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95)
“이럴 때는 직접 만나보는 게 최고지.”
사람을 판단하려면 직접 눈을 보면서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그것이 진사홍의 지론이었다.
그는 벽태산을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흑련과 남궁세가, 제갈세가에서도 비슷한 결정을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
벽태산은 자신의 앞에 넙죽 엎드린 백화루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공자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확실히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백화루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벽태산이 그걸 받아 읽어보니, 하오문을 어떻게 장악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처음에 뭘 했고, 누굴 죽였으며, 누굴 살려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까지 전부 있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벽태산은 서류를 모두 읽은 후, 그것을 위로 휙 던졌다.
파라락 소리와 함께 서류가 허공에 나풀거렸다.
그러더니 각각의 서류에 갑자기 불이 붙었다.
화르륵!
순식간에 서류들이 재로 변해 허공에 흩어졌다.
백화루주는 그 광경을 넋 나간 눈으로 바라봤다.
세상에 누가 있어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을까?
“인상적이었다. 그래, 이제 하오문주가 된 건가?”
백화루주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이제 제가 하오문주입니다.”
벽태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사실 이렇게 될 건 예상했다. 백화루주가 당시 보였던 자신감이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하오문을 장악할 줄은 몰랐다.
그 방법과 과정을 방금 읽었지만, 하루 이틀 준비해서 되는 일이 절대 아니었다.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하오문을 먹어치우기 위해 꾸준히 준비했으리라.
그리고 하오문주가 되었는데도 벽태산 앞에서 저렇게 넙죽 엎드려 있다는 건, 이제부터 자신과 하오문은 벽태산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이제 남지 않았다.
그럴 만한 사람은 이번에 전부 사라졌으니까.
전대 하오문주를 비롯해 나이만 먹어 겁과 욕심만 덕지덕지 붙은 늙은 장로들까지.
벽태산은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휙 던졌다.
백화루주는 바닥에 닿다시피 한 자신의 이마 앞에 툭 떨어진 책자를 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상이다.”
백화루주는 책자를 지금 당장 펼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벽태산은 그녀의 심정을 확실히 읽고 있었다.
“확인해도 좋다.”
“가, 감사합니다.”
백화루주는 바닥에 이마를 갖다 댄 다음, 상체를 일으켜 책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역시나 암영보였다. 그것도 지금까지 받았던 것처럼 짤막짤막한 조각이 아니라 온전한 암영보였다.
그녀의 눈빛이 희열로 물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천추신의 만나서 약 받아가라. 그것도 상이니까.”
백화루주는 또 한 번 넙죽 엎드려 감사를 표했다.
그런 백화루주의 귀에 벽태산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들을 밟아버리기로 결정했다.”
하마터면 표정관리를 못할 뻔했다. 하지만 사실 처음 그 일에 개입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하던 일이었다.
“바로 조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암영보를 제대로 수습할 때까지는 천천히 해도 좋다.”
그 말에 백화루주가 감격한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사실 벽태산으로서는 암영보를 하오문이 제대로 소화해야 능력이 더 좋아지기 때문에 한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벽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백화루주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갔다.
이제부터 하오문은 무한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무한지부가 진짜 하오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백화루주는 두근거리는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백화루로 향했다.
* * *
금벽장에는 벽태산의 개인 연무장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연무장에 천경완이 서 있었다.
오늘은 천경완의 무공을 벽태산이 일대일로 지도해주는 날이었다.
천경완은 두려움 반, 기대 반의 복잡한 심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천경완은 벽태산의 기분이 제법 괜찮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확신에 가까운 답을 얻으려면 유서연을 불러와야 한다.
유서연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을 테니까.
천경완은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방심해선 안 된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길 거라 하셨었지?’
예전에 벽태산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천경완은 이미 그 비슷한 수련을 해왔다.
유서연과 목숨을 건 대련도 했고, 흔들다리 위에서의 무량보는 고통의 한계를 매번 넘나들었으니까.
그렇게 나름 결연하게 서 있는 천경완을 벽태산이 무심히 쳐다봤다.
보아하니 이제 무량보는 하루나 이틀 정도 더 하면 될 듯했다. 심기체가 거의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다. 방탕한 생활을 통해 몸이 망가지면 다시 무량보를 통해 심기체를 가다듬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정갈한 생활을 유지한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심기체가 조금씩 어긋나기 마련이었다.
이미 무량보로 심기체를 바로잡았을 비천단원들이 다시 무량보를 수련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처럼 말이다.
벽태산은 연무장 한가운데로 가서 창 하나를 바닥에 꽂았다.
푹!
창두가 안 보일 정도로 바닥에 들어갔고, 창대가 꼿꼿하게 서서 흔들거렸다.
천경완이 의아한 표정으로 벽태산과 창대를 번갈아 바라봤다.
“오늘 수련은 이 창대를 세로로 쪼개는 거다.”
“예?”
천경완은 순간 당황했다.
“그거만 하면 됩니까?”
“정확히 쪼개면 오늘 수련은 끝이다. 그냥 숙소로 돌아가서 쉬면 된다.”
“무, 무량보도 안 하고 말입니까?”
“물론이다.”
천경완의 눈이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오늘 공자님께서 내게 휴식을 주시려고 일부러 부르셨구나.’
그것이 천경완의 생각이었다.
벽태산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오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럼 바로 쪼개도록 하겠습니다.”
천경완이 창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검을 뽑았다.
아마 경지가 낮은 사람이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천경완이 언제 검을 뽑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새 천경완의 간격 안에 창대가 들어왔다.
그리고 천경완의 검이 그대로 창대의 끝을 향해 떨어졌다.
이건 무조건 성공이었다. 천경완은 그 결과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뻐억!
갑자기 들이닥친 옆구리의 고통이 아니었다면.
쿠당탕탕!
“크어어억!”
옆구리에서 시작한 어마어마한 격통이 온몸으로 파도치듯 퍼져나갔다.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몸에 머물렀다.
너무 아파서 호흡이 잘 되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앉아서 쉬라고 했느냐?”
천둥처럼 들려온 벽태산의 목소리에 천경완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억울함과 허탈함이 뒤섞인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벽태산은 처음 그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하긴, 자신이 창대를 잘라낼 때 벽태산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천경완은 오늘 수련이 얼마나 어려울지 감이 잡혔다.
‘저걸 어떻게 해!’
벽태산의 방해를 뚫고 창대를 쪼개라고? 자르는 것도 아니고?
그건 불가능했다.
천경완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배에서 격통이 일었다.
뻐억!
“크어어억!”
쿠당탕탕!
천경완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벽태산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니, 이쪽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데 이 격통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발끝으로 명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했다.
“쿨럭! 쿨럭!”
“생각할 시간도 있고, 여유롭네?”
천경완의 눈에 암담함이 어렸다. 하지만 어느새 몸은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 일어나 창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감각을 활짝 열어라. 그럼 할 수 있으니까.”
벽태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슴이 부서질 것 같은 충격이 왔다.
뻐억!
쿠당탕탕!
“크어어억!”
천경완은 고통을 참으며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창대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과연 저 창대를 쪼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벽태산은 의지가 꺾이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두르려다가 충격과 고통을 받으며 뒤로 날아가는 천경완의 모습에,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저걸 누가 잘랐더라?’
지금 이것은 호천대의 수련법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물론 이렇게 한 명씩 봐준 것이 아니라 호천대 전원이 힘을 모아서 창대 하나를 쪼갰지만.
아무튼 그때 성공한 놈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그놈은 벽태산이 일부러 호천대에서 내보냈다.
벽태산은 잠시 추억에 잠긴 채, 검을 내리치는 천경완의 옆구리를 가볍게 밀었다.
뻐억!
“끄아아악!”
금이 좀 간 것 같지만, 천추신의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확실히 뛰어난 의원이 있으면 편리하긴 하다.
“의원을 몇 명 더 들여야 하나?”
* * *
고준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앞에는 스무 명의 사내가 엎드려 있었다.
무한에서 도망쳐 온 놈들이었다.
원래는 이보다 더 많았지만, 몇 놈이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당했다고 한다.
사실 이놈들이야 다 사라져도 그만이었다. 어차피 아는 것도 거의 없으니 잡혀서 고문을 당한다고 해도 발설할 만한 정보도 없다.
게다가 이놈들에게는 금제가 가해져 있어서 발설하고 싶어도 발설이 불가능하다.
하오문 놈들이 가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을 쓴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이미 검증이 끝났다.
문제는 이놈들이 아니었다.
“서도군이랑 등자엽이 당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엎드린 자들 중 한 명이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그는 무한을 떠나기 전에 책임자가 말해준 내용을 더듬더듬 보고했다.
보고를 모두 들은 고준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번 일 한 방에 손해가 얼마야?”
반강시는 아직 좀 더 기다려 봐야 한다. 어쩌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무한을 도모하면서 들어간 자금이 만만치 않았다. 그건 이제 다 잃은 셈이다.
게다가 그 돈은 전부 고준광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못 빠져나온 놈들은 무림맹과 흑련에 당한 거라고?”
“예. 남궁세가와 제갈세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당한 이유는 무림맹과 흑련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너무 활발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고준광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꼬리를 달고 온 건 아니겠지?”
무림맹이나 흑련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신들을 대상으로 수작을 부린 자들이 그냥 무한을 빠져나가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꼬리가 붙긴 했습니다만, 따돌렸습니다. 그걸 떼는데 열 명을 썼습니다.”
열 명이 희생해서 그들의 추적 방향을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는 뜻이다.
“후우. 아무래도 거처를 한 번 옮겨야겠군.”
지금 이곳은 무한 근처에 있는 한천이라는 도시였다.
무한에 작업을 거느라 이곳에 근거지를 마련했는데,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고준광은 미련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가져가야할 짐도 많으니 서둘러야 한다. 오늘 중으로 짐을 다 챙겨서 떠날 계획이었다.
그렇게 고준광이 이사를 마친 다음 날, 무림맹과 흑련의 무사들이 그곳에 들이쳤다.
딱 한 발 늦은 도착이었다.
* * *
“공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벽태산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단영을 힐끗 쳐다봤다.
자신에게 올 손님이 과연 누가 있을까?
“무림맹에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무림맹?”
단영이 고개를 좀 더 숙였다.
벽태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림맹이 무한에 발을 들였다고 했을 때부터 조만간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일단 접객실로 모셨습니다.”
단영의 말에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옥을 불러.”
“예.”
무림맹에서 누가 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뭔가 의도를 가지고 온 자이리라.
그렇다면 혼자 만나는 것보다 화옥과 함께 만나는 편이 나았다.
화옥은 가끔 벽태산과 좀 다른 관점으로 사람이나 상황을 보곤 한다.
또한 첫 만남이라면 남들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