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103)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103화(103/184)
103화 자존심 전쟁(3)
전반전은 3-2
한국이 한 점 더 앞선 채 끝이 났다.
심상찮게 내리꽂던 비는 완전히 멈췄고,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화이토 톤의 운동장을 환하게 밝혔다.
“재밌군.”
석유가 펑펑 나는 관계로 특별한 노력 없이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인 사우디의 살만 왕세자는 축구를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한 때 맨체스트 유나이티드를 인수하려고 했었다.
그 인수 배경에는 맨체스트 시티의 구단주인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얀 아랍 애미리트 부총리의 자랑질이 문제였다.
공식 석상이나 사석이나 만나면 자신의 팀인 맨시티가 얼마나 잘하고, 어떤 선수를 영입했고, 같이 밥도 먹었다며 자랑질을 해대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가진 살만은 점점 배알이 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맨유를 인수하려고 했지만, 영국 축협에서 <영국의 구단은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다>고 철퇴를 내리는 바람에 무산이 되었다.
그런 그는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들끼리 8강에서 붙는다는 이야기에 전날 전세기를 띄워서 구장을 찾았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선수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최준호였다.
“저 21번이 16살이라고?”
살만 왕세자의 수행자이자 친구인 메흐르다드 고두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재까지 5골 7도움으로 득점은 3위, 어시스트 부문은 1위 입니다. 정말 엄청난 활약을 하는 중입니다. 모든 스카우트들에겐 원더키드로 통하고 있습니다.”
축구를 잘 아는 살만은 저 어린 나이에 이 치열한 월드컵 무대에서 그런 성적을 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잠시 의심을 했다.
“혹시 나이를 속인 게 아닐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과 1년 전만 비디오만 봐도 확연하게 어렸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너무나 어린 선수입니다. 세상을 놀랍게 하고 그 다음에 사라지는 유망주들이 워낙 많은 축구의 세계이다 보니 다들 한두 해 정도는 지켜볼 겁니다.”
“만약 저대로 성장한다면?”
“메시와 호날두가 견인했던 세계가 뒤바뀌겠지요.”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다는 소리지?”
“아마도. 큰 부상 없이 계속 성장한다면 그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는 선수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라···”
살만은 그런 선수가 있는 구단의 소유주가 된다면 만수르에게 입이 닳도록 자랑질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소가 저절로 들었다.
“이봐. 그거 다시 시작하는 게 좋겠어.”
“그러라고 하시면?”
“축구 구단 인수 말이야. 이번에는 자네 말처럼 펀드를 만들어서 인수를 시도해 보는 게 좋겠어.”
메흐르다드 고두시가 작년에 제안했던 의견이었지만, 살만은 영국 축협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는 분노에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버린 상태였다.
“시간이 꽤 걸리는 일입니다.”
“괜찮아. 돈과 시간은 넘치니까. 자네가 책임지고 할 수 있나?”
메흐르다드 고두시는 기회라는 생각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어떤 구단을 원하십니까?”
“만수르 녀석을 괴롭힐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어.”
**
전반전 일본은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투지 넘치게 플레이를 하였다.
거친 한국 선수들의 몸싸움에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악착같이 덤벼들면서 준결승 진출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음에도 스코어는 밀렸다.
비록 아쉽게 한 점 차로 진 전반전이었지만, 선수단들의 분위기는 오히려 좋았다.
막내인 미나미노가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었고, 니시노 아키라는 말을 아꼈다.
‘중거리 슈팅이 문제야.’
최준호의 중거리 슈팅은··· 참 골치 아픈 능력이었다.
양발을 모두 자유자재로 쓰는 데다가 워낙 영리한 선수다 보니 한 명의 수비수로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두 명이 양쪽을 틀어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박홍민이나 진신욱에 대한 수비가 헐거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단판 승부로 끝나는 토너먼트 경기에서 수비력을 보강할 수는 없었다.
동점을 만들던 역전을 하던 어떻게든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으니까.
다만, 월드컵 내내 4일마다 정말 힘든 경기를 치루었고, 그 피로도 때문인지 선수들의 지친 기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교체 또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전반전에 다들 정말 잘했으니까.
‘변화를 주지 않는 것이 독이 될까? 득이 될까?’
아직 많은 경험이 없는 니시노 아키라는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한 편, 정태용은 과감하게 전반전 교체를 감행했다.
왼쪽 측면에서 컨디션 난조를 보인 문재성을 빼고 양희찬을 넣었고, 수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유반석 대신 진성용을 넣었다.
4-4-2 전술에서 4-2-3-1 전술로 바꾼 것.
공자철을 공격형 미들로 놓고, 진성용을 박스 투 박스 놓고, 최준호를 밑으로 내렸다.
진성용이나 공자철은 공격적인 측면에서는 유럽 리그 어디에 가져다 놔도 손색이 전혀 없는 선수들이었다.
다만 수비에 대한 적극성도 기술도 부족하기 때문에 후방에서 그들을 받쳐줄 수 있는 선수가 있어야만 빛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몇몇의 선수들이 거론되었지만, 최준호의 등장으로 완전히 정리가 끝나버렸다.
‘수비도 잘하는 녀석.’
최근 급작스러운 피지컬 능력 상승으로 웬만한 선수들은 최준호를 혼자 뚫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늘 전반전만 봐도 최준호가 후방으로 내려와서 빌드업을 돕자 패스 미스가 확연히 줄었고, 위험한 상황이 덜 만들어졌다.
“우리에게 훨씬 유리한 경기다. 오늘 우리는 일본을 꺾고 준결승에 진출할 것이다.”
정태용은 그 생각에 확신이 있었다.
일본의 축구 스타일은 정교하고 세심한 패스 게임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런 선수들을 위주로 뽑다 보니 덩치가 큰 선수들은 많이 없었다.
물론 피지컬도 좋고, 기술도 좋은 선수들이 있긴 하겠지만, 일본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피지컬이 좋은 선수들은 애초부터 축구 대신 주목도 높은 유도, 스모, 야구로 쏠렸으니까.
그런 기본적인 불리함을 안고 가는 일본이었다.
그 불리함은 보통 후반에 드러나는데, 전반전 잘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전에 소나기 골을 먹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체력이 그만큼 좋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태용은 체력 하나만큼은 한국이 일본을 압도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니시노 아키라 감독이 체력 안배를 생각하는 선수 교체를 하지 않는다면, 예상외의 점수로 일본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후반전이 시작되고.
동점을 만들기 위해서 혈안이 된 일본은 후반 초반부터 달려들었다.
비는 아예 그치고, 잘 만들어진 축구장 배수 시설 덕에 그라운드는 뛰기 좋은 상태가 되었다.
기술 축구를 하는 일본 선수들에게는 좀 더 유리한 상황.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전반전과 다르게 답답하게 진행이 되었다.
공격 라인에 있는 박홍민과 양희찬이 내려와 사이드를 철저하게 커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에서는 최준호가 중심을 잡고 패스 게임을 하였고, 일본은 전반전처럼 인터셉터를 거의 할 수가 없었다.
한국의 점유율이 서서히 높아지는 후반 11분 무렵.
미나미노는 최준호가 방긋 웃자, 이를 악물었다.
‘하필!!!’
가장 상대하기 싫은 녀석과 맞붙게 되었다.
그것도 역습 상황에서!
“덤벼! 덤비란 말이야!”
미나미노가 으르렁거리자 최준호는 몸을 낮게 낮추고 미나미노를 등졌다.
“축구를 해야지. 왜 격투기를 하려고 해?”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공은 최준호의 힐킥에 미나미노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갔다.
“젠장! 난 네가 싫어!”
그 공을 진성용이 달고 뛰기 시작했고, 미나미노는 낭패한 표정과 함께 몸을 돌려서 진성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진성용은 일본 수비수들이 우르르 몰려와 반칙으로 끊으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최준호에게 백패스를 주었다.
그 공을 다시 받은 최준호는 지체없이 오른쪽 사이드로 롱 크로스를 날렸는데, 역습 시작하자마자 죽어라 뛰기 시작한 양희찬의 발밑에 뚝 떨어졌다.
‘나이쓰!’
역습 전에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며 한국의 골대 근처까지 뛰었던 일본의 왼쪽 풀백 유토 나카토모는 100m를 10.5초에 찍는 특유의 스피드를 살리며 양희찬을 추격하였다.
하지만 스피드로 따지면 한국에서도 박홍민 다음인 양희찬이었고, 간극이 좁혀지기는 했지만 따라붙을 수는 없었다.
양희찬은 완전히 프리한 상태에서 진신욱의 머리를 겨냥해 크로스를 올렸고, 진신욱은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하며 상대 압박을 버티고는 공을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 철썩!
이번에는 어딘가에 떨궈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헤더슛을 하였는데, 일본의 골문을 갈라버린 것이다.
진신욱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 번쩍 점프를 뛰며 포효를 하였고, 정태용 감독은 가장 필요했던 추가 골이 나오자 조남일 코치와 최두리 코치를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일본의 균열은 거기서 시작이 되었다.
4-2
2점 차를 만회하지 않으면, 일본의 월드컵 도전은 여기서 끝일테니까.
그 절박함은 일본의 장기인 아기자기한 패스와 세밀한 움직임을 오히려 막았다.
투박하게 뛰고, 투박하게 롱 크로스를 남발하고.
월드컵 내내 엄청난 성장을 한 강민재는 마치 통한의 벽처럼 일본의 공격들을 죄다 앞선에서 끊어버렸다.
후반 34분경.
강민재는 단순히 공을 끊는 게 아니었다.
그의 태클에 걸린 공은 높은 확률로 최준호에게 향했다.
최준호는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의 공을 향해 태클하는 카가와 신지를 보았다.
너무 뻔히 예측되는 태클이었고, 최준호는 가볍게 몸을 돌리며 공을 터치했다.
마르세유 턴.
카가와 신지를 순식간에 바보로 만든 최준호는 지체없이 강하게 공을 왼쪽으로 밀어 찼다.
일본의 수비수 사이를 뚫고 가는 스루패스가 라인 브레이킹을 하는 박홍민에게 연결이 되었고, 박홍민은 자신을 막고 있는 쇼지 겐을 헛다리 짚기로 무너트리고는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까지 드리블을 하였다.
그리고는 가와시마 골키퍼의 위치를 보고는 오른발 감아차기로 일본의 골대를 다시 한번 흔들어 버렸다.
5-2
박홍민이 달려오는 최준호를 보며 <찰칵> 세레머니를 하였고, 스타디움에는 한국 서포트들의 꽹과리와 함성으로 가득 찼다.
“아직 안 끝났어!”
“포기하지마!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카가와 신지와 미나미노가 고개를 숙인 일본 선수들을 향해 고함을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려고 전전긍긍하였다.
니시노 아키라는 뒤늦게 선수들을 교체했지만, 벌어진 점수 차로 인한 절망과 어떻게든 골을 넣어보려는 다급함이 뒤섞여 일본 팀플레이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후반 42분경.
미나미노의 무리한 슈팅을 강민재가 다리를 올려 컷 하였고, 진성용에게 향했다.
진성용은 바로 공자철에게 공을 넘겼고, 그 공은 오른쪽에서 오버래핑하는 양희찬에게 연결이 되었다.
유토가 달라붙었지만, 피지컬이 더 우세한 양희찬이 공을 잡고 버텼고, 일본의 페널티 에어리어로 한국 선수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양희찬은 한국 선수와 일본 선수들이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는 페널티 에어리어가 아닌 그 뒤쪽에서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는 최준호를 보았다.
잘츠부르크의 득점 루트 중 하나였던 컷백 기회.
양희찬은 저돌적인 돌파를 할 것 같은 움직임으로 유토를 흔들어 놓고는 최준호를 겨냥해 패스를 하였다.
“막아!!”
유토의 외침에 일본 선수 두 명이 허겁지겁 뛰어나갔다.
최준호는 그 짧은 시간에 승현이가 있는 곳을 보았다.
그리고는 공을 잡자마자 가볍게 툭 건드렸다.
두 명의 일본 선수가 최준호의 슈팅을 막기 위해 몸을 던졌는데, 최준호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그들 사이로 절제된 드리블을 하였다.
이어지는 슈팅 모션.
또 한 명의 선수가 달라붙어서 다리를 들었지만, 최준호는 바람에 흔들리는 저항 없는 갈대같은 기묘한 움직임으로 그 선수를 또 제껴버렸다.
그리고 최준호의 슈팅을 막기 위해 뛰어나온 또 한 명의 수비수마저 바보가 되었고.
최준호가 순식간에 네 명을 뚫었고, 가와시마는 근접거리에서 최준호와의 1:1 상황에 직면해 버렸다.
“뭐얏!”
가와시마가 깜짝 놀라 다급하게 두 손을 들었다.
최준호가 밀집된 수비수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상황은 가와시마는 비디오 분석으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훨씬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최준호는 가와시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가와시마의 다리 가랑이 사이로 공을 강하게 밀어 넣었다.
– 철렁!
해트트릭!!!
최준호는 골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지체없이 관중석 한쪽 스탠드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눈가가 빨갛게 변해있는 승현이를 보고는 담담하게 웃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세 개의 손가락들!
기자정신에 투철한 민선아가 그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카메라 줌을 잔뜩 땡겨서 계속 셔터 버튼을 눌렀다.
스타디움이 무너질 것 같은 함성에 양창명은 벌떡 일어나서 그런 최준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최준호의 경기는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봐왔고, 분석했지만 방금 같은 플레이는 처음이었다.
저렇게 밀집된 페널티 에어리에서 4명의 선수를 제치고 차분하게 골을 넣는 장면 같은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우당탕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세상 모든 것의 이치가 그렇듯 한 번이 어렵지, 한 번을 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쉬워지는 법이었다.
‘···또 성장한 건가?’
6-2.
남은 시간은 정규 시간 2분에 연장 시간 해봤자 5~6분 정도.
그 시간 안에 4골을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태용 감독이 벤치로 달려들어 모든 스태프들과 선수들과 얼싸안고 부둥켜안는 사이 니시노 아키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모든 건 내 잘못이다.’
참담한 마음에 그의 눈가마저 붉어지기 시작했다.
전의를 상실한 일본은 공격을 포기했고, 지친 한국 선수들도 무리하게 뛰지 않았다.
마지막 골이 터지기 전까지 자존심이 걸린 숨 막히는 혈전을 벌였던 치열한 양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주심의 휘슬 소리에 끝이 났다.
휘슬이 끝나자마자 양 팀 선수 모두 그라운드에 누워서 숨을 골랐다.
슬슬 체력의 한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최준호는 천천히 자신의 유니폼을 벗어서 정성스럽게 개었다.
그것을 들고는 한쪽 스탠드로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나 울었는지 승현이의 눈자위는 퉁퉁 부어 있었다.
최준호는 보호용 펜스에 허리를 대고 상체를 쑥 내밀고는 가지고 있던 유니폼을 승현이에게 내밀었다.
“형이 약속은 지켰다. 그치?”
그라운드에 있는 세계의 모든 언론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가 최준호를 향해 계속 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