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52)
그래서 그런지 혼백도 비교적 평범했다. 혼백에 깃든 영력도 평범했고.
의원이라서 치료 효과가 있긴 했지만, 일침괴나 천추신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벽태산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벽태산은 앞으로 좀 더 다양한 자들의 혼백을 태워보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증혼마공의 운용능력이 더 성장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지금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저 두 사람에게 결과를 알려줘야 한다.
벽태산이 씨익 웃으며 천추신의와 일침괴를 한 번씩 쳐다봤다.
“무승부다.”
“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벽태산은 두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
“굳이 따지자면 둘 다 수준이 떨어지니까 둘 다 패배했다고 보면 되겠군.”
“예?”
“무슨 그런······!”
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판결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벽태산이니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하여간 제멋대로 하는 건 천하제일이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수긍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벽태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기에 건 걸 둘 다 들어주도록 해.”
“예?”
“말도 안 됩니다!”
“정말?”
벽태산이 두 사람을 슥 훑어보며 묻자, 둘 다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나. 하면 하는 거지.
두 사람의 귓가에 나직하면서도 스산한 벽태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끝까지 확인할 거다. 그리고······ 또 한 번 날 두고 내기를 하면 어떻게 될지 기대해도 좋을 거야. 그러니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저질러라.”
벽태산은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탁.
방문이 닫혔고, 천추신의와 일침괴는 한동안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더럽게 무서웠다.
* * *
천추신의과 일침괴는 숙소 구석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마치 몰래 작당모의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뭐냐?”
“뭐가 말이오?”
“공자님 정체. 시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다. 그냥 말하기만 하는데 뭐 이리 무서워? 젠장.”
“분위기 때문이오.”
천추신의의 말에 일침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긴 하더라. 내공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기세를 세운 것도 아닌데 참······.”
천추신의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내가 웃기냐? 넌 안 무서웠어?”
“안 무섭긴. 난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렇소.”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공자님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한 것처럼 한 모양이구나.”
천추신의가 인상을 팍 썼다.
“에이, 씨. 그건······ 그렇긴 한데, 내가 말하는 건 공자님이 아니란 말이오.”
“공자님이 아니라고? 그럼 저렇게 무서운 사람이 또 있단 말이냐?”
천추신의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또 분위기를 잡고 그래?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우리 내기한 거 어쩔 거요?”
“어쩌긴 뭘 어째. 공자님이 비겼다고 하면 비긴 거지.”
“아니, 내 말은 일침공 어쩔 거냔 말이오.”
일침괴가 피식 웃으며 천추신의를 노려봤다.
“너 공자님 말씀 거역할 생각이냐?”
“그럴 리가. 나야 당연히 공자님 말씀 들어야지.”
“너부터 말해봐라. 시발 정체가 뭐야?”
“이 근처에 소리 안 나가게 막을 수 있소?”
기막을 쳐서 소리를 차단하라는 말이었다. 일침괴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야, 그걸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냐? 기다려 봐.”
일침괴는 인상을 쓰고 무언가에 집중했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후우. 이제 됐다.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진 못해도 이리저리 흔들려서 제대로 된 소리가 새 나가진 않을 거다.”
“재주도 좋소.”
“잔말 말고 빨리 말해봐. 정체가 뭐냐?”
“천마신교.”
“시발.”
괜히 들었다.
* * *
호무련주는 갑자기 집무실로 찾아온 총관을 보고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어제 처리해야 할 일이 제법 많았는데 아직 반도 못 했다.
어제 후기지수 모임에 가서 벽태산에게 말려든 결과였다.
더 괘씸한 건, 자기가 그러는 동안 벽태산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원하는 건 못 얻고, 농락은 당했고, 일은 못 끝냈는데, 잔소리할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련주님.”
“미안하네.”
“예? 갑자기 왜 사과를 하십니까?”
“어? 아니, 아닐세. 한데 자네 표정이 왜 그러나?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흑철방이 사라졌습니다.”
“흑철방? 사라져? 그게 무슨 말인가, 좀 알아듣게 자세히 설명해보게.”
흑철방은 의창에 자리 잡은 방파 중 하나였다.
무림문파라기보다는 이름 그대로 철방에 더 가까웠다.
질 좋은 무기를 생산하는 방파였는데, 호무련에 무기를 비롯해 다양한 물품을 공급해왔다.
“말 그대로입니다. 싹 사라졌습니다. 장원과 전각만 남고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도 물건도.”
호무련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부 사라졌다? 그들이 움직이는 걸 본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은 해봤나?”
“예. 한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확인한 때는?”
“나흘 전입니다.”
“나흘 전이라······.”
나흘 전까지 있었다는 건, 사흘 전이나 이틀 전, 혹은 하루 전에 사라졌다는 뜻이다.
사흘 전이면 후기지수 모임이 막 열린 시점이다.
“후기지수 모임 때문에 신경이 분산된 틈을 탄 건가? 한데 그들이 굳이 왜? 받을 돈도 있었던 걸로 아는데?”
장기간 거래해 왔기에 일단 물건을 꾸준히 공급 받고, 대금은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짜에 지급해왔다.
그리고 이번 달에는 아직 대금 지급 날짜가 며칠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자의적인 움직임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호무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조사는?”
“아직 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일은 없나?”
“조사 과정에서 위험할 게 뭐 있겠습니까. 진짜는 조사가 끝난 뒤부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호무련주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총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호무련주를 바라보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나?”
“그러고 보니 흑철방 사람들이 최근 몸이 안 좋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몸이 안 좋았다고?”
“예. 한데 병을 앓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고 평소보다 좀 심하게 피로를 호소하는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별 거 아니라고 여기고 대충 넘어간 모양이군.”
“예. 맞습니다.”
호무련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서탁을 톡톡 두드렸다.
생각을 끝낸 호무련주가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총관을 바라봤다.
“흑철방 주변을 조사해보게. 혹시 그와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는지.”
“예.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손님으로 온 두 의원한테 도움을 요청하게.”
“천추신의와 일침괴 말씀입니까?”
“병을 호소했다고 하니, 그 두 분이 나서면 좀 도움이 되지 않겠나?”
“바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호무련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무리했다.
“아, 그리고 두 분께 부탁하는 김에 조사단에 벽태산도 넣게.”
총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금벽상단 둘째 공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벽태산. 요구하는 거 있으면 어지간한 사항은 들어주고.”
총관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하지만 더 자세한 사항을 묻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갔다.
총관이 물러가자, 호무련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벽태산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서문덕이 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다.
‘고수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했었지?’
호무련주는 처음 그 얘기를 들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서문덕이 아니라면 웃기지 말라고 면박을 줬을지도 모른다.
한데 막상 벽태산을 만나고 나니, 서문덕이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대체 뭐야, 그놈?”
진짜 고수의 풍모가 느껴졌다. 내공은 하나도 안 느껴지는데 말이다.
* * *
벽태산은 흑철방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갔다.
호무련에 함께 왔던 모든 일행이 벽태산과 같이 이동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안내하는 호무련 소속 무사들이 호위하듯 진형을 갖추었다.
벽태산 옆에는 연하린이 나란히 걸어갔다.
사실 연하린은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호무련의 정식 의뢰를 받다니.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벽태산에게로 향했다.
최근 벽태산을 볼 때마다 놀랄 일이 생긴다. 얼마 전에는 호무련주를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다.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래서 이런 의뢰가 들어온 걸까?’
정확히는 천추신의와 일침괴에게 호무련이 정식으로 부탁한 사안이었다.
벽태산은 거기에 추가된 것일 뿐이고.
한데 막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호무련이 벽태산의 편의를 엄청나게 봐주고 있었다.
연하린은 뒤를 힐끗 쳐다봤다.
‘저들을 다 데려간다는데도 아무 말도 안하는 걸 보면 확실해.’
천추신의와 일침괴야 애초에 호무련이 부탁한 대상이니 그렇다 치고, 또 천경완과 유서연은 호위무사 명목으로 데려온다고 해도, 그 뒤를 따라오는 소소, 단영, 채월은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물론 벽태산은 그저 통보했을 뿐, 설명이나 변명 따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호무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통보를 받아들였고.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어느새 흑철방에 도착했다.
“여기가 흑철방입니다.”
안내를 담당한 무사의 정중한 말에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한 번 둘러볼까?”
벽태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끝
흑철방은 상당히 큰 규모의 방파였다.
거대한 연무장이 여러 개 있었고, 무기를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도 여럿 있었다.
또한 무구를 생산하는 대장간도 굉장히 많았다.
내부를 돌아보니 실제로 무림방파라기보다는 철방에 훨씬 가까웠다.
흑철방 내부에는 호무련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곳곳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열심히 조사 중이긴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지 다들 표정이 어두웠다.
벽태산은 안으로 더 들어갔다.
그러다가 멈춰서 지금까지 따라온 호무련 무사들을 쳐다봤다.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지?”
“예? 저희는 그저 호위와 안내를······.”
“이 안에서? 위험할 것도 안내를 받을 만큼 복잡한 것도 없는데? 혹시 감시하려고?”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벽태산은 더 말하지 않고 무사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것이 굉장한 압박이 되었는지,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희는 입구 쪽에 있겠습니다. 나중에 돌아갈 때 불러주십시오.”
무사들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벽태산은 멀어져가는 호무련 무사를 힐끗 쳐다보고는 천추신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거 전문이지? 좀 살펴봐.”
천추신의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성큼 나섰다.
“역시 공자님께서 제 진가를 알아봐주시는군요. 저한테 딱 맡겨 놓으시면 이 일을 벌인 놈들의 머릿속 깊은 곳에 감춰둔 것까지 싹 끄집어내겠습니다. 말이 나와서 얘긴데, 예전에 흑호방이라는 놈들이 있었습니다. 그놈들이 어땠냐 하면······.”
벽태산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절묘하게 호흡을 끊어 천추신의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턱짓을 했다.
“그만 떠들고 알아봐. 시간 없다. 아무래도 불청객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불청객이요?”
불청객이라는 말에 옆에서 가만히 벽태산을 지켜보고 있던 연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벽태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호무련주.”
연하린이 기겁하며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아이, 공자님! 련주님을 불청객이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그러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큰일은 무슨. 호무련주가 여기 오면 무슨 도움이 되겠어. 하던 일 방해하는 놈을 불청객이라고 해야지, 그럼 뭐라고 해?”
“아무리 그래도 련주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요.”
“뭐······ 제법이긴 하지.”
아직까지 기억에 남을 정도니 확실히 제법이긴 했다. 제대로 의지를 세운 사람은 생각보다 드무니까.
연하린이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호무련주에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한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벽태산이니 더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