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101)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101화(101/184)
101화 자존심 전쟁(1)
– 안녕하세요. 회장님.
경기 전날 정태용은 김상식 회장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다.
– 요새 대표팀 활약을 보고 있으니 나도 축구를 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 그래그래.
– 다음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 경기인지는 잘 알지?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더비가 되는 경우는 아주 많았다.
클럽 축구 간의 더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 간의 더비도 상당한 편이었다.
그중에서 객관적인 실력과 무관하게 승패가 나는 더비가 있었는데, 한일 더비였다.
피파 순위 41위 일본과 57위인 한국.
객관적인 전력은 일본이 우위였지만, 한국이 이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일본과 붙으면 한국 선수들은 훨씬 많이 뛰고, 더 악착같이 괴롭혔는데, 일본 선수들을 이것을 가리켜 <기복이 심하다> 라고 평가하곤 했다.
일본 입장에선 한국이 수준 낮은 경쟁자였지만, 가위바위보마저 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은 그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차이점일 수도 있고.
국가대표를 지낸 정태용 역시 한일전만큼은 죽을 각오를 하고 뛰었던 사람이었다.
– 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 군 면제가 되었다고 선수들이 해이해지거나 그러진 않아?
– 하하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월드컵이니까요.
좋은 활약을 하면 유럽의 좋은 구단으로부터 이적 제의가 올 수 있는 가장 큰 기회였다.
– 혹시 몰라서 포상금을 걸려고 하네.
– 포상금이요?
– 그래 개인적인 포상금이긴 하지만, 축협에서 준다고 일단 이야기는 해놔.
김상식 회장이 제시한 금액은 일본을 이기고 4강에 진출하면 국가 대표팀을 구성하고 있는 선수와 스태프 모두에게 1억 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돈을 살포해서 축협 회장 자리를 땄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축협 회장이 되고 난 이후 김상식의 행보는 굉장히 긍정적이었으며, 축구계 발전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축협 자리를 이용해서 돈만 벌려는 심산을 가졌던 이전 회장들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많은 돈을 쓰고 있었으니까.
– 그런 조건까지 걸리면 선수들이 기를 쓰고 이기려고 할 겁니다.
– 좋아. 맘에 쏙 드는 결과를 기대해도 되겠지?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당시 진공청소기로 불렸던 조남일 코치와 다른 코치들이 선수들과 가볍게 다과를 하며 일본을 상대할 꿀팁을 전수하는 중이었다.
“일본 애들이 키는 작은데 순발력이 엄청 좋아. 특히 순간적으로 방향 꺾어 뛰는 게 장난이 아닌데, 예상해서 경로를 막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가 있어. 몸을 써서 막을 생각을 하지 말고, 머리를 써야 해.”
“그놈들 몸싸움을 더럽기 싫어해. 옆에 뭔가가 붙는 걸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신경질이 나도록 계속 달라붙어서 괴롭혀. 몰래 꼬집어도 되고, 간지럼을 태워도 되고.”
“패스는 빠르고 정교하니까 절대로 나서서 끊으려고 하지 마. 뒤로 물러서면서 처리해.”
“일본 공격수들은 전방에서 오는 패스를 받기 전에 멈칫거리는 경우가 있어. 그때 몸을 돌리지 못하도록 강하게 보디체크하면서 끊어!”
“몸싸움할 때는 죽일 듯이 덤벼. 점프 뛰고 피하게 만들어서 제대로 된 플레이를 못 하게 해.”
이번 경기 이기면 생각지 못한 포상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코치들도 눈에 불을 켜며 알고 있는 것들은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했다.
한 편, 준호는 김동현이 보내준 사진을 떠올렸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승현이의 사진.
이번에 유니폼을 꼭 받고 싶다는 소망을 건넨 아이.
최준호는 승현이가 경기장에 올 수 있도록 모든 걸 다 지원하였다.
‘참··· 그렇네.’
어린아이들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특히 그 아이가 축구를 좋아하고, 자신을 매우 동경하였으니 더 아쉬운 일이었다.
문득 뜻이 있는 선수들이 자기 돈을 활용해서 그런 불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재정을 후원하는 재단을 운영한다는 걸 생각해 낸 최준호는 잠시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
‘돈을 더 많이 벌면 쓸 곳도 많아지겠는데?’
조남일이 멍하니 있는 최준호를 보며 말했다.
“준호야 잘 듣고 있어?”
“그럼요. 코치님.”
최준호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또 생겼으니까. 아주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뛸 생각입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최준호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니시노 아키라 감독은 굳은 표정으로 선수단을 보며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은 경기다.”
이번 월드컵에서 100년 정도의 운을 다 끌어다 썼다고 할 정도로 일본은 가까스로 올라왔다.
대부분의 강팀이 일본을 축구 불모지인 아시아 국가라고 얕보고 제대로 준비를 안 해서 일격을 당했다면, 이번에 붙을 한국은 정말 골치 아픈 존재였다.
2017년 동아시안 컵에서 일본 대표팀을 이끌던 전 알제리 국가대표 감독 바히드 할릴호지치가 1-4로 한국에게 도쿄 대첩을 당하며 경질되었고, 그 자리를 메꾼 니시노 아키라였다.
큰 우려와는 반대로 그는 정태용 감독과 함께 아시아 축구의 신화를 쓰는 중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일약 스타가 되어버린 최준호가 없던 한국에게도 1-4로 패한 일본이었기 때문에 선수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우리와 경기할 때는 마치 사무라이 같다. 그들은 축구를 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러 나오는 것이지.”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이 한국에게 대패를 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일 더비의 특수성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감독이었으니까.
객관적인 전력 어쩌고저쩌고할 때부터 문제였다.
니시노 아키라 역시 국가대표로서 많은 경기를 뛰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이번 한일 더비를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상대가 전쟁하러 나오는데, 우리는 늘 하던 축구를 해야만 하는가?”
잘츠부르크 소속이며 이번에 최준호와 함께 리그를 뛰면서 엄청난 성장을 한 미나미노 타쿠미는 최준호와 양희찬을 떠올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 자식들 정말 장난이 아닌데.’
함께 뛰어봤기 때문에 그는 더욱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최준호는 괴물이야. 감독의 말처럼 우리가 절대 우세하지 않는 경기라고.’
“으라라! 우린 지금 최강의 적과 싸워야 해!”
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한 미나미노가 목청을 세워서 소리를 치며 니시노 아키라 감독이 만든 분위기를 띄웠다.
“맞다. 아마도 우리 관점에서 최강의 적이라고 할 수 있지. 그들만 꺾으면 우리는 4강으로 가는 것이다. 작년에 패했던 기억은 잊어버리고 우리는 수세의 입장에서 그들을 상대해야만 한다.”
기술적으로는 일본은 이미 한국을 앞섰다.
다만 신체적으로 여전히 한국에게 밀렸고, 투지와 적극성이 부족했다.
니시노 아키라가 선수들의 키를 키워줄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은 승부욕을 자극하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맹주다. 누구도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선수들이 주먹을 쥐고 고함을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그런 게 못마땅한 카가와 신지는 팔짱을 낀 채 한 선수를 떠올렸다.
‘작년만 해도 유소년 캠프에서 뛰던 녀석이 월드컵 스타가 되다니! 놀라운 일이야. 월드컵 끝나고 다른 팀에 가거나 아니면 팀 내에서 경쟁자가 되겠군.’
안 그래도 크리스천 풀리시치 같은 어리고 유능한 선수들 때문에 입지가 흔들리는 상황에 있는 카가와 신지였다.
최준호의 등장에 표정이 더욱 어두울 수밖에.
**
– 투두..투두..
피시트 올림피스키 스타디움(소치 아레나)
경기장 앞에 유려한 모습으로 늘어선 하얀 기둥이 매우 인상적인 아름다운 경기장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흰색 풍으로 만들어져서 푸른 바다와 대비되어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 중 하나.
45,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천장에 커다란 지붕이 있어서 폭우가 쳐도 관중들은 빗방울 하나 맞지 않고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또한 경기장과 관람석이 매우 가까워서, 귀빈석에서는 선수들의 땀방울을 하나하나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스타디움은 러시아 서남부 크라스노다르 지방에 있는 소치에 세워졌다.
소치는 캅카스 산맥 남쪽, 흑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휴양 도시였다.
이곳은 러시아에서 가장 따뜻한 곳으로 겨울에도 제주도보다 따뜻했으며, 한여름에도 30도를 넘어가지 않는 기후를 가졌다.
한일 더비가 열리는 소치의 오후에는 비가 잔뜩 내리기 시작했다.
배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지긴 했지만, 물 먹은 잔디와 진흙이 선수들의 체력을 더 빨리 갉아먹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가 있었다.
“빌어먹을. 비가 멈추질 않네요.”
민선아가 찡그린 표정으로 검은 구름을 노려보았다.
비가 오는 경기에서는 신장이 크고 무거운 한국 선수들보다는 신장이 작고 가벼우며 날렵한 일본 선수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확률이 높았다.
양창명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수첩을 꺼냈다.
“일본이 이번 월드컵에서 운이 좋네.”
“설마 한국이 지진 않겠죠?”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한국과 일본의 대진이 성사되는 순간 한국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여행객들이 4배 가까이 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 뉴스가 가짜가 아닌 게 평소보다 훨씬 많은 한국 사람들이 스타디움을 메우고 있었다.
월드컵 서포터즈들의 신명 난 꽹과리 소리에 그들은 떼창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 양창명의 눈에 들어왔다.
한국 팬들만 많은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일장기를 들고나온 일본 팬들의 숫자는 한국 팬들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다만 그들은 한국 팬처럼 소리를 지르며 떠드는 것이 아니라, 먹을거리를 보면서 담담하게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얼마 후.
경기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야유 소리와 환호 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최준호가 간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생긴 현상이었다.
“준호야!”
“오늘 화이팅!”
“최준호 선수 너무 좋아!”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에 최준호는 고개를 돌려 한국 팬들이 있는 곳을 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선수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반응하자 한국 팬들은 발광하듯 환호성을 하였다.
“쪽바리 새끼들 부숴버려!”
“해트트릭 가자!”
“오늘 경기 무조건 이겨야 해!”
소리를 지르는 팬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걸어가던 최준호는 한 곳을 보더니, 방향을 바꿔서 천천히 걸어갔다.
김동현이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모자를 쓴 아이와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준호가 자신에게 할당된 VIP 좌석을 그들에게 준 것이었다.
‘너구나?’
최준호가 자신을 보며 가까이 다가오자, 승현이는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여러 가지 감정에 휘말려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승현이?”
눈 밑에 다크 서클만 없었다면, 그리고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를 모자로 가리지 않았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천방지축 나이 때였을 것이다.
“···네! 저,..최준호 선..”
“형이라고 불러.”
최준호가 살갑게 웃으며 대답하자, 아이의 표정에 서려 있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형.”
“그래. 반갑다.”
최준호가 손을 내밀자 아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최준호는 아이와 짧게 악수하고는 말했다.
“오늘 내가 넣는 골은 다 승현이 너를 위해서 넣는 거야.”
“···진짜요?”
“그래.”
최준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무슨 뜻인지 알지?”
승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응!”
그리고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좀만 기다려.”
최준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고, 짧은 만남이 아쉬운지 승현이는 서서 계속 최준호의 등을 보기만 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줄게.
**
오후 3시.
월드컵 4강 진출 전.
8강 2경기 한국 vs 일본.
양 팀의 선수들은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늘어섰다.
그들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약해지는가 싶더니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그들은 눈꺼풀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일본에는 절대 질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을 가진 한국과 아시아 맹주의 존엄성을 갖춰야 하는 일본의 자존심 대결.
“오늘은 어째 말이 없다?”
공자철이 옆에 있는 최준호를 보고 물었고, 최준호는 짧게 대답했다.
“집중하고 있어요.”
평소보다 훨씬 더 검고 깊은 눈빛을 하는 최준호였다.
‘···오늘 이 녀석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이라도 낼 거 같은데?’
공자철은 농담 몇 마디 하면서 긴장 좀 풀어주려고 하려다가, 최준호의 분위기가 장난이 아닌 걸 깨닫고는 슬쩍 옆으로 물러섰다.
세네갈 출신의 주심은 마치 전쟁이라도 한 것 같은 눈빛을 한 양 팀의 선수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좀 힘들겠네.’
그리고는 시계를 보고는 휘슬을 입에 넣었다.
– 삐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