가지는 않을 거요.”
흑련주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소. 그래도 떠오르는 신성인데 나름대로 조사는 좀 했소.”
“잡담은 이 정도로 하고 십대고수부터 논의합시다.”
“그럽시다.”
두 사람은 그 뒤로 논의를 이어갔다.
아무리 십대고수와의 대결에서 이겼다고 하지만 그들 모두를 십대고수에 올릴 수는 없었다.
두 자리, 많이 줘봐야 세 자리가 전부였다.
결론은 당사자의 의견을 먼저 들어보는 걸로 내렸다.
특히 벽태산의 의견을 꼭 듣고자 했다. 겸사겸사 말이다.
* * *
“흑련주가?”
벽태산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화옥을 바라봤다. 방금 화옥이 한, 흑련주가 벽태산을 보고자 한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설마 나보고 오라는 건가?”
화옥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쪽에서 이리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벽태산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럼 그러라고 해.”
“예. 그렇게 연락하겠습니다. 한데······.”
벽태산이 다시 화옥을 쳐다보자, 화옥이 말을 이었다.
“무림맹주에게서도 같은 용건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벽태산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갑자기 흑련주와 무림맹주가 자신을 만나려고 한다니 뭔가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보면 되겠군. 날짜 정해서 통보해.”
벽태산의 말에 화옥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화옥은 대답을 하면서도 과연 이래도 되는지에 대해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다.
무림맹주와 흑련주를 같은 날 불러서 한 자리에 놓고 용건을 말하게 하다니.
벽태산이 아니라면 감히 시도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날짜는 최대한 빠르게 잡겠습니다.”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은 빠르게 몰아서 처리하는 게 낫다.
“그나저나 무림맹주라······.”
벽태산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예전에 무림맹주와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수천 명의 무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에서 만났는데, 그때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다.
“얼마나 변했으려나.”
벽태산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보고할 게 남았느냐?”
벽태산의 물음에 화옥이 고개를 저었다.
“끝났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화옥은 잠시 멍하니 벽태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저 가볍게 지나가듯 한 말이지만, 수고했다는 말을 들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