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120)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120화(120/184)
120화 로마 원정전(3)
전반전 5분 정도의 탐색전이 끝난 이후에 도르트문트는 공격적인 운영을 하기 시작했고, AS 로마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조직적으로 내려앉아 공격을 막아내며 역습으로 가져갔는데, 두 팀 다 슈팅이 쉽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작년과 다르게, 데 로시가 최준호에게 꽁꽁 묶여서 날카로운 패스를 넣어주지 못하고 있었고, 도르트문트의 공격수들은 촘촘하게 간격을 줄인 채 두 줄 수비를 하는 AS 로마의 그물에 걸려서 좋은 움직임을 가져가질 못했다.
공격수들의 오프더볼 움직임이 문제가 생기니 최준호가 데 로시의 압박을 이겨 내도 스루패스나 치명적인 패스를 넣을 수가 없었다.
결국 치열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중원보다는 양 사이드로 공격 전개 빈도가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전반 24분경 균열이 갔다.
오늘 컨디션이 좋은 마르코 로이스가 플로렌치를 1:1 상황에서 뚫고 페널티 에어리어로 들어가 쇄도하는 엘링 홀란드에게 연결했고, 엘링은 슈팅을 차는 척 공을 한 번 접어서 앞에서 마크하고 있는 2명의 수비수를 따돌리고 골을 꽂아 넣었다.
“흥분하지 마! 자리를 지켜!”
안 그래도 라니에리 감독의 수비적 전술에 불만이 많은 AS 로마 선수들은 감독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계속 이야기하며 진정시키려고 했다.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축구.’
라니에리 감독은 EPL에서 레스터를 우승시키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더 이상 세계 축구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2010년 월드컵에서 조별 탈락, 2014년 월드컵에서 조별 탈락, 심지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는 본선조차 오르지 못했다.
아울러 AS 로마 역시 데 로시 한 명에게 공격을 의존하는 전술은 완전히 바뀌어야 했다.
다만 리그 중에 갑자기 부임한지라 시간과 여력이 부족했다.
‘데 로시가 날아다니면 승리하고, 그가 잠기면 득점하지 못하는 이상한 축구는 그만해야 하는데, 갈 길이 멀군.’
라니에리 감독의 눈에 도르트문트의 전력은 AS 로마보다 한참 위였다.
홈 경기 임에도 수비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고.
AS 로마가 아무리 공격적으로 나오려고 해도, 반드시 데 로시를 거쳐야 한다는 그 맹점이 불리함으로 작용하였다.
전반 36분경.
‘큭.’
작년 잘츠부르크에서 최준호와 붙었을 때만 해도 분명히 자신이 최준호보다 한 수 위였다.
이 영리한 선수는 자신을 도발하여 흥분하게 만들어 그 불리함의 간격을 좁혔고, 결국 자신의 퇴장까지 유도해 내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전혀 달랐다.
최준호와 부딪힐 때마다 균형을 잃고 밀려나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의 발에서 공격이 시작돼야 하는데, 패스만 오면 몸의 균형이 흔들려 제대로 된 퍼스트 터치도 힘든 상황.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활동 기간이 짧은 운동선수에게 1년은 정말 엄청난 시간이었으니까.
머릿속에서는 최준호의 압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떠올랐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 주심은 웬만한 몸싸움에는 휘슬을 불지 않는 타입이었고, 그걸 깨달았는지 최준호는 자신을 향해 더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걸었다.
– 틱.
최준호의 압박에 데 로시는 공을 제대로 받지 못해 튕겨 나갔고, 그 공을 따내기 위해서 어깨를 집어넣고 버텼지만, 집어넣은 어깨마저 튕겨내 버리며 공을 향해 달려가는 최준호.
“제길!”
자칫했다가는 역습하는 중의 역습을 당할 수 있는 상황.
데 로시는 몸을 날려 상대의 역습을 끊겠다는 의지로 태클했지만, 눈이 뒤에라도 달려 있다는 듯 최준호는 펄쩍 뛰었다.
작년보다 점프력도 좋아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데 로시의 발끝에 공이 살짝 걸렸지만, 공을 좀 더 앞으로 나가게 하는 수준이었다.
‘안돼···’
데 로시의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최준호는 루즈 볼을 잡고 드리블을 치기 시작했고, 역습을 전개하려던 AS 로마 선수들은 황급하게 몸을 돌려 본진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르코 로이스와 산초가 빠른 주력을 활용하여 사이드에서 미친 속도로 튀어 나갔고, 큰 덩치를 가졌지만, 그들 못지않게 빠른 엘링 홀란드가 센터백 두 명을 달고 골대로 향하면서, 견고했던 AS 로마의 수비 조직이 깨져버렸다.
“···21번은 누가 막을 건데?”
작년에 AS 로마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친 알리송이 리버풀로 이적하면서 로빈 올센이 그 자리를 맡았다.
AS 로마가 이번 시즌 리그에서 성적이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게 바로 수준 있는 골키퍼의 부재였다.
수비수들에게 강하게 지시해야 하는데, 이적생 로빈 올센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준호는 도르트문트의 수준 있는 공격수들이 수비수들을 달고 넓게 퍼지자 경이로울 정도의 쾌적함을 느꼈다.
‘잘츠부르크와는 또 다르네.’
뒤에서 AS 로마 선수들이 고함을 지르며 죽어라 따라붙고는 있지만, 최준호는 그들에게 따라 잡힐 것 같지 않았다.
‘그 사이에 스피드가 조금 더 늘었어.’
아마 2kg을 감량한 결과일 것이다.
순식간에 페널티 에어리어 앞까지 도착하자 상대 골키퍼가 발작하며 고함을 지르는 게 최준호의 눈에 들어왔다.
‘불편하겠지?’
언제든지 슈팅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엘링에게 달라붙은 센터백 하나가 튀어나오는 게 눈에 보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들.
최준호가 공을 왼쪽으로 툭 치고 나가자 센터백은 뒷짐부터 졌다.
아마도 자신의 슈팅을 염두에 두는 모양이었다.
최준호의 인지력은 빠르게 엘링 홀란드 쪽으로 향했다.
오늘 홀란드의 오프더볼 움직임도 좋지만, 그를 마크하고 있는 수비수도 컨디션이 좋은지 패스 길을 모두 차단한 상태였다.
거기에 무릎 상태를 보니 여차하면 오프사이드 트랩을 쓸 생각임이 분명했다.
‘이상하네. 오늘은 이런 잡생각을 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건가?’
축구를 보는 시야가 조금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최준호는 슈팅하는 척 왼발을 휘둘렀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수비수가 발을 드는 것을 보고는 그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툭 밀었다.
속았다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최준호가 한쪽 눈을 찡긋해주고는 그가 휘두른 손을 피해 공을 쫓았다.
로빈 올센은 페데리코 파시오의 가랑이 사이로 굴러오는 공을 보며 반사적으로 뛰어나갔다.
자신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더 빨리 굴러와야 할 공이 점점 더 느려졌다.
‘역회전?!’
– 뻥!
로빈 올센의 손보다 최준호의 오른쪽 발이 먼저 공에 닿았고, 최준호의 오른쪽 발등에 맞은 공은 골대 구석으로 빨려가 버렸다.
– 철렁!
전반에 엘링 홀란드에게 첫 골을 먹은 후 더 격렬해졌던 로마 팬들의 입은 순식간에 닫혀 버렸다.
프랜차이즈이자 AS 로마의 황태자 데 로시에게서 공을 탈취하고, 30미터를 드리블을 치고서는 달려드는 센터백을 따돌리고 심지어 골키퍼보다 먼저 공에 도착해서 슈팅을 만들어 버렸으니까.
단 한 명의 선수에게 이렇게 탈탈 털리는 건 로마 팬들에게도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조용해진 스타디움의 한구석에서는 오히려 ‘초이’를 연호하는 소리가 커졌다.
그들은 다름 아닌 AS 로마의 영원한 앙숙인 SS 라치오 팬들이었다.
최준호는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뛰어가며 팔을 번쩍 올려 기쁨을 표시하다가 AS 로마 팬들이 자신을 향해 눈을 쫙 찢는 행위를 하는 걸 보고는 옆줄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황금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유니폼을 입은 AS 로마 팬들을 향해 자신의 두 눈을 쫙 찢었다.
그리고는 기다란 혀를 빼서 날름거렸다.
‘눈 찢어진 게 어때서? 눈 찢어지면 안 되는 일이야?’
**
라니에리 감독은 스태프들과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누는 마르코 로제를 보다가 갑자기 엄청난 야유가 쏟아지자 고개를 돌렸다.
최준호의 도발에 화가 난 AS 로마 팬들이 엄청난 야유를 쏟아내며 물병과 음식물을 경기장에 던지고 있었다.
AS 로마 전광판에는 방금 최준호가 한 세레머니가 흘러나왔는데, 라니에리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타성을 갖춘 친구로군. 그런데···’
방금 21번의 플레이는 뭔가 좀 달라 보였다.
마치 최준호 혼자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플레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전성기의 메시가 보여주었던 그런 느낌이었다.
‘설마. 결이 다른 선수인데 그럴 리가 없겠지?’
이 챔피언스 리그 경기는 분명 중요했지만, 라니에리 감독은 6개월짜리 임시 계약직 감독이었다.
지휘봉을 잡은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AS 로마가 리빌딩이 필요한 팀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주축이 되는 선수들이 노쇠했고, 데 로시는 무려 37살이었다.
노련미는 있겠지만, 폭발적으로 달려드는 젊고 유능한 선수들을 상대하기는 버거워 보였다.
방금이 그런 상황이었고.
데 로시는 밀렸고, 페데리코는 민첩하게 방어하지 못했다.
‘차라리 리빌딩이 필요하다는 걸 구단과 팬들이 깨닫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2골이나 먹었지만, 라니에리는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수석코치를 불렀다.
“선수들에게 지시해.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수석코치는 꽤 당황한 눈치였지만, 감독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한 편, 르네 마리치는 굉장히 흥분한 표정이었다.
“방금···초이의 플레이 봤어?”
스태프와 기쁨을 나눈 마르코 로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이더군.”
“엘링도 골대 앞에서 초이처럼 차분할 수 없었을 거야.”
그건 르네 마리치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고, 마르코 로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 놀라운 선수야.”
**
2골이나 뒤진 AS 로마 선수들은 <마음대로 해봐> 라고 고삐를 풀어준 라니에리 감독의 지시에 보답이라도 하듯 44분경 또 골을 먹고 말았다.
패배하면 챔피언스 리그 16강 진출에 빨간불이 켜질 수 있다는 절박함은 선수들을 더 많이 뛰도록 하는 원동력이지만, 그 다급함 때문에 세밀한 터치와 기술이 거칠어지기 마련이었다.
2골을 넣은 뒤 마르코 로제의 지시에 따라 라인을 내린 도르트문트를 압박하던 AS 로마.
윙어인 윈데르는 수비수를 돌파하여 에딘 제코에게 크로스를 올렸다.
오늘 에딘 제코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김우영은 이를 악물고 에딘 제코와 몸싸움을 벌였다.
‘미치겠네!’
이 단어가 오늘 경기를 대변하는 에딘 제코의 심정이었다.
오늘 김우영의 볼 터치는 10번 이하일 정도로 온볼 플레이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지만, 에딘 제코를 그야말로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중이었다.
193cm에 83kg의 체중이지만 북유럽의 DNA를 물려받아 유럽 리그에서 몸싸움을 가장 잘하는 스트라이커였지만, 196cm에 90kg에 육박하는 김우영에게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프리시즌 중에는 대다수의 보도진들이 저 선수를 과연 1군 리그에 넣어야 하나? 싶은 정도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지만, 분데스리가의 수준 있는 경기에서 경험을 쌓으면 그야말로 고속 성장을 하였다.
두 덩치가 부딪히는 육중한 소리가 흘렀고, 김우영은 1cm 차이로 에딘 제코보다 먼저 공을 머리로 건드렸다.
단순히 머리로 건드린 것이 아니었다.
센터백 단짝인 마누엘 아칸지의 위치를 머릿속에 넣어둔 것이었다.
김우영이 에딘 제코와의 경합에서 떨군 공을 아칸지가 받았고, 그는 주저 없이 한쪽을 향해 강하게 찼다.
그러니까 이미 약속된 플레이였다.
김우영이 공을 떨군 순간 최준호는 볼 것도 없이 뛰기 시작했고, 공의 행방에 시선이 쏠렸던 데 로시는 최준호가 빠져나가는 걸 인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최준호가 뛰기 시작하자 엘링 홀란드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는데, 마뉴엘 아칸지가 찬 공이 최준호에게 연결이 되었고, 최준호는 완벽하게 프리한 상황이었다.
그는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하였고, 수비수를 한 명을 달고 뛰어가는 엘링 홀란드를 향해 정말 놀라운 스루패스를 넣었다.
엘링은 택배처럼 온 공을 정교한 스윙으로 슈팅을 때렸고, AS 로마의 골대를 또 흔들어 버렸다.
미칠 듯이 기뻐 날뛰는 SS 라치오 팬들이 AS로마 팬들을 조롱하는 플래카드를 들었고, 엘링 홀란드는 그 특유의 요가 자세 세레머니가 아니라 아까 최준호가 했던 세레머니를 그대로 따라 했다.
자기 눈을 찢고는 혀를 날름거리며 터치라인 근처로 뛰어갔다.
“나도 눈 찢어졌다. 이 머저리 자식들아!”
이탈리아 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노르웨이 언어로 고함을 치며 놀려댔고, AS 로마 팬들은 경기가 잠시 중단될 정도의 음식물과 물통을 투척했다.
그리고 빈자리 하나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찼던 스타디움에 빈자리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실망한 로마 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단순하게 실점을 많이 한 게 아니었다.
도르트문트에 완전히 눌려서 정말 엉망진창인 경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엘링 홀란드의 골이 들어가자마자 라니에리 감독은 굳은 얼굴로 수석코치를 불렀다.
“선수 교체. 데 로시 빼고 크리스 넣어.”
“···전반전 끝나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저 친구는 지금 그라운드에서 아무 쓸모가 없어. 지금 당장 바꿔.”
크리스.
그러니까 브라얀 크리스탄테는 아탈란타에서 완전 이적 조항을 가지고 온 23살의 젊은 임대 선수였다.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온 수석코치는 라니에리 감독의 의중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황태자···다니엘레 데 로시의 시대도 저무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