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55)
고작 한 달이었지만, 독마는 매일 어떤 독을 알려줘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하지만 웬만한 독은 시혈마나 마의도 다 알고 있었고, 결국 독마가 직접 제조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독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천추신의와 일침괴에게 알려준 독도 그 중 하나였다.
벽태산은 새삼 신기했다.
당시 독마가 독의 제조법을 말할 때, 자신도 함께 있었기에 그 내용을 전부 들었다.
하지만 관심이 없었으니 그걸 기억하겠다고 딱히 애쓰지 않았다.
실제로 듣자마자 다 잊었고.
한데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니 너무나 선명하게 모든 것이 기억났다.
당시 나눴던 대화, 그 말을 할 때 짓던 표정까지 싹 기억났다.
그러니 그 복잡한 독의 재료와 배합법을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이고.
그나저나 좀 궁금하긴 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벽태산이 독마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자신이 죽기 삼 년쯤 전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죽기 전 마지막 외유였다.
그 이후에는 오직 증혼마공에만 매달렸기에 천마를 본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때만 해도 독마는 예전과 아주 똑같았다.
제자를 노예처럼 부리는 것도, 변태였던 것도, 심지어 외모도 그랬다.
물론 천마를 대하는 태도는 많이 달라졌지만.
아무튼 그때의 기억만 생각하면 독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긴 하다. 그래도 당시의 분위기만 보면, 독마는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은 잘 먹고 잘 살 것 같았다.
원래라면 고작 이런 일로 호기심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원래의 천마가 아니라 벽태산이다.
굉장한 호기심이 생겼다.
벽태산은 자신의 이런 변화를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력과 생각을 정리한 벽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천경완과 유서연이 달려왔다.
“연하린은?”
벽태산의 물음에 유서연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후기지수 모임에 가셨습니다. 가서 모셔올까요?”
유서연은 벽태산이 연하린을 찾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다.
그동안 연하린만 계속 마음을 주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고 신경 쓰였는데, 그 꾸준한 노력이 결국 조금씩 벽태산의 마음을 허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서연에게 벽태산이 뚱하게 말했다.
“왜?”
“예?”
“모임 잘 하고 있을 사람을 왜 부르냐고. 그냥 둬.”
유서연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입을 벌리고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그녀의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천경완이 얼른 따라붙으며 물었다
“밖으로 나가십니까?”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추신의랑 일침괴는?”
“련주님을 뵈러 갔습니다. 아마 그 이후에도 계속 일정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 그 두 사람은 이제부터가 진짜 바쁘다. 독에 중독된 자들을 치료해야 하니까.
과정을 겪는 자들은 증상을 치료하고, 과정이 끝난 자들은 해독을 해야 한다.
하나하나 전부 증상이 다르고, 해독약을 쓰는 법도 전부 제각각이니 아마 머리깨나 아플 것이다.
벽태산이 막 숙소를 나서려는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열망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세 명의 시비가 보였다.
벽태산은 그냥 나가려다가 왠지 신경이 쓰여서 한 마디를 해줬다.
“수련이나 하고 있어라.”
세 여인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연하게 연무장으로 향했다.
숙소를 나서는 벽태산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 참. 이 무슨······.”
그런 벽태산을 조용히 따라가는 천경완과 유서연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살짝 맺혔다가 사라졌다.
* * *
벽태산은 의창의 번화가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천경완과 유서연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눈을 마주쳤다. 눈빛 속에 많은 대화가 오갔다.
결국 그 눈빛 대화의 패자가 된 천경완이 조심스럽게 벽태산을 불렀다.
“저······ 공자님.”
벽태산은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왜?”
“어디로 가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금옥루.”
“금옥루면 기루 아닙니까?”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창에서 제일 큰 기루라더군.”
천경완과 유서연의 안색이 나빠졌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도 기루에 갈 줄은 몰랐다.
“아직 해가 중천입니다. 아마 아직 문을 안 열었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걸어갔다.
천경완과 유서연은 서로를 한 번 또 바라보고는 얼른 벽태산 뒤를 따라갔다.
이내 그들은 금옥루에 도착했다.
의창에서 제일 큰 기루라더니 확실히 규모가 대단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장원의 정문에 금옥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벽태산은 당당히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 바깥쪽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흑도의 무인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아마 어설픈 무인이 수작을 부리다간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당할 것이다.
무인들이 흩어져서 차지한 위치가 상당히 교묘했다.
그리고 벽태산은 그 무인들 사이에 흐르는 미약한 기를 확인했다.
상당히 수준이 높은 합격진이었다.
벽태산을 따라 들어간 천경완과 유서연은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고는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봤다.
“영업을 시작하려면 아직 세 시진은 더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다시 오시지요.”
무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말했다.
그의 몸에 연결된 기의 흐름이 가장 많았다.
보아하니 다른 자들이 가진 내력을 이 자에게 어느 정도 몰아주는 것도 합격진이 가진 기능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여자 안으러 온 거 아니다. 백화루주 여기에 있지?”
무인은 벽태산의 말에 정중히 대답했다.
“여기는 금옥루입니다. 백화루주를 찾고자 하시면 백화루에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한에서 백화루주가 온 건 맞다. 그리고 그녀는 제법 높은 사람이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무한에서 찾아왔다면서 무작정 찾아오는 한량들도 많았다.
그 중에는 제법 대단한 가문의 자제들도 있었기에 무인은 벽태산이 두 명이나 되는 호위를 데리고 왔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하오문이 확실히 옛날 같지 않긴 하네.”
벽태산의 말에 무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상대는 여기가 하오문이라는 걸 알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무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 아쉬운 놈이 찾아와야지. 난 돌아갈 테니까 나중에 찾아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벽태산은 거기까지 말하고 냉정히 돌아섰다.
무인이 당황해서 붙잡으려 했지만, 손도 뻗지 못했다. 어느새 천경완과 유서연이 손이 나가는 경로를 막고 서서 사나운 기세를 뿌렸기 때문이다.
“으윽!”
무인은 손을 뻗던 자세 그대로 몸이 경직되어 더 움직이지 못했다.
천경완과 유서연이 천천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기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무인은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서 있다가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얼른 안쪽으로 달려갔다.
* * *
“여기가 하오문이었군요.”
유서연이 신기한 눈으로 제법 멀어진 금옥루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건 천경완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무한에 있는 백화루가 천금련의 돈으로 세운 하오문의 지부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의창에 와서까지 하오문 지부를 보고 나니 새삼 신기했다.
두 사람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벽태산의 등을 바라봤다.
“공자님, 저기가 하오문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하오문에서 알려줬으니 알지.”
“예?”
“그런 게 있다.”
암영보를 전해주는 대가로 천하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하오문 지부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하오문을 부리기로 했으면서 어디에 가야 써먹을 수 있는지도 모르면 안 되지 않은가.
“그나저나 하오문 수준 참······ 많이 저렴해졌구나.”
벽태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예전 벽태산이 천마이던 시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죽기 수십 년 전쯤에는 하오문의 정보력이 천마신교의 정보력에 버금갈 정도였다.
더구나 다루는 정보의 종류가 약간 달라서 가끔 천마신교에서도 하오문의 정보를 이용하곤 했다.
그때의 하오문이었다면 아마 벽태산이 금옥루 근처에 가기만 해도 가장 위까지 보고가 쫙 이뤄졌을 것이다.
그리고 벽태산이 정문으로 들어선 순간, 적절한 대접을 했을 테고.
“좀······ 빡세게 굴려봐?”
벽태산은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픽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귀찮게 그런 짓은 뭐 하러 하나.
“그냥 편안하게 살련다.”
끝
백화루주는 헐레벌떡 달려온 무사의 보고를 받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명백한 실수였다.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모두 벽태산 때문이었다.
벽태산이 이쪽으로 온다고 해서 그를 직접 지원하기 위해 온 것이다.
물론 이유가 딱 그거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의창에 있는 하오문 지부를 강화하는 것도 목적 중 하나였다.
여기에는 호무련이 있다. 강한 조직 근처에 있는 지부를 강화시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암영보를 얻었으니 그걸 통해 지부를 차근차근 강화할 예정이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여기였고.
사실 무림맹이나 흑련 쪽에 자리를 잡은 하오문을 더 먼저 신경 써야 하지만, 벽태산이 이쪽으로 온다는 얘기에 호무련에 먼저 온 것이다.
설마 벽태산이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 몰랐기에 미처 하오문도들에게 그에 관한 사항을 지시하지 못했다.
원래는 간단히 이곳을 정리한 다음 벽태산에게 따로 연락을 할 계획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벽태산이 여기에 찾아오는 것이 백화루주가 그린 그림이었다.
한데 그녀가 채 연락을 보내기도 전에 벽태산이 찾아왔다가 돌아가 버렸으니 이젠 그녀가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어쩐다······.”
벽태산이 머무는 곳은 호무련이다.
그리고 호무련은 기녀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가 거기에 들어가 벽태산을 만나려면 사전작업이 많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벽태산을 만나는 건 어렵겠다.
백화루주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리고 그런 백화루주를 하오문 의창지부장인 금옥루주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백화루주가 금옥루주를 보며 물었다.
“호무련과 관계된 인맥이 몇 이나 있죠?”
“많습니다. 목록을 가져올까요?”
“부탁해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금옥루주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백화루주가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꼬옥 쥐었다. 모든 인맥을 동원해 오늘 중으로 반드시 벽태산을 만나고야 말 것이다.
* * *
“야, 혹시 네놈 부하들 안 불렀냐?”
일침괴가 피곤에 절은 표정으로 천추신의를 보며 물었다.
천추신의는 일침괴와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불렀소. 그리고 불러봤자 여기 도착할 때쯤이면 일 다 끝나지 않겠소?”
“그야······ 그렇지.”
일침괴와 천추신의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내가 왜 평생 안 하던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 원래 진맥이고 치료고 하루에 한 명 이상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에이, 그러면 매일 환자를 봤어도 일 년에 고작 삼백 명 남짓인데, 경험이 그거밖에 안 되는 거요?”
천추신의가 또 살살 긁었지만, 일침괴는 대꾸할 기운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실력 얻기 전에는 하루에 백 명도 봤지. 나 정말 힘들게 의원 된 사람이다.”
천추신의가 입가에 비웃음을 달고는 피식 웃었다.
“고작 백 명으로 무슨. 난 이백 명도 본 적이 있소.”
“말이 백 명이지 내가 그걸로 끝이겠느냐? 난 삼백 명도 본 적이 있다.”
“거 증명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맙시다. 하루에 삼백 명을 어떻게 본단 말이오?”
“그러는 네놈은 어떻고? 이백 명은 말이 된단 말이냐?”
“난 진실을 말했을 뿐이오. 뭐 정확히 하면 이백 명에서 세 명쯤 모자라지만, 그게 그거 아니오?”
“뭐? 백아흔일곱 명이나 봤다고? 하루에?”
“하, 내가 지금도 그 날만 생각하면 이렇게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그러오. 정말 힘들었지.”
하도 진짜같이 말하니 일침괴도 긴가민가했다.
“그런 짓을 왜 한 거냐? 그거 환자한테도 안 좋다. 어설프게 치료하면 아예 내버려 두느니만 못해.”
“나도 하기 싫었소. 그래도 사부가 시키는데 어쩌겠소? 우리 사부가 공자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 장난 아니게 무섭거든. 시키면 찍소리 말고 하는 거 말고는 답이 없소.”
“대체 네놈 사부가 누구냐? 아무래도 아는 사람일 거 같은데······.”
“어? 어느새 다 왔네? 얼른 공자님께 보고나 드리고 좀 잡시다.”
“이놈이 또 말을 돌리는구나.”
“아차!”
천추신의가 호무련에 들어가다 말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또 뭐냐? 말하기 싫으면 그냥 말 하지 마라. 그딴 짓으로 시선 돌리지 말고.”
“아니, 그게 아니오. 우리 정말 중요한 걸 잊었지 않소. 이를 어쩌면 좋소?”
“뭐? 중요한 걸 잊······!”
일침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말 중요한 걸 잊었다. 오늘 치 의원을 안 데려온 것이다.
“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아무나 몇 놈 집어올까?”
“그게 될 거 같소? 해가 진 지 언제인데.”
결국 두 사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갔다.
제발 벽태산이 자신들을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잠들었기를 바라면서.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숙소에 도착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