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85)
이래저래 이번 호무련 행은 얻은 것이 정말 많았다.
영약, 그러니까 반강시를 통해 얻은 양질의 영력도 많았고, 위협이 될지도 모를 암중세력의 존재도 파악했다.
또한 이렇게 새로운 무량보의 수련법까지 알아냈으니 정말 알찬 여행이었다.
보아하니 열흘 정도만 더 수련하면 끝내도 될 듯했다.
하지만 그걸 알려주지는 않을 셈이었다.
끝이 어디인지 모르고 달려야 더 힘들 테니까.
그리고 더 힘들어야 더 처절한 독기가 생길 테니까.
“슬슬 쓸만해지는구나.”
벽태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연무장을 떠났다.
연무장에서 나온 벽태산은 이번엔 천추신의와 일침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시끄러우니 멀리서 잠깐 지켜보기만 했는데, 저들은 여전했다.
일침괴가 계속 투덜거리면서 욕을 했고, 천추신의가 그걸 능수능란하게 받으면서 일침괴를 놀리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천약방에서 나온 두 의원은 거대한 솥을 자신들의 키만 한 주걱으로 열심히 휘젓는 중이었다.
솥에 든 진액이 워낙 끈적끈적해서 휘젓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은 힘든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천추신의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천추신의는 천추신단을 만들면서 가장 힘들고 괴롭고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을 모조리 두 의원에게 맡겼다.
솥은 모두 일곱 개가 있었는데, 두 의원은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일곱 개의 솥을 전부 휘저었다.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못 잔 듯했다.
눈이 퀭하고 눈 밑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걸 보면 말이다.
벽태산은 그걸 잠시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이제 남은 건 전각에서 일하는 시비들과 흑일, 흑이, 흑삼이었다.
벽태산은 다시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 앞마당에서 흑일과 흑이, 흑삼이 열심히 무언가를 나르고 있었다.
슬쩍 보니 넓적한 나무판을 비롯한 각종 자재였다.
보아하니 어딘가에 선반이라도 붙일 모양이었다.
그들은 벽태산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 나오셨습니까.”
벽태산의 몸으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시비가 붙었던 흑도 놈들이다.
흑도에서 놀던 가락이 있어 좀 건들거리기는 하는데, 그래도 잘 적응해서 요즘은 이곳 벽태산의 전각에서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온갖 잡일은 저들이 전부 도맡고 있었으니까.
벽태산은 그들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혼백이 많이 희석됐군.’
여기서 아름다운 시비들과 부대끼며 순하게 살다보니 흑도 생활을 하면서 혼탁해졌던 혼백의 검은 때가 많이 옅어진 것이다.
그래도 저놈들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서 좀 나았다.
다른 흑도 놈들에 비해 그나마 때가 덜 탄 것이다.
‘언제 날 잡아서 때를 한 번 벗겨줘야겠군.’
증혼마공을 통해 혼백을 한 번 뽑아서 세척하고 나면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시작이 어찌 되었건 이제 자신의 품에 들어온 녀석들이다.
당분간 밖에 나갈 일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어디 가서 얻어맞고 오기라도 하면 정말 짜증 날 것이다.
‘그건 곤란하지.’
벽태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하던 일, 마저 하라는 뜻이었다.
세 사람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전각으로 향했다.
그러자, 전각에서 화옥이 나타났다.
“이쪽으로 오세요.”
세 사람은 화옥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아마 화옥이 무언가를 부탁한 모양이었다.
화옥은 벽태산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공자님, 나오셨습니까.”
벽태산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고는 화옥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널 잊고 있었구나.”
“예?”
화옥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뭘 잊고 있었다는 걸까?
벽태산이 그런 화옥을 보며 씨익 웃었다.
“오늘 밤, 내 방으로 와라.”
화옥이 멍하니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휙 돌아서서 전각 밖으로 향했다.
그런 벽태산의 뒷모습을, 흑일, 흑이, 흑삼이 더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화옥은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심장이 어찌나 세차게 뛰는지 이러다가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화옥은 얼른 고개를 휘휘 저어 상념을 털어내고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이쪽이에요. 오후 중으로 끝낼 수 있죠?”
“물론입니다.”
흑일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제 이런 일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들은 방금 있었던 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 * *
배에서 내린 서도군은 무한의 선착장을 슥 둘러봤다.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이러니 고준광이 눈독을 들이는 것 아니겠는가.
무한은 물류의 중심지였다. 막대한 돈과 사람이 흘러다니는 곳이었기에 굉장히 중요한 도시였다.
한데 그 중요도에 비해 아직 제대로 진출한 문파나 무가가 없었다.
그러자고 약속을 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상황이 굳어져서 큰 무가나 문파들은 무한에 관심은 둬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무림맹이나 흑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뿐, 사실 암중으로는 다들 무한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않을 뿐, 정보를 수집하고 소문을 뿌리고, 가끔은 피를 보기도 하며 은밀히 활동 중이었다.
그 와중에 호무련이 무한에 지부를 세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무련의 순찰당주인 서문덕이 무한으로 왔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거래의 편의였다.
호무련이 앞으로 금벽상단과 거래하려면 무한에 거점이 있어야 편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큰 규모의 장원을 지으면서도 그 안에 상주하는 무사의 수가 얼마 안 되도록 조절하기로 했다.
물론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실제로는 무사가 아닌 상인이나 문사로 위장한 호무련의 무인들이 잔뜩 상주하게 될 테니까.
“하여간 호무련 그 어이없는 놈들 때문에 일이 또 복잡해졌어.”
원래 고준광은 서도군과 손을 잡으면 무한을 장악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닐 거라 여겼다.
한데 호무련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다.
호무련 하나만 끼어들었다면 얼마든지 대응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호무련이 먼저 물꼬를 튼 이상, 다른 문파나 무가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 역시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무한으로 진출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간단한 방법을 이미 호무련이 제시했다.
“하, 이럴 때 천금련이 멀쩡하면 써먹기 아주 딱 좋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천금련은 이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선착장을 둘러보고 걸음을 옮기는 서도군의 뒤로 탄탄한 몸을 가진 사내들이 하나둘 따라붙었다.
그들은 서도군이 데려온 그의 부하들이었다.
그렇게 무한의 번화가로 들어섰을 때, 서도군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서도군은 상대를 힐끗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자신도 모르게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고준광에게 빼앗긴 거나 다름없는 인재였다.
만일 저놈이 자신의 아래 있었다면 이번 의창에서의 일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요즘 어찌 지내나?”
서도군의 물음에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을 망친 죄로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고준광 그 사람이 많이 괴롭힌 모양이군.”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못 견딜 뿐이지요.”
서도군은 고개를 저었다.
혹시 데려올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떠봤는데, 역시나 안 된다. 더 해봐야 시간 낭비였다.
“그럼 인사는 이쯤 하고 일 얘기나 하세.”
사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시지요.”
“하오문을 찾게.”
사내가 고개를 들어 서도군을 바라봤다.
“하오문을 말입니까?”
“찾을 수 있겠나?”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원하시는 것이 하오문의 잔챙이들은 아니겠지요?”
서도군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맺혔다.
“피는 피로 갚아야지. 되도록 높은 자리에 앉은 놈들이면 좋겠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사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알아보겠습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린다는 점 이해해주시길.”
“여부가 있나. 다른 놈들도 아니고 하오문인데. 느긋하게 기다릴 테니 제대로 찾기만 하게.”
그렇게 말한 서도군이 빙긋 웃었다.
“그동안 난 무한을 어떻게 흔들지 고민해볼 테니.”
끝
화옥은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다.
어젯밤 벽태산과의 잠자리는 정말로 특별했다.
솔직히 말하면 기억은 희미했다. 거대한 쾌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만 어렴풋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제 분명히 느꼈다. 벽태산의 마음을.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드러운지, 또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혼백을 다루는 거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까지 화옥이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 감정은 기억과 마음에 확실히 남아 있었다.
‘이러니 다들 그러고 있는 거겠지.’
화옥은 단영을 비롯한 벽태산의 시비들이 왜 그렇게 벽태산만 바라보고 사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그녀들도 아마 똑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화옥은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은 다음 지그시 눌렀다.
자신의 안에 있던 단단한 무언가가 어젯밤의 경험을 통해 부서졌다.
알을 깨고 나온 것과 비슷했다.
화옥은 자신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은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다른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주는 무언가가 자신의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인지했다.
하지만 그게 무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이번에 깨졌다.
자신이 원래 알고 있던 것이 틀렸다.
안에 있던 단단한 무언가가 자신에게 그런 능력을 준 게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막고 있던 방해꾼이었다.
물길을 막고 있던 둑이었다.
그것이 벽태산과의 하룻밤으로 깨지고 부서진 것이다.
길을 막은 방벽이 거대한 불길에 깔끔히 증발해 버렸다.
화옥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개운한 적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을 떴다. 그리고 벽태산이 머무는 전각을 돌아봤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분을 모시고 있는 건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화옥은 다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의 여운을 만끽하는 건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일을 할 시간이 되었다.
벽태산을 위해서.
그녀는 금벽장을 나서서 백화루로 향했다.
* * *
백화루에 도착한 화옥은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오오, 이게 누구야? 우릴 버리고 배를 갈아탄 전 의창지부장 아니신가.”
조태주가 만면에 웃음을 가득 채운 채 다가왔다.
그는 벽태산에게 한바탕 깨진 후, 일단 차분히 정보를 모아서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백화루로 온 것이다.
벽태산이 하오문에 지시한 일이 무엇인지 확인했고, 어떤 방법으로 벽태산의 마음을 돌릴지 고민 중이었다.
한데 그 와중에 화옥이 여기에 온 것이다.
조태주는 하오문주의 아들인 만큼 하오문에 흐르는 대부분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가장 유력한 차기 하오문주였으니까.
다만 하오문의 모든 문도가 조태주를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조태주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도 제법 많았다.
물론 그걸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화옥 역시 조태주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백화루주도 그러했다.
조태주가 눈을 빛내며 화옥을 위아래로 훑었다.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예뻐졌네? 벽태산한테 붙어서 좋은 거 잔뜩 얻어먹은 모양이야?”
화옥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태주가 물었다.
“이젠 우리 하오문 사람도 아닌데 여긴 어쩐 일이신가?”
“공자님께서 지시하신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확인하러 왔어요. 그리고 최근 무한의 상황이 어떤지도 확인하고요.”
조태주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우리 하오문이······ 언제부터 벽태산 개인의 것이 되었지?”
화옥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태주를 쳐다봤다.
조태주는 화옥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봐, 의창지부장. 정말 우리 하오문과 등을 돌릴 셈인가?”
화옥은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조태주가 질투와 욕망에 휩싸여 있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이러지 말고 우리 손을 잡지. 앞으로 벽태산에 대한 정보를 당신이 잘 캐서 나한테 가져와. 암영보만 확실히 얻으면, 내 나중에 부문주 자리를 약속하지. 어떤가?”
화옥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나중에 문주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하지 않은가.
가능성이 높은 건 맞지만,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만일 이 상황에서 조태주가 큰 실책 몇 번만 해도 금세 실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보아하니 지금 그 실책을 범하는 중이었고.
화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태주가 그걸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씨익 웃었다.
“아까 말했던 정보는 저기 서탁 위에 있으니 알아서 가져가라고. 뭐······ 별 건 없는 듯하지만.”
화옥은 말없이 조태주가 가리킨 서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위에 어지럽게 놓인 서류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집었다.
이걸 그냥 벽태산에게 갖다 주면 안 된다. 확인과 정리는 필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