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53)
연하린은 문득 드는 묘한 위화감에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벽태산이 그런 말을 했는데도 아무도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즉, 이런 상황에 익숙하거나, 아니면 진짜 벽태산이 한 말을 인정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연하린이 멍하니 있을 때, 벽태산이 말했다.
“안목이 제법이니까 배워두면 괜찮을 거다.”
그 말에 다들 천추신의를 따라갔다.
천추신의는 곳곳에 드러난 흔적을 통해 상황을 유추하는 법부터 시작해 흑철방 주변에서 모은 소문들까지 전해주고는 그걸 통해 뽑아낼 수 있는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 천추신의의 말에 집중했다.
설마 천추신의가 의술뿐 아니라 이런 재주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다들 천추신의와 함께 주변을 돌아보며 안목을 키워가고 있을 때, 벽태산은 좀 다른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천마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일단 자격을 얻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격을 얻은 뒤에도 피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천마가 되었다고 해서 바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었다.
천마가 되면 증혼마공을 익힐 자격이 주어지고, 그것을 익히면서 천마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해야 비로소 진정한 천마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천마가 될 때까지 흘린 피보다 천마가 된 후에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천마가 된 직후에 지금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여러 번 해결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이런 조사의 마지막은 언제나 모든 걸 박살 내는 걸로 귀결되었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이렇게 나와 살펴보니 옛날 생각이 물씬 났다.
천마가 되고서 처음 한 일이 천마신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던 협력 방파의 몰살을 조사하고 그 흉수를 찾아 박살 내는 것이었으니까.
벽태산은 천천히 움직였다. 바로 근처에 작은 연무장이 있었다.
내원 깊은 곳에 위치한 연무장인 걸로 봐서 흑철방의 주요 인물이 쓰던 연무장인 듯했다.
일침괴가 조심스럽게 벽태산을 따라갔다.
천추신의가 주목 받으면서 잘난 척 하는 꼴을 보기 싫어서 차라리 무서운 벽태산 옆에 있기로 한 것이다.
물론 벽태산이 항상 무섭지만은 않다는 걸 알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연무장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슥 훑어본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군.”
일침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바닥이랑 벽에 난 흔적을 봐라.”
일침괴는 벽태산의 말을 듣고 흔적을 살폈다.
바닥이고 벽이고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흔적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이거 혹시 검기로 낸 흔적입니까?”
“그래도 아예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구나.”
일침괴는 감탄했다.
검기를 이렇게 가느다랗게 뽑아서 휘두르는 건, 그리고 그걸로 이 정도 깊이의 상처를 단단한 돌에 새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침괴가 감탄하며 흔적을 살피고 있을 때, 천추신의가 일행을 우르르 끌고 들어왔다.
일침괴가 한 말을 들었는지 얼른 벽과 바닥에 난 흔적을 빠르게 살폈다.
“호오. 이거 그냥 검기를 검처럼 뽑아서 휘두른 게 아니라 채찍처럼 썼군요. 흔적이 이어진 모양으로 궤적을 추측하는 법을 알려줄 테니 다들 이리로 모여 봐라.”
일침괴가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러는 꼴을 보기 싫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또 따라와서 저러고 있으니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서 한 대 때릴까 말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벽태산이 말했다.
“검기를 저렇게 가느다랗게 뽑아서 채찍처럼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쉽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벽태산의 물음에 일침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흑철방 사람들이 알아서 몰래 빠져나갔단 말입니까? 굳이 왜 그랬을까요?”
벽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던 사람들 다 죽었다. 전부 죽었는지 몇 놈이 도망쳤는지, 사로잡아서 끌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최소 백 명이 넘게 죽은 건 확실하다.”
일침괴가 깜짝 놀라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벽태산이 담담한 눈으로 주위를 슥 둘러봤다.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느냐. 한둘 죽는 걸로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지독하구나.”
일침괴는 그 말을 듣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봤다. 하지만 별다른 냄새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코로 맡는 냄새가 아니다.”
일침괴가 머쓱한 표정으로 킁킁거리는 짓을 그만뒀다.
“자, 이제 생각을 좀 해보자.”
일침괴는 벽태산과 생각이라는 말이 참으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벽태산을 바라봤다.
“이런 흔적을 남길 정도로 강한 자가 있는 곳을 아무런 소란이나 낌새도 없이 싹 죽여 버리려면 어찌 해야겠느냐?”
일침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른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독?”
“정답이다.”
일침괴는 벽태산의 눈에 담긴 확신을 읽었다. 대체 왜 이렇게 확신하는 걸까?
꼭 독으로 죽였으리라는 법은 없는데 말이다.
물론 그게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인 건 맞지만.
“독에 대해서 좀 아나?”
“웬만큼은 압니다.”
“독마랑 비교하면 어때?”
일침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독마는 독에 관한 한, 천하제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연히 독마와 비교하면 자신이 몇 수는 떨어진다. 적어도 독에 관해서는 그렇다.
“독으로 독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일침괴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왜 그러십니까?”
벽태산이 주위를 슥 둘러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래도 독마가 끼어든 거 같아서.”
일침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그걸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독 냄새가 난다.”
“예?”
“그놈이 잘 쓰던 독 냄새가 난다고.”
일침괴가 황당한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일침괴가 어떤 표정을 짓든 관심 없다는 듯, 할 말을 이어갔다.
“한데 묘하게 거슬리는 냄새가 섞여 있어. 네가 할 일은 그걸 찾아내는 거다. 혼자서는 힘들 테니 저기서 떠들고 있는 놈을 데리고 같이 해.”
일침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일침괴와 천추신의는 갖은 방법을 다 써가며 주변에서 독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벽태산은 그렇게 일거리를 던져준 후, 느긋하게 자리를 떴다.
* * *
보통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곳을 조사하는 동안 호무련주가 직접 현장을 방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이 방문하면 오히려 일에 방해가 된다는 걸 알기에 호무련주도 되도록이면 자제했고.
그렇기에 난데없이 흑철방에 나타난 호무련주를 보고 다들 깜짝 놀랐다.
“련주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곳의 조사를 책임지는 적명단의 단주가 얼른 달려와 호무련주를 맞이했다.
호무련주는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럴 필요 없네. 다들 일들 봐.”
적명단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신의와 괴의를 뵈러 오셨습니까?”
호무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내가 그분들께 부탁을 좀 했지.”
“그분들이라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적명단주의 눈에 의구심이 깃들어 있었다.
아무리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자들이라지만, 의원들이 뭘 알겠는가.
“표정을 보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적명단주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저······ 그들이 왜 이리로 왔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의원에게 요청한 건 의원이 할 일이 필요해서였다.
“내가 일부러 전달을 안 했네.”
“예?”
호무련주가 씨익 웃었다.
“꼭 만나야 할 놈이 있어서.”
적명단주가 멍하니 호무련주를 바라봤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과 의원들에게 사정 설명을 안 한 것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아무튼 그건 내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지. 그러니 하던 일 계속 하게.”
호무련주는 흑철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사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벽태산 때문에 하루를 날리는 바람에 밀린 일이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오늘도 결과적으로는 벽태산 때문에 일을 또 미루는 셈이 되었다.
아마 이따 돌아가면 총관에게 그동안 미뤄뒀던 잔소리에 지금 것까지 더해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꼭 여기 오고 싶었다.
벽태산을 보고 싶기도 했고, 흑철방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흑철방에 대한 보고를 들은 순간부터 묘하게 거슬렸다.
한데 이 거슬림의 정체를 아직도 명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겸사겸사 벽태산도 보고 묘한 거슬림의 정체도 알아내고자 여기에 온 것이다.
적명단주는 안으로 들어가는 호무련주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뭣들 하나, 련주님 말씀 못 들었나! 하던 일 계속 해!”
그의 호통에 다들 후다닥 흩어졌다.
* * *
호무련주는 흑철방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깊이도 들어갔다.”
의원들을 데려왔으면 그에 걸맞은 일을 해야지, 여기까지 들어올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내 호무련주가 작은 연무장에 도착했다.
연무장 안에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연하린이 가장 눈에 띄었다.
호무련주는 연하린을 눈에 담고는 그 주위를 차근차근 살폈다.
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벽태산이 보이지 않았다.
연하린도 있고, 연하린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눈이 커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고, 천추신의와 일침괴, 천경완과 유서연도 있는데, 벽태산만 없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호무련주를 연하린이 발견했다.
연하린은 화들짝 놀라 호무련주에게 달려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구나. 한데······.”
호무련주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머지 일행들이 달려와 인사를 했다.
그 중에는 천추신의와 일침괴도 있었다.
“련주께서 여긴 어쩐 일입니까?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바쁠 텐데 여긴 왜 왔느냐는 질문에 호무련주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바빠도 이렇게 중요한 일을 대충 넘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두 분께 부탁드릴 것도 있고 해서 왔습니다.”
“혹시 그 부탁이라는 것이······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을 진맥하는 일입니까?”
호무련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여길 조사하다보니 주변에 여파가 미쳤을 것 같더군요.”
“여파라고요? 하면······.”
“예. 누군가 독을 쓴 것 같습니다.”
호무련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끝
호무련주는 천추신의, 일침괴와 따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번 사안은 자세히 들어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밖으로 얘기가 새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바로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천추신의와 일침괴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은 흑철방 주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지나치게 피로를 호소하는 자들을 찾아 세심히 확인했다.
어차피 호무련에서 요청하지 않았어도 했을 일이었다. 벽태산이 하라고 지시했으니까.
두 사람은 따로 흩어져서 주변을 탐문한 뒤 흑철방 정문에서 다시 만났다.
“너 독에 대해서 좀 알아?”
일침괴의 물음에 천추신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냥 아는 정도요. 사실 이런 건 우리 사부님이 전문인데.”
“사부? 너한테 사부도 있었느냐?”
“그럼 나 같은 인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것 같소?”
“누구냐?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 거냐?”
천마신교 소속이면서 일침괴가 알 만한 사람은 마의다.
마의는 의선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의원이었다. 그 정도로 의술과 무공 둘 다 굉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천추신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모를 거요. 우리 사부님이 워낙 낯을 많이 가리셔서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하시거든.”
“무슨 의원이 낯을 가려?”
“우리 사부님은 그래도 되오. 정말 대단하신 분이거든.”
“마의보다 더?”
“어······ 비슷하려나? 그냥 딱히 누가 더 위라고 하기 어렵소. 각자 분야가 워낙 달라서······.”
일침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야가 달라? 그럼 독에 정통한 거냐? 그런 사부한테 배웠는데 왜 넌 시원찮은 거냐? 독에 대해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누가 모른다고 했소? 의술에 비하면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 그거지. 그리고 우리 사부가 왜 독에 정통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뭐, 독에도 정통하신 건 맞지만, 진짜 대단한 건 그게 아니오.”
“그럼 뭐냐?”
천추신의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주변 좀 돌아보셨소?”
“독이 맞는 것 같다. 솔직히 공자님이 독이라고 그렇게까지 확신하지 않으셨으면 못 찾아냈을 것 같더구나. 아주 교묘해.”
“나도 같은 결론이오. 그럼 정말로 독마가 개입한 거요?”
“글쎄. 잘 모르겠다. 내가 독마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넌 독마에 대해 좀 알아?”
“당연히 모르오.”
일침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 파악은 좀 했느냐?”
“피로를 호소하는 자들을 확인해보니, 피곤한 게 아니라 몸의 기본적인 회복력이 바닥 난 거였소.”
“맞다. 회복이 안 되니 피로를 호소하는 거지. 그러다가 골로 가는 거고.”
“아무튼 결론은 그건데······ 결론까지 가는 길이 여러 가지였소.”
“그런 것 같더구나. 그래서 내가 몇 놈은 치료를 했다.”
일침괴의 말에 천추신의가 눈을 빛냈다.
“나 역시 그랬소. 결론에 도달하기 전이라면 치료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소. 문제는 정확히 진맥을 해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하는데, 웬만한 수준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소.”
“내 생각도 같다.”
거기까지 말한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의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