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31)
벽태산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관심이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묘한 기의 흐름은 칼같이 기억했다.
당연히 종리세가 무사들이 가진 공통의 흐름 역시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운이 이 전각에 있는 방 하나에 모여 있었다.
“오늘도 평소와 같은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기녀가 안내하는 방은 종리세가 사람들이 모인 방을 마주한 곳이었다.
근처에 제법 강한 기운 몇 개가 느껴졌다.
종리세가 놈들과 제대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려면 그럴듯한 실력자가 필요하다. 그런 놈들을 잘 공수해온 모양이었다.
평소에 백화루에 있던 무사들보다 수준이 좀 높았다.
그리고 고수의 숫자도 평소보다 많았다.
“제법인데?”
벽태산의 말에 안내하던 기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오, 오늘은 절 선택해 주시는 건가요?”
오해였지만 굳이 풀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기녀의 얼굴에 기쁨과 안타까움이 마구 뒤엉켰다.
오늘은 선택을 받아봐야 함께 밤을 지내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웠다.
벽태산과 밤을 보낸 다른 기녀들은 여전히 벽태산이 올 때마다 심장이 뛴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다시 한 번 잠자리를 함께 하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굉장히 좋았다는 것 말고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다들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래서 지금 벽태산을 안내한 기녀도 벽태산과의 하룻밤을 꿈꿔왔다.
대체 얼마나 좋으면 기억이 싹 날아가 버린단 말인가.
자신도 벽태산의 선택을 받았던 다른 기녀들처럼 그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싶었다.
그 기회가 왔는데, 하필이면 왜 오늘이란 말인가.
“그, 그럼 다른 아이들도 부르겠습니다.”
“됐다.”
“예? 오늘은 저 하나로 만족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러니까 들어와 앉아라.”
기녀가 상기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 벽태산 곁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러자 밖에 있던 천경완이 방문을 닫았다.
벽태산은 가만히 앉아서 기녀를 쳐다봤다. 기녀가 슬그머니 벽태산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옆모습을 보여주었다.
생각해보니 아직 계획을 실행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그 전에 잘 하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녀는 그런 기대를 안고 다시 벽태산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주변이 좀 소란스러운 거 같지 않느냐?”
“예? 그, 글쎄요. 저는 잘······.”
“귀 기울여 들어봐라. 싸우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기녀는 벽태산의 말에 가만히 주변 소리를 들어봤다. 그러자 정말로 싸우는 것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어? 정말이네요?”
그녀는 이 소리가 뭔지 알고 있었다. 오늘의 계획을 더 확실히 성공하기 위한 밑작업이었다.
아마 저 소리는 흑도 무리가 근처에 있는 금벽상단의 사업장에서 난장을 피우는 소리일 것이다.
기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틀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차분한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공자님은 오늘 큰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벽태산이 자신을 바라보는 기녀를 향해 피식 웃었다.
“눈을 뽑아주랴?”
“예?”
기녀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따위 눈으로 날 보지 마라.”
“제, 제가 무슨······.”
“내가 다 잡아놓은 먹잇감으로 보여?”
기녀는 입을 다물었다. 혼란스러웠다. 이건 절대 평소의 벽태산이 아니었다.
그녀는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고 얼른 입을 열었다.
“고, 공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많이 너그러워졌거든? 만일 안쓰러운 눈으로 봤으면 그냥 넘어갔을 테지. 한데 감히 위에서 내려다봐?”
기녀가 넙죽 엎드렸다.
“전 맹세코 그런 눈으로 공자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혼백을 걸고?”
“예?”
기녀는 순간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목숨을 걸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혼백을 걸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한데 그래서 더 무서웠다.
왠지 그러겠다고 말해선 안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맹렬히 그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하려던 거나 시작해.”
“예?”
벽태산이 사납게 웃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에 왔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기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 *
벽태산의 방문을 닫은 천경완은 그 앞을 가로막고 서서 주위를 슥 둘러봤다.
그런 천경완 옆에 유서연이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천추신의가 앉아 있었다.
이건 평소와는 좀 다른 상황이었다.
평소 천추신의는 벽태산이 방으로 들어가면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일이 끝날 때쯤 다시 나타나곤 했다.
천경완은 평소와 다른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한껏 긴장한 상태로 주위를 살피던 천경완의 눈에 유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한데 천경완은 그 모습이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헛! 이게 무슨!’
천경완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라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저 주위를 슥 둘러보려고 했는데, 유서연을 본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한동안 바라본 것이다.
하마터면 유서연에게 들킬 뻔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갑자기 정욕이 들끓었다. 평소에는 감히 유서연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는데, 지금은 예전 백화루에 왔을 때, 루주가 따로 방을 마련해 주겠다던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천경완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유서연을 바라봤다. 마침 유서연도 이쪽을 보고 있어서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다시 앞을 바라봤다.
한데 유서연과 눈을 마주쳤다는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정욕이 훨씬 더 격렬하게 끓어올랐다.
그제야 천경완은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황급히 옆에 앉아있는 천추신의를 바라봤다.
천추신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게 바로 아까 천추신의가 말했던 사소한 부작용인 모양이었다.
‘이게 어딜 봐서 사소하단 말입니까!’
천경완은 절규하듯 속으로 외쳤다.
그렇게 욕망과 이성을 정신없이 오가며 자신의 내면과 싸우던 천경완은 갑자기 주변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는 느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끓어오르던 정욕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맹렬한 투기가 채웠다.
이 역시 평소에는 거의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복도 끝 계단에서 일단의 무리가 성큼성큼 올라왔다.
그들은 천경완과 유서연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모두 스무 명이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유서연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천경완은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투기와 살기를 제어하느라 식은땀까지 흘려야 했다.
그들은 종리세가 사람들이 머무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여기 있었구나.”
그 뒤로는 정말 뻔한 얘기가 오갔다.
내가 찍은 기녀를 네가 채갔네 마네 하는 추잡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서로의 자존심을 긁는 말이 오간 후, 몸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꽈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주변 집기들이 부서져 날아갔다.
사방으로 튄 파편이 천경완과 유서연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는데, 두 사람은 차분히 그것을 쳐내며 싸움을 지켜봤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방에서 사람들이 나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방에서 싸우던 놈들이 이내 복도로 나왔고, 싸움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종리세가 무사와 백화루의 무사들이 엉키며 천경완과 유서연을 그들의 간격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천경완과 유서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늘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천경완이나 유서연이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만전의 태세를 갖췄다.
쩌저저저정!
두 사람의 검이 정신없이 얽히며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쳐냈다.
다들 깜짝 놀랐다.
그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실력이었다.
솔직히 간단히 끝날 줄 알았다.
천경완과 유서연을 단숨에 쓰러뜨리고 방문을 부순 후 난입해 안에 있는 벽태산을 뭉개 버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한데 시작부터 일이 틀어진 것이다.
두 사람이 너무 강해서 우연을 가장하는 정도로는 절대 쓰러뜨릴 수가 없게 되었다.
종리세가 무사들과 백화루 무사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그들은 마치 같은 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천경완과 유서연에게 합공을 시작했다.
손발은 잘 안 맞았지만, 그래도 실력이 뛰어난지라 서로 방해가 될 만한 짓은 하지 않고 적절히 협공했다.
천경완과 유서연은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눈을 번득였다.
실력은 종리세가 무사들이 백화루 무사들보다 위에 있었다. 한데 상대하기에는 종리세가 쪽이 훨씬 편했다.
두 사람의 실력이 늘어나면서 약점을 이용하는 힘이 더욱 커진 것이다.
이쯤 되니 저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오늘 일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직 제대로 힘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가볍게 움직이고 있던 원문광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화루 쪽 고수들도 제대로 힘을 쏟아냈다.
천경완과 유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계획은 그들이 그냥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자신들이 나머지를 맡는 것이었다.
한데 과연 저런 대단한 고수들을 벽태산이 홀로 막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된 것이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누가 누굴 걱정해.’
천경완에게 원문광이 달려들었고, 백화루의 고수 세 명이 유서연에게 돌진했다.
천경완은 옆으로 비켜서며 검을 휘둘렀다.
꽝!
원문광의 검에 담긴 어마어마한 힘이 천경완을 옆으로 쭉 밀어냈다.
원문광은 그대로 지나쳐 방문을 박살 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너무나 절묘하게 방문이 활짝 열렸다.
원문광은 방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유서연을 공격하려던 자들 역시 원문광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문이 다시 닫혔다.
천경완도 그렇고 유서연도 그렇고 막을 생각이 아예 없었기에 그들은 아주 쉽게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굳게 닫힌 방문 앞을 막아서며 적들을 노려봤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천경완이었다.
천경완은 아까부터 들끓는 투기 때문에 자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걸 그대로 터트리며 적을 향해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사방으로 불똥과 기파가 튀었다.
천경완의 거친 움직임 사이로 유서연의 부드러운 공격이 파고들었다.
슈가가각!
두 사람은 매일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검을 휘둘러왔다.
그 얘기는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도 된다.
서로의 빈틈이나 장단점, 거기에 습관까지 모두 꿰고 있기에 손발이 너무나 잘 맞았다.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여 적을 몰아쳤다.
싸움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기묘한 고양감이 온몸을 적셨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상대하는 종리세가 무사들과 백화루 무사들은 손발이 맞지 않아 계속 삐걱거렸다.
그 빈틈을 천경완과 유서연이 끊임없이 찔렀다.
두 사람은 싸움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또 격렬해질수록 점점 더 하나가 되어갔다.
* * *
원문광과 백화루 고수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벽태산부터 찾았다.
벽태산은 그들을 보면서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그때 방문이 탁 닫혔다.
방에 들어온 네 사람이 일제히 뒤를 확인했다.
문을 닫은 사람은 벽태산과 함께 있던 기녀였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허어. 설마 그동안 자신을 감추고 있었나?”
원문광이 황당한 표정으로 벽태산을 노려봤다.
벽태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네 사람은 순간 기이한 압박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압박감 위에 벽태산의 말이 내려앉았다.
“종리세가 머저리는 잠시 비켜. 나머지랑 할 얘기가 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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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할 일 남았다
원문광은 분노를 터트렸다.
“감히! 종리세가를 능멸하느냐!”
벽태산이 냉정히 말했다.
“종리세가가 아니라 너한테 한 말이잖아. 종리세가도 머저리인 건 맞지만.”
원문광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허어. 너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것이냐? 설마 금벽상단이나 연가장에서 널 도와주러 오기라도 한 것이더냐?”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굳이 왜?”
원문광의 표정이 확 굳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쓰며 말했다.
“아무도 널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 밖에 있는 네 호위는 비참하게 죽을 것이고, 금벽상단은 흑도 무리의 난장으로 한동안 몸살을 앓을 것이다. 연가장은 아예 이런 소식조차 못 들을 것이고.”
“구구절절하기도 하다.”
“그리고 넌 일단 피똥을 쌀 때까지 맞을 거다. 쉽게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구나.”
그 말에 벽태산이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