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8)
벽태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 때려치워. 그리고 내 방 근처로 거처 옮기고. 네 방 옆에 저 녀석 방도 마련해.”
소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대답부터 했다.
“예. 아, 알겠어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시비에 관한 일은 배복당에서 총괄한다. 그러니 무슨 결정을 내리든 그곳을 통해야 한다.
하지만 벽태산이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줄 것 같지는 않았다.
소소는 이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정리했다.
“거처 마련하는 김에 천경완 것도 같이 준비해.”
“예? 천 무사님도 이쪽으로 오시는 건가요?”
“오라고 하면 올 거야. 뭐, 거기 있고 싶으면 그러라고 하든가.”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벽태산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둘 다 나가 봐. 소소는 안내 잘 해주고.”
소소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저······ 그럼 이 분은······ 시비로 일하시는 건가요?”
벽태산이 뚱한 표정으로 소소를 쳐다봤다.
“그럼 무슨 일을 할 건데?”
소소는 벽태산과 단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벽태산이 저런 말을 했는데도 단영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안 해봤을 것 같은데······.’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단영은 시비로 일하기에는 너무 예뻤다.
연하린보다는 좀 못했지만, 무한에서 단영보다 예쁜 여자를 찾으려면 발품 좀 팔아야 할 정도로 예뻤다.
‘풍파 좀 일으키겠네.’
벽태산의 위치가 확고하다면 모를까, 아마 찝쩍대거나 대놓고 희롱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리라.
‘하아. 나도 모르겠다.’
소소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단영을 데리고 벽태산의 방을 나섰다.
막 문을 닫으려는 소소에게 벽태산이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천경완한테 준비하라고 해. 해 떨어지면 바로 나갈 테니까.”
소소는 하마터면 ‘또요?’라는 말을 할 뻔했지만 끝까지 참아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처 얘기하면서 같이 전달할게요.”
소소와 단영이 밖으로 나가자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표정관리는 여전히 안 되네.”
소소는 굳이 말을 하지 않고도 표정만으로 모든 의사를 다 전달하고 갔다.
“저것도 재주야.”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 * *
천경완은 금벽상단과 상부상조의 관계였다.
검룡단의 무공을 봐주는 대가로 영약과 수련할 장소를 확보한 것이다.
그렇기에 검룡단주도 천경완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검룡단의 소연무장 하나를 천경완이 홀로 쓰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검룡단이 익히기 위해 금벽상단이 구하는 모든 비급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자격까지 얻었다.
천경완으로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천경완은 검룡단에게 정말 성심성의껏 무공을 가르쳤다.
자신의 진신무공을 전수하지는 못했지만, 그렇지 않은 일부 무공을 확실하게 전수해 주었다.
또한 향후 금벽상단에 위기가 찾아오면 천경완은 온 힘을 다해 금벽상단을 도울 것이다.
천경완이 생각한 건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무공을 완성하면 금벽상단을 떠날 생각이었다.
한데 변수가 생겼다.
벽태산이라는.
천경완은 검룡단의 소연무장에서 진이 빠지도록 검을 휘둘렀다.
새로 얻은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한데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벽태산이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잘못 본 줄 알았다고 하셨지.’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서 수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곱씹고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은 아직 제대로 벽을 부수지 못했다.
그리고 수련을 하면 할수록 그 생각은 점점 확신이 되었다.
아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아마 이런 느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묘하게 답답해서 검로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무기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럴수록 벽태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검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연무장을 누군가 기웃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천경완은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소소?”
“검룡단주님이 이쪽으로 가보라고 하셔서······ 공자님께서 해떨어지면 바로 움직이신대요.”
소소는 거기에 몇 마디를 덧붙이려고 했다.
평소와 달리 천경완의 표정이 너무나 어둡고 무서워 보여서 혹시나 벽태산에게 반감이라도 가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천경완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 게 보였으니까.
“그래? 그럼 얼른 가야지. 가자.”
천경완은 그렇게 말하고는 소소가 발을 떼기도 전에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녀는 멍하니 천경완의 뒷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니······ 지금 가는 게 아니라 해 떨어지면 간다고 하셨는데······.”
물론 천경완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이미 연무장을 벗어나 벽태산의 거처를 향해 달려가다시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렇게 표정이 다채로운 분이셨나?”
소소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벽태산은 천경완을 뒤에 달고 금벽장을 나섰다.
“오늘도 향화루로 가십니까?”
천경완의 물음에 벽태산이 그를 힐끗 쳐다봤다.
왠지 오늘따라 분위기가 달랐다. 말투도 표정도 태도도 전부 달라졌다.
“너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천경완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말씀하셨던······.”
벽태산은 손을 들어 중간에 말을 끊었다.
“됐고. 향화루 말고 다른 기루나 좀 소개해 봐.”
천경완은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벽태산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그럼······ 낙화루는 어떻습니까?”
“나야 잘 모르지. 그럼 거기로 가자.”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경완에게 앞장서라는 듯 턱짓을 했다.
열흘 전만 해도 벽태산이 이랬다간 천경완의 살기를 온몸으로 맞았겠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천경완은 낙화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계속 벽태산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하나라도 얻어야 한다는 강박이 심장을 꽉 옥죄었다.
벽태산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천경완을 보며 말했다.
“야, 막힐 때마다 기댈 거면 그냥 다 때려 치워.”
벽태산의 말에 천경완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풀 죽은 강아지처럼 어깨가 축 늘어졌다.
고작 그 한 마디에 심장을 옥죄던 강박이 사라져 버렸다. 한데 그 대신 자기혐오가 그 자리를 채웠다.
“오늘은 너도 가서 좀 놀든가.”
그 말에 천경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공자님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겠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지켜? 뭐······ 그래도 그런 태도는 마음에 드네. 그리고 넌 생각이 너무 많아. 나 때는 말이야,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온몸에 근력이고 진기고 전부 바닥나도 이 악물고 휘둘렀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천경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벽태산을 바라봤다.
“모,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모르겠지. 그렇게 해본 적도 없을 테니까.”
“그, 그럼 어째야 합니까?”
“어쩌긴 뭘 어째. 해봐야지.”
천경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벽태산이 저런 경험을 해봤을 리 없다. 그러니 농담인 것이다.
하지만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었다.
“자, 얼른 가자. 떨어진 꽃이라니 정말 기대되는구나.”
떨어진 꽃에 비유한다는 건, 구를 만큼 굴렀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럼 대체 혼탁한 영기가 혼백에 얼마나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겠는가.
벽태산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벽태산을 철통같이 호위하며 천경완이 앞장섰다.
────────────────────────────────────
이름은 거창하네
낙화루는 향화루와 마찬가지로 무한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루였다.
다만 규모가 달랐다.
향화루보다 낙화루의 규모가 훨씬 컸다.
제법 큰 장원 안에 열 채가 넘는 전각이 있었고, 손님의 등급에 따라 다른 전각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을 했다.
낙화루 정문에 도착한 벽태산은 그곳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무사를 슥 훑어봤다.
평범했다. 물론 벽태산의 기준이기에 다른 사람의 평가는 좀 다를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벽태산을 안내한 천경완 말이다.
“낙화루는 기루에서 자체적으로 무인을 키우고 있습니다. 한데 그 수준이 제법 높습니다.”
천경완의 어조에는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낙화루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자신에게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리고 금벽상단의 지분이 절반 정도입니다.”
제법 이름 깨나 날리던 무인이 낙화루의 주인이었는데, 그가 낙화루 지분의 절반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돈을 투자한 금벽상단이 가지고 있었다.
“무한 삼대 기루 중에서 금벽상단의 돈이 안 들어간 곳은 향화루뿐입니다.”
벽태산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낙화루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금벽상단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또 무한에서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딴 것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었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저 멀리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어이! 거기! 금벽장 꼬맹이!”
벽태산은 자신을 부른 것이 분명한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장원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오히려 그 외침에 반응한 건 천경완이었다.
천경완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서 거친 기세를 흩뿌리며 다가오고 있는 거한을 잠깐 노려봤다.
적룡방주 위적심이었다.
자세와 기세를 통해 실력을 가늠해봤다. 명백히 자신의 아래였다.
그래도 저런 놈과 얽히면 좋은 꼴 보기 힘들다.
천경완은 벽태산을 따라 낙화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벽태산을 불렀던 거한, 적룡방주 위적심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이놈들이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무시해?”
하지만 위적심도 굳이 금벽상단과 대립각을 세울 생각은 없었다.
금벽상단은 고작 적룡방이 상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무한 안에서 금벽상단과 싸우려면 최소한 흑혈맹은 동원해야 할 것이다.
흑혈맹은 무한의 흑도 방파가 모여서 만든 무한 흑도 연맹이었다.
물론 흑도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졌기에 잘 뭉치지 않고 사소한 이익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자주 싸웠다.
그러니 적룡방이 금벽상단과 싸움을 걸면 흑혈맹이 도와주기보다는 그 와중에 어떻게 하면 척수를 뽑아먹을 수 있을까 궁리할 게 뻔했다.
그러니 위적심도 굳이 상황을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된다.
방금 있었던 건, 원활한 협상을 위한 약간의 위협일 뿐이었다.
한데 보아하니 씨알도 안 먹힌 모양이었다.
위적심은 자신이 데려온 부하들을 슥 둘러봤다.
이놈들만 데리고 천경완과 싸우면 필패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나가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놈들만 싸우라고 하면 순식간에 박살 나겠지만, 자신이 도우면 얘기가 달라진다.
“들어가자.”
위적심의 말에 정문을 지키던 두 명의 무사가 길을 막았다.
“안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위적심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여기서 소란 피우는 건 괜찮고? 어디 내가 어떻게 소란 피우는지 한 번 겪어보고 싶어?”
위적심의 기세가 상당했지만, 무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안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알았으니까 비켜. 난 함부로 주먹 쓰고 그런 사람 아니야. 대화로 풀 테니까 걱정 말고.”
주먹 대신 주로 칼을 쓰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위적심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낙화루 안으로 들어갔다.
* * *
“시끄러운 놈이 들어왔네. 아까 그놈 누구야?”
“위적심이라고 적룡방의 주인입니다.”
“적룡방? 그건 또 어디야?”
“이 근처에 자리 잡은 흑도입니다.”
“흑도? 만혈문 같은 놈들이군.”
만혈문이라는 말에 천경완은 속으로 어이가 좀 없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만혈문은 흑도제일문이었다.
적룡방 같은 놈들 수백 군데가 몰려가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정말 강력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천마였던 벽태산의 기억에 남은 흑도 방파는 만혈문 정도가 전부인 것을.
또한 벽태산은 만혈문을 쓰레기 집합소 정도로 여겼다.
만혈문이 흑도제일문이라고 하지만, 그건 흑도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말이고, 실제로 그들이 가진 힘은 정파의 명문세가 정도였으니까.
그나마 저력은 명문세가에 미치지 못하니 벽태산이 굳이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벽태산이 만혈문을 칭할 때 가장 많이 쓴 표현은 기생충이었다.
그리고 인식도 딱 거기까지였다.
“이름은 거창하네.”
고작 저런 실력으로 적룡방이라니, 낯 뜨겁지도 않은가?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워낙 지저분한 놈들인지라······.”
“기생충들이 다 그렇지.”
벽태산은 거기까지 말하고 신경을 딱 끊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저 뒤에서 그놈이 또 부르지만 않았다면.
“어이! 거기 계집애 같은 놈! 내가 부르는 소리 안 들리냐!”
벽태산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죽고 나서 이 몸으로 깨어난 이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바로 이 외모였다.
사실 선이 약간 가는 편이긴 해도 여성스러운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묘한 매력이 깃들어서 다들 눈을 떼기 어려운 외모였다.
하지만 벽태산이 보기에는 계집애 같은 외모였고, 그 말이 정말 듣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