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48)
“세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모르지만······ 내가 내기를 좀 많이 좋아하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발목을 잡혔소. 뭐······ 이젠 굳이 내기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호무련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괴의께서도 금벽상단이라기보다는 그곳 둘째 공자에게 의탁하신 겁니까?”
“정확하오. 솔직히 금벽상단이 어찌 되건 나는 별 관심이 없소. 오직 우리 공자님만 무사하면 그만이오.”
호무련주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이런 식이면 굳이 금벽상단을 조사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아니, 이 두 사람이 연막을 치는 걸 수도 있으니 조사는 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
‘벽태산이라고 했지?’
호무련주는 벽태산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 * *
소소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더니 몸을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살금살금 걸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그래도 달이 밝아서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소소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늘밤 벽태산의 방으로 가야 한다.
아까 자신을 보던 연하린의 시선이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소에게는 연하린보다 벽태산이 더 위에 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기대하는 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너무 부끄럽고 연하린에 대한 죄책감이 일어나 억지로 무시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살금살금 걷다보니, 어느새 벽태산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고 있으니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사납다.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싫으면 그냥 가라.”
얼핏 들으면 매정하고도 차갑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소소는 그게 벽태산의 본심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꼭 저렇게 못되게 말씀하신다니까.”
소소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벽태산의 모습이 보였다. 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리 와서 누워라. 옷은 벗으면 더 좋긴 한데, 안 벗어도 상관없고.”
소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떻게 저런 말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길면 안 된다. 소소는 얼른 종종종 달려가 침상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벽태산이 그런 소소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본 소소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벽태산이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혼백을 쑥 뽑아냈다.
* * *
소소는 해가 뜨기 전에 벽태산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소소는 단영, 채월과 같은 방을 썼는데, 놀랍게도 두 여인은 소소가 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소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어······ 언니들, 그러니까 저는요. 어······.”
머릿속이 마구 엉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런 소소에게 단영이 다가갔다. 그리고 가만히 안아주었다.
소소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좀 진정되자, 소소를 앞에 두고 단영과 채월이 자리에 앉았다.
두 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소소를 바라봤다.
소소는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어땠어?”
채월의 물음에 소소가 흠칫 놀랐다. 그리고 채월의 눈빛과 표정에 어린 약간의 장난기를 발견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왠지 소소의 피부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역시.”
단영은 그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벽태산과 잠을 잔 여인은 전부 외모가 좋아진다. 정도의 차이는 좀 있지만.
소소는 차이가 많이 나는 쪽이었다. 피부도 훨씬 고와졌고, 이목구비도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뭔가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가 흘렀다.
“지금 막 봤는데 이 정도면······ 나중에는 정말 난리 나겠는데?”
채월이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했다.
단영보다는 채월이 벽태산에 대한 소문도 더 많이 들었고, 벽태산이 기루에서 벌인 일을 더 오랫동안 지켜봤다.
벽태산과 잠을 잔 여인들은 전부 외모가 좋아진다. 하지만 자고 일어난 다음 날 확 하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차츰차츰 바뀌어 나간다. 보통은 닷새 정도 걸리고, 짧게는 사흘, 길게는 열흘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길게 이어질수록 외모가 더욱 훌륭해진다.
단영이나 채월이 그런 경우였고, 벽태산을 모시겠다고 찾아온 여인들이 전부 그랬다.
그리고 첫 날 얼마나 많이 변하느냐가 최종적으로 변하는 척도가 된다.
그걸 토대로 소소를 봤을 때, 아마 오랫동안 변할 것 같았다. 그리고 굉장히 아름다워지리라.
‘지금 변한 것만 봐서는······ 귀여운 쪽이 훨씬 강조될 것 같긴 하지만.’
채월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표정 보니까 정말 좋았나보네?”
소소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말할 수 없이 포근하고 편안한 기분이에요.”
“포근하고 편안하다고?”
그 말에 단영과 채월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두 사람은 벽태산과 잤을 때, 말로 형언할 수조차 없는 쾌락에 온몸이 푹 잠겼다가 다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무 소리도 안 들렸던 모양이다.
솔직히 좀 걱정을 하긴 했다. 경험에 의하면 이 근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기 어려울 정도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끊임없이 쏟아질 줄 알았으니까.
“기억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은 나고?”
소소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쉽게도······.”
이건 자신들과 마찬가지였다. 느낌과 기분만 남고,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단영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벽태산과 하룻밤을 보낸 모든 사람들이 다 같았다.
어마어마한 쾌락에 몸부림쳤다는 느낌만 남아있고 기억이 사라졌다.
한데 다들 그걸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심지어 당사자가 아닌, 함께 지내던 사람들조차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결코 당연하거나 평범한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문이 드는데도 정말 신기한 것은, 그 의문이 아무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 자체가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의문이 들어도 금세 수긍하게 된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건 좀 아쉽네. 정말······ 다신 경험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채월의 말에 소소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전 정말로 좋았어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라서요. 아마······ 이런 경험 다시는 못 하겠죠?”
단영과 채월이 신기한 눈으로 소소를 바라봤다.
느낀 건 다르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리고 그 신기함을 느끼는 사람이 여기 말고 또 있었다.
* * *
벽태산은 소소를 통해 얻은 혼백의 힘을 차분히 받아들였다.
소소는 다른 사람들과 좀 달랐다.
일단 기녀들로부터 혼백의 찌꺼기를 태웠을 때 사방을 울렸던 그 혼백의 신음소리가 없었다.
소소는 혼백을 태우는 내내 정말 편안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정성을 들여 모시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 끙끙 앓긴 했는데, 그것이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시원해서 그러는 걸로 보였다.
이런 반응을 보여준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예전에 장난삼아 소소에게 혼백에 때가 묻어간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아예 농담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소소는 순수한 면이 많은 아이였다.
혼백에 때가 덜 탄 것도 확실했고.
한데 막상 증혼마공을 통해 혼백을 태워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영력이 쌓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초기에 향화루에서 잡아왔던 놈을 태웠을 때보다 더 많았다.
그것도 혼백이 섞여서 양이 부풀려지고 별 쓸모도 없는 영력이 아니라, 순수한 영력이 말이다.
지금까지 태웠던 그 어떤 혼백보다 뛰어났다.
벽태산은 소소의 영력을 당연히 기맥 치료로 돌렸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마음이 차분히 안정되고, 심신이 편안해졌다.
그러면서 그동안 치료했던 기맥이 더욱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벽태산은 직감적으로 오늘의 치료가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 될 거라는 사실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냥 마구잡이로 치료했다면, 오늘은 그 발판을 단단히 다져주는 역할을 했다.
무공으로 예를 들면 매일 상승무공만 허덕허덕 익히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기초를 다진 셈이었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대단한 무공이야.”
익히면 익힐수록 새롭다.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고, 시작인 줄 알았는데 시작이 아니다.
어쩌면 오늘의 일을 모조리 뒤집어 버리는 깨달음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될 것이다.
천마이던 시절 익혔던 증혼마공이 죽음을 계기로 얻은 깨달음을 통해 모조리 뒤집어졌지만, 그걸 익힌 사실 자체가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처럼.
벽태산은 차분히 소소의 영력을 온몸으로 느꼈다.
기분 좋은 미소가 끊임없이 입가를 맴돌았다.
* * *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호무련 전체가 들썩였다.
후기지수 모임을 여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일단 호무련에 속한 무가들 사이의 교류를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다져주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또한 서로를 보며 자극을 받다보면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때만큼은 호무련의 모든 사람들이 전폭적으로 후기지수를 도와준다.
호무련 곳곳에서 어른들이 후기지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응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시기였다.
무공에 대한 의문이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의문이든, 지식에 대한 의문이든 가리지 않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논의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심지어 얘기가 잘 된다면 대련까지 할 수 있었다.
호무련이 결성된 지 오래지 않아 작은 무림맹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성장한 데에는 다 이런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모임에 참석하는 후기지수들에게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한정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걸 얻어가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연하린은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벽태산의 방을 쳐다봤다.
오늘이 호무련에 도착한 지 사흘 째 아침이다.
첫 날과 둘째 날은 각자 알아서 쉬고, 오늘부터가 진짜 시작인데, 벽태산은 둘째 날부터 아예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하린은 섣불리 벽태산을 부를 수 없었다.
왠지 굉장히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상식적으로 무공도 익히지 않은 사람이 그런 순간을 맞이할 일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벽태산의 방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말이다.
그건 연하린뿐 아니라 모든 일행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팔을 걷어붙이고 각오에 각오를 거듭한 유서연이 나섰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다니고 싶었는데······.”
연하린은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힘없이 돌아서서 숙소를 나섰다.
숙소를 나서던 연하린의 눈에 저 멀리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누군지 확인한 연하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련주님?”
놀랍게도 호무련주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끝
“련주님을 뵙습니다.”
연하린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호무련주, 백리엽이 빙긋 웃었다.
“네가 연하린이로구나. 얘기는 많이 들었다.”
호무련주는 고개를 힐끗 돌려 연하린 뒤쪽을 살폈다.
“같이 온 아이는 안에 있는 모양이지?”
호무련주의 물음에는 왜 같이 안 다니고 혼자 나가느냐는 질문이 함께 담겨 있었다.
연하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응?”
호무련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지도 확인하지도 않은 듯하지 않은가.
‘사실은 사이가 안 좋은 건가?’
듣기로는 둘 사이가 굉장히 각별하다고 했다.
호무련주는 별 거 아닐 거라 여겼다. 저렇게 젊을 때는 가끔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내는 거 아니겠는가.
아마 조만간 또 붙어 다닐 것이다. 자신이 들은 얘기대로라면 말이다.
“일단 난 안에 있는 아이를 좀 만나고자 하는데, 넌 어쩌겠느냐?”
연하린이 안절부절못했다.
심정적으로는 호무련주와 함께 들어가 벽태산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한데 호무련주가 그를 방해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러지 말라고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자신이 어떻게 감히 호무련주에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전전긍긍하는 연하린의 모습을 본 호무련주가 빙긋 웃었다.
“불편하면 가던 길을 가면 되는데, 뭘 그리 고민을 하느냐.”
“그게 아니라······.”
연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련주님께서도 그분을 방해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호무련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저 말을 하려고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허어.”
호무련주가 나직이 감탄했다.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안에 있는 아이, 벽태산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걸 보고 나니 적지 않게 연하린이 탐났다.
‘우리 문량이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쉽구나.’
이미 정혼자가 있는 아이다. 그것만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손자인 백리문량과 이어주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아이였다.
호무련주는 빙긋 웃었다.
“내 경지가 낮지 않으니 절대 방해될 일은 없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아······!”
연하린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무련주는 굉장한 고수다. 천하를 통틀어 호무련주보다 강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제대로 마음먹는다면 벽태산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