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121)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121화(121/184)
121화 로마 원정전(4)
아탈란타에서 온 임대생으로 팀 내에서는 3옵션 정도로 취급받던 브라얀 크리스단테는 제대로 된 준비 운동도 못하고 투입되었다.
‘전반전 끝나고 교체해도 될텐데, 왜 지금하지?’
데 로시가 벤치로 가서 라니에리 감독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물통을 차는 걸 보고는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일단 나와서 좋긴 한데, 3-0으로 지는 상황이었고 하필이면 상대가 최준호였다.
팀 훈련을 할 때 데 로시의 모습에 감탄하며 그를 멘토로 삼았던 크리스는 데 로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최준호를 상대로 얼마나 할 수 있을 지 감이 오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프로선수였고, 빠르게 마음을 다 잡았다.
‘어쨌든 기회다.’
크리스는 도전자의 마음으로 부지런하게 최준호를 따라다녔다.
선수들은 성향같은 것이 있는데, 어떤 선수들은 마치 피크닉이라도 온 듯 설렁설렁 뛰다가 결정적인 찬스에 모든 에너지를 몰빵하기도 하고, 어떤 선수들은 쉼 없이 뛰어다니기도 했다.
전반전 끝날 때까지 단 5분이었는데, 크리스는 자신의 숨이 벌써 찬다는 걸 깨달았다.
최준호가 끊임없이 뛰어다닌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데 로시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실수가 잦아지는 이유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하게 깨달았다.
기술적인 능력이나 정신적인 능력은 최고조이지만, 그의 신체적 능력은 35세 이후 급강하하기 시작했으니까.
‘···지친 거였어. 하지만, 난 좀 다르지. 다른 건 몰라도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거든.’
최준호는 브라얀 크리스단테라는 선수를 전혀 몰랐다.
이번 전술팀에서도 경기에서 그가 나올거라는 언질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러니 자신을 마크하는 선수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전반전 2분여 정도 계속 뛰어다니며 절대 무리하지 않고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봤다.
‘흠. 이 녀석은 혹시 하이먼 민스키 법칙에 대해서 알까?’
그러나 최준호는 그런 모습을 전반전 끝날 때까지 보여주었다.
전반전 종료 후에 교체해도 될 선수를 이렇게 교체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다.
감독이 마음에 안드는 선수에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명확하게 보여줄 때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부임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감독이 핵심 선수이자 주장이며 AS 로마 팬들의 정신적 기둥인 황태자를 향하여 저런 행동을 하는 건···
‘경기를 포기해도 될만큼 절박한 사항이 있다는 뜻이지.’
최준호는 마치 보라얀 크리스단테 때문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중앙에서 공을 받아 적시적소에 공을 배급하는 역할만 담당하였다.
추가시간 포함하여 7분 동안 최준호를 꽁꽁묶었다고 생각한 크리스의 자신감은 엄청나게 올라갔다.
‘데로시도 못한 걸 내가 하고 있어. 생각보다 내 실력이 괜찮은 게 분명해. 어쩌면 이 경기를 통해서 날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겠어. 데로시를 뛰어넘을 수 있어!’
전반전이 끝나고 라니에리 감독은 아무런 전술의 변화를 주지 않았고, 마르코 로제 역시 전술 변화를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선수들의 집중력은 최고조였고, 후반전에도 출격하여 상대방을 무참히 발라버릴 기색이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후반전.
전반전에 수집한 3개의 벌꿀을 막겠다는 꿀벌들과 그걸 빼앗아먹으려는 늑대들.
나이든 늑대들이 조심스럽게 공격을 전개하였지만, 젊은 늑대들이 조심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새로 나온 어린 늑대는 후반전 10분이 되었을 때 자신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별 거 아닌데?’
최준호를 그렇게 생각하자, 수비와 빌드업에 신경썼던 크리스는 최준호를 상대로 개인기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데로시 정도의 공 다루는 기술이라면 그의 공을 뺏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붙어서 진로를 방해하거나, 움직임을 봉쇄하겠지만 크리스의 공 다루는 기술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뻔히 어디로 칠지 최준호의 눈에 보였다.
하지만 최준호는 공을 뺏는 것이 아니라 거친 몸싸움을 벌여서 파울로 끊어 버렸다.
그의 공을 뺏어도 경계심 많은 늙은 늑대들이 너무 후방에 많이 포진해 있었고, 결정적인 득점 기회로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반전에 데로시의 체력을 빼놓기 위해서 많이 뛰어다닌지라 체력 회복 시간도 좀 필요했고.
크리스 덕분에 모든 것이 착착 되고 있었다.
‘확실히 나한테 밀리고 있어.’
크리스단테는 확고하게 생각의 매듭을 묶어버렸다.
자신이 최준호보다 더 뛰어나다는 그런 생각.
의심많은 늑대들도 최준호가 크리스에게 밀리는 듯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자 의심을 풀고 라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선수 교체가 제대로 맞아 들어간 모양인데? 크리스가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수석코치의 말에 라니에리는 오히려 표정을 굳혔다.
브라얀 크리스단테의 능력과 폼에 대해서는 라니에리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럴까?”
라니에니는 대답으로 의구심이 가득한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저 녀석 뭐지?’
선수보는 눈이 뛰어난 라니에리는 최준호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후반 17분 경 적중했다.
기고만장해진 크리스가 최준호를 상대로 어설픈 개인기를 펼쳤는데, 마치 공만 낚아 채듯 깔끔하게 스틸을 하였다.
문제는 AS 로마가 라인을 너무 끌어올린 나머지 뒷공간이 너무 넓다는 것이었고, 공격수가 한 명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근처에 있던 마눌라스가 급하게 달려들어 공격 전개가 되기 전에 파울로 끊으려고 했지만, 영리한 최준호가 공을 한 번 접어서 마눌라스의 태클을 피하고서는 왼쪽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마르코 로이스를 향해 스루패스를 넣었다.
최준호와 마눌라스가 빠진 상황에서 도르트문트는 공격수가 3명 수비수가 2명이었고, 마르코 로이스는 여유있게 반대편에서 페널티 에어리어로 들어오는 산초를 향해 패스를 하였고, 산초는 가볍게 AS 로마의 골대를 흔들어 버렸다.
4-0
실점의 빌미가 된 크리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우연히 내 공을 뺏은 거야.’
크리스는 홈 팬들의 비난소리에서 머리를 닫고는 운이 없었다는 이유로 사실을 부정해버렸다.
최준호는 점점 많은 AS 홈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박수를 치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있는 브라얀 크리스단테를 보았다.
이동민과 이야기하다가 들은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다.
선수에게 환상을 심어주면 새로운 논리가 탄생하고, 그 논리가 맞지 않으면 부정을 하고, 또 논리가 틀리면 공포심을 느끼고 좌절하다가 시간이 한참 흘러서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하이먼 민스키의 법칙.
– 축구에서도 충분히 통용이 됩니다. 심리적으로 견고하지 못한 어린 선수들에게는 말이죠.
‘지금이 부정의 단계면 그걸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하겠지?’
0-4 너무나 절망적인 스코어였고, 계속 쏟아지는 홈 팬의 야유소리에 AS 로마 선수들은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늑대들은 베테랑답게 경기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경기 재개 후 5분 후.
어린 늑대인 크리스가 공을 받았을 때는 자신의 환상이 깨졌다는 분노와 팬들의 야유소리에 흥분해 다시 한 번 바싹 달라붙은 최준호를 떨구기 위해서 개인기를 시도하였고, 최준호는 여유롭게 그 공을 또 탈취해버렸다.
공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달라붙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크리스를 슬쩍 본 최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저건 좌절의 단계군. 재밌네 인간의 심리를 이런 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게. 근데 나 경기하면서 이런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
아까의 기억 때문인지 마눌라스가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최준호는 그의 다리 사이로 공을 강하게 밀어넣었다.
이번에는 파지오와 몸싸움을 하며 골문으로 달려드는 엘링 홀란드에게 공이 향했고, 엘링은 굉장히 침착하게 뛰어나온 골키퍼를 보면서 칩샷으로 공을 띄워버렸다.
– 철렁!
골키퍼를 넘어간 공이 골그문을 흔들자 엘링은 늘 그렇듯 요가 자세로 잔디 위를 좌르륵 미끄러졌다.
5-0
크리스는 심리적으로 굉장한 위축감을 느꼈다.
새로운 논리가 완전히 부정당했기 때문이었다.
위축감을 넘어 공포심까지 느꼈는데, 최준호가 붙기만 하면 공을 빼앗길까봐 발작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최준호는 축구 경기장 위에서는 인정사정이 없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였다.
‘공포심. 이제 날 뚫을 생각을 하지 못하겠지? 그러면 패스 밖에 더 있겠어?’
후반 36분 경.
공이 크리스에게 왔고, 최준호도 같이 달려왔다.
크리스는 발작적으로 눈에 보이는 선수에게 패스를 하였는데, 달려들던 최준호가 그 패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턱!
크리스의 패스를 최준호가 낚아챘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이런 패스 미스는 위험한 상황으로 직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을 받으려고 했던 파지오는 본능적으로 최준호를 막기 위해서 몇 발자국 뛰어나왔다.
하지만 자신이 누굴 마크했는지 기억해 낸 파지오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고 그 찰나에 최준호의 날카로운 크로스가 골문으로 향했다.
완전히 프리가 된 엘링 홀란드는 최준호의 크로스를 헤더로 연결하였고, 방향만 바꾼 슈팅에 골키퍼 올센은 6번째 골을 내주고 말았다.
6-0
엘링 홀란드의 해트트릭!
그리고 AS 로마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스코어!
요가 자세를 취하는 엘링 홀란드에게 AS로마 팬들은 물병과 음식물을 던질 힘도 없는 듯 보였다.
신이 난 SS 라치오 팬들과 극소수의 도르트문트 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울먹거리는 어린 아이들도 여성도 다수였고.
‘···아직도 집에 안 간 사람들이 많네. 대단한 충성심이야.’
하지만 관중석은 여전히 붉은색으로 가득찼고, 최준호는 그들을 보며 존경심을 담아 박수를 쳤다.
물론 AS 로마 팬들에게는 비웃는 표현으로 보였겠지만.
경기가 완전히 기울자 마르코 로제는 최준호와 엘링 그리고 마르코 로이스를 모두 교체하였다.
최준호는 교체되어 나가기 전에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이먼 민스키의 마지막 단계.”
물론 한국어로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크리스가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힘내.”
**
“오늘 경기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오늘은 실시간 접속한 1만명의 구독자들과 함께 모니터로 축구를 본 양창명이 경기가 끝난 후에 자신의 소감을 한마디로 축약했다.
최준호가 선발로 나오면서 도르트문트의 공격력 레벨이 달라지긴 했어도, AS 로마가 도르트문트 홈경기에서 승리를 했었기 때문에 치열한 경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경기력이었습니다. 도르트문트가 AS 로마를 6-0으로 부숴버렸군요. 최준호 선수는 소파스코어 9.2에 1득점 3어시스트를 하였습니다. 같이 출전한 김우영 선수도 소파스코어 7.9를 받으며 준수한 모습으로 에딘 제코를 완전히 잠가버렸네요.”
– 오늘 최준호 미쳤음. 스탯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님.
– 미드필더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다 보여준 경기.
– AS 로마의 미드필더진은 약하지 않은데, 오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버렸어.
– 평점을 보면 최준호와 맞붙은 선수들이 모두 최하점. 오늘 최준호 진짜 미쳐버린 듯.
– 전반 마지막에 교체되어 나온 선수 너무 불쌍함. 팬들에게 맞아 죽는 거 아닐까?
양창명은 댓글을 보았다.
FD_Idl이라는 아이디가 <김우영입니다. 반갑습니다.> 라는 타이핑을 친 이후로 구독자 늘어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져서 지금은 거의 48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축구 채널중에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채널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속 성장중이었다.
– 오늘 김우영 선수도 최고였음. 에딘 제코가 공중에서 허둥대는 거 처음 봄.
– 맞아. 엄청 든든해 보였음.
– 우영이가 패스만 좀 할 줄 알면 한국 대표팀의 수비 트로이카가 완성될 듯.
– 강민재와 김우영! 오우 생각만해도 아찔함.
– 그건 좀 힘든 조합임. 발 밑 좋은 센터백이 필요함.
– 그러면 스리백!
– 풀백은 좀 보강되어야 하는데.
– 님들 모름? 박기수라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꽤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 박기수? 그게 누구임?
– U-20 대표팀에 합류해서 바로 주전 꿰찬 선수.
– 장윤수라는 선수도 괜찮던데?
– 그게 누구임?
직장있는 보통의 축구팬이라면 다 알 수 없는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양창명은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박기수는 확실히 좋은 선수입니다. 스피드가 상당히 빠르고 체력도 엄청나죠. 90분 전후반 내내 오버래핑 할 수 있고, 공을 다루는 기술도 굉장한 선수입니다. 아약스 쪽에서 그를 매우 주의깊게 본다는 소식이 있죠. 장윤수 선수는 원래 오른쪽 풀백이었는데, U-17 월드컵 이후 왼쪽 풀백으로 전향했습니다. 양발을 다 쓸 수 있는 선수고, 투지가 엄청난 선수죠. 몸싸움을 아주 즐기고 상대 공격수를 괴롭히는 데 굉장히 특화된 선수죠.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K-리그 프로팀을 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이렇게 듣고 있으니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엄청 기대되는데요?
– 여기에 윤강인 선수가 최준호 선수와 호흡을 맞추면 역대급 아닐까?
– 정말 월드컵 우승이라도 할 수 있을 듯.
양창명은 자신도 모르게 댓글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렇게 선수들이 성장한다면 4년 후 월드컵에서는 정말 충격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만 2018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재현한 공자철이나 진성용 같은 선수들이 은퇴를 선언한 것은 아쉬었지만.
양창명은 보조 모니터에 띄워놓은 속보를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대표팀을 4강 신화로 이끈 정태용 감독이 연임을 포기했다는 뉴스네요. 아쉽지만 박수칠 때 떠나라는 속담이 있듯이 좋은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의 새로운 감독으로 중국 충칭팀의 감독을 맡고 있던 파울로 벤토 감독을 선임한다고 합니다.”
**
이후 도르트문트는 보훔을 만나 3-0으로 승리 포칼컵에서 베르더를 만나 2-1로 승리하면서 연승을 이어나갔고, 이에 맞수라도 두듯이 바이에른 뮌헨 역시 연승을 이어나갔다.
두 팀의 승점은 이제 5점.
그리고 전반기 도르트문트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는 두 팀의 대결이 얼마 남지 않았다.
“헤이!”
엘링 홀란드는 훈련이 끝나고 최준호와 김우영을 모았다.
“미팅은 이틀 후 저녁이야.”
“이틀 후면 뮌헨에 있을 때인데?”
“그래. 바이에른 뮌헨에서 미스 유니버시티 독일의 당선자들을 초대해서 뭔 행사를 할 건 가봐. 그 때가 시간이 딱 맞아. 다들 좋은 양복 챙겨 입고 나오고. 매너 있게 말이야.”
“경기를 앞두고···”
최준호가 궁시렁거렸지만, 엘링 홀란드는 고개를 저었다.
“다 나와야 해. 주선자의 얼굴에 먹칠하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