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128)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128화(128/184)
128화 당신의 이야기(1)
명성은 청년에게 광채를 주고, 노인에게 위엄을 주는 법이다.
월드컵의 골든볼 수상자라는 명성은 최준호에게 광채를 부여해 주었다.
“···아, 씨··· 또 누가 도배질이야?”
최준호의 에이전트로서 회사에서 입지를 굳힌 김동현은 최준호의 소셜 계정을 관리하기 위해서 박성실을 고용하였다.
박성실은 김동현이 눈여겨보고 있던 동네 후배였다.
학창 시절에는 전교 1등,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가서, 군대도 갔다 오고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에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유능했는데, 결혼 사기당한 후에 맛이 살짝 갔다.
3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던 박성실을 김동현이 살살 꼬셔서 일을 시킨 것이다.
살짝 맛이 간 것과는 별개로 완벽하게 소셜 계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데어 클라시코가 끝난 뒤 최준호와 입을 맞춘 레아의 기사가 나가면서 최준호의 소셜 계정은 거의 폭주 지경이었다.
1년 6개월 동안 2천여 개 정도였던 게시글이 불과 한 달 만에 1만 5천 개가 되었으니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 오빠 안돼!
‘염병하고 자빠졌네.’
라는 제목으로 수십 개가 달린 댓글을 일일이 삭제하였지만, 또 다른 도배글이 미친 듯이 올라오면서 결국 마우스를 집어 던져 버렸다.
눈그늘이 퀭하게 진 박성실은 눈을 감고 의자에 잠시 기대어 생각했다.
‘···나 혼자서는 이제 감당이 안 돼. 같이 일할 사람이 더 필요해.’
단순하게 소셜 계정을 관리하는 게 아니었다.
명성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과실들.
에이전트를 통한 공식 루트 이외에도 여러 가지 광고 섭외, 출현 부탁, 초상권 이용 등등 엄청난 요구가 쏟아졌고, 그것의 옥석을 가리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박성실은 휴대폰을 들고 김동현에게 연락을 취했다.
– 무슨 일이냐? 동상?
– 형 나 못하겠어.
– 뭔 소리야? 월급 많이 주잖아.
– 나 이러다가 과로사하겠어. 이거 회사에 따로 부서를 만들고 인원 충당해서 관리해야 할 거 같아.
– 그래?
– 응. 일이 너무 많아. 앞으로 더 많아질 거고. 근데 최준호 선수 진짜 사귀는 거래?
–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어.
– 형 나한테도 숨기는 거야? 나도 뭔가를 알고 있어야 댓글 관리하지.
– 공식적인 대답은 알고 있지?
– 제길.
– 일단 업무량이 어떻게 되는지 간단하게 리포트 만들어서 이쪽으로 와. 안 그래도 대표님이 그 이야기하더라.
– 하아. 내가 리포트 만들어야 해?
– 하기 싫어?
– 아니 그건 아닌데, 난 그쪽 회사 소속도 아니잖아?
– 하기 싫으면 말던가? 다른 사람 쓰면 되니까.
– 에이! 그게 아니잖아. 알았어. 만들어 갈게
– 잘 만들어와? 발표할 생각하고.
– 발표?
– 기회는 쉽사리 오는 게 아니야.
박성실은 전화를 끊고는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회? 무슨 기회?’
**
“되게 오래된 집인 거 같은데, 내부는 완전 신식이네.”
김우영이 살짝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물론 그는 훨씬 더 고급스럽고 엄청나게 큰 저택에서 살았지만, 자기 손으로 이런 집을 마련한 최준호가 부러웠기 때문일지도.
“이 동네는 다 그래. 진짜 오래된 건 200년도 넘었어.”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20년을 살아온 아모스가 동네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집이 200년 이상도 가는구나? 한국 아파트는 30년이 고작인데.”
“30년? 그게 집이야? 후후. 자랑스러운 우리 독일인들은 한 번 지으면 1000년을 가는 집들을 지어. 과거에서부터 이어온 공법을 계속 고수하고 있거든. 우리는 경영혁신이란 가면을 쓰고 원가절감 이런 거 안 해. 그리고 이 집의 구조를 봤을 때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게 분명해.”
최준호는 한우를 굽고 있다가 김우영과 아모스가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이 집은 1903년도에 지어진 집이었다.
100년이 넘게 흘렀지만, 외부에 금도 없었고 계속 유지 보수를 해왔는지 깔끔하기 그지 없었다.
메펜 시절에 머물렀던 마테우스의 집처럼.
한 달 정도의 시간을 주고 인테리어를 했고(내부를 최대한 고치지 않으면서), 생활하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물론 혼자 살기에는 꽤 거대했지만.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준호가 묻자 아모스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건축사야. 축구를 안 했다면 나도 그쪽으로 갔을 거고.”
“호오? 그랬구나.”
최준호는 다시 눈을 돌려서 집안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는 토마스 시아카를 보았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키는 그대로였지만, 깡마른 그때와는 다르게 온몸에 잘 만들어진 근육들이 잔뜩 있었다.
확실히 아프리카 DNA는 육체적으로 독보적이긴 했다.
2부 리그에서 토마스가 하는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나폴리의 빅터 오시멘이 떠오를 정도로 유사했다.
“토마스, 밥 먹자!”
그 말에 얼굴이 상기된 토마스가 얼른 식탁에 앉았다.
“넌 무슨 생각을 했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냐?”
김우영이 물었고, 토마스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프로 계약해서 돈을 받으면, 이런 집을 살 거야. 그리고 내 가족들을 전부 독일로 부를 거야. 이런 집이라면 10명의 식구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토마스의 상상은 허황한 게 아니었다.
1부 리그 소속을 제외한 선수 중 3대 유망주로 손꼽히는 이들이 유수파 무코코, 아모스 피에퍼, 마지막으로 토마스 시아카였기 때문이었다.
무코코는 여전히 나이가 어려서 1군으로 못 올라오고 있었고, 아드부 디알로가 파리 생제르맹과 연결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모스 피에퍼는 다음 시즌에 디알로의 대체 선수로 합류할 가능성이 커졌다.
토마스 시아카는 엘링 홀란드의 백업으로 이번 시즌에 올리려고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발기술 때문에 1년 더 도르트문트 II에서 뛰면, 다음 시즌에 새로운 계약과 함께 후보 선수로 쓰겠다고 마르코 로제가 약속한 상황.
“···그 다음은?”
최준호의 물음에 토마스 시아카가 커다란 눈을 껌뻑거렸다.
“응? 그다음?”
토마스 시아카의 목표는 여전히 가족에 머물러 있었다.
만약 그게 이루어진다면?
동기가 확 줄어든 선수는 게을러질 수가 있었다.
토마스는 한참 생각하더니 싱긋 웃었다.
“그다음은 내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거야. 그러니까 더 좋은 선수가 되어서 더 많은 돈을 받아야지!”
그 말에 최준호도 씩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려면 이적해야겠네?”
“아니! 난 도르트문트 구단이 너무 좋아. 불법체류자 신세였던 날 흔쾌히 받아주었어.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여기서 뛰고 싶어.”
토마스의 말에 아모스도 한마디 얹었다.
“나도. 초이 넌?”
최준호에게는 나름의 계획들이 있었다.
물론 그 계획들이 항상 최고의 선택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남기지 못할 발자취를 세계에 남기고 싶은 최준호로서는 도르트문트가 분명 최선은 아니었다.
“자, 고기 다 됐다! 엘링!! 게임 그만하고 이리 와!”
아마도 언젠가는 이 녀석들과 다른 팀에서 승부를 다툴지도.
“푸키! 엘링 데려와.”
“왈!!”
한쪽에서 귀 한쪽을 들고 주인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던 푸키가 벌떡 일어나더니 엘링이 숨어 있는 방문 손잡이를 열심히 돌리기 시작했다.
**
– 너희들은 도전자 정신이 없어. 국내에서 최고라고 자부하지만, 케냐의 아마추어보다 못 뛰어. 그런 정신머리를 가지고 무슨 마라톤을 한다는 거지? 개 쓰레기 같은 놈들!
이탈리아 마라톤팀의 감독을 맡았던 아돌프 만하임은 선수들을 향해 신랄한 비난을 쏟아내고는 곧바로 경질이 되어버렸다.
식이 요법, 선진화된 훈련 방법들은 이미 오지의 아프리카까지 도입이 되었고, 기록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딱 2가지뿐이었다.
선천적인 재능과 정신적 능력.
어렸을 때부터 먹을 것을 찾기 위해 교육받기 위해서 하루에 20~30km를 뛰어다니는 케냐의 선수들을 이탈리아의 선수들이 이길 수 있는 건 해내고 싶다, 이기고 싶다는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2018년 리우 올림픽에서 자기 선수들이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우승할 생각은 없고, 마치 관중처럼 구경나온 식으로 뛰자 아돌프의 성질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이런 폭력적인 언사로 항상 문제가 되었던 아돌프를 찾는 마라톤팀은 없었고, 그는 고향인 독일로 와서 한동안 무직 상태로 보냈다.
아내와는 사별하였고 하나 있는 딸아이는 사업한다고 미국으로 갔고, 그에겐 뮌헨 시내에 있는 공허하고 차가운 아파트먼트가 유일하게 남은 공간이었다.
종일 떠드는 TV를 친구 삼아서, 진한 맥주를 마시며 싸가지 없는 제자들을 욕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런 그에게 흥미로운 메일이 하나 왔는데, 축구 선수의 스피드를 올려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 마라톤 선수랑 축구 선수랑 같을 리가 없잖아? 그런 건 축구 코치에게 알아보라고.
메일을 깔끔하게 무시한 아돌프는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물론 매일 무료한 것은 아니었다.
1860 뮌헨의 팬인 그는 바이에른 뮌헨이 도르트문트에서 극적으로 역전패하는 것을 보고는 너무 신이 나 도가 넘게 맥주를 마시고 말았다.
– 딩동.
그다음 날 그의 집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고주망태가 된 아돌프는 손에 들린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전기세를 안 냈나? 수도세인가?”
그는 아주 의심스럽고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문까지 걸어갔다.
“뭐요?”
“아돌프 만하임 씨입니까?”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내와 사별한 후에는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돌프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행색과는 다르게 한때는 케냐 마라톤팀을 올림픽에서 우승시켰던 유능한 사람이었다.
유능에는 항시 돈이 따라왔고.
혹시 자기 재산을 노리는 여자일 거라는 의심부터 했다.
“그런데 누구지?”
아돌프는 설치되어있는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동양인 남성과 30살 정도로 보이는 아랍계 여인이었다.
‘저건 뭔 조합이지?’
“여기는 도르트문트 팀에서 전술 코치로 일하고 있는 이동민 씨입니다. 메일을 보내드렸는데 답변이 없으셔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답변은 여성이 했고, 남성은 가만히 있었다.
‘도르트문튼? 전술 코치? 메일?’
아돌프는 얼마 후에 이들이 그 흥미로운 메일을 보낸 사람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귀찮게 구는구먼.’
어제 경기가 아니었다면 성질을 부리고 당장 내쫓았겠지만, 도르트문트라는 말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 딸깍.
문을 열자 뿜어나오는 알코올 냄새에 지아가 코를 막았고, 이동민은 활달하게 웃었다.
자신이 굉장히 소심한 성격의 사람인 줄 알았지만, 도르트문트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가자 점점 자신감이 붙은 이동민이었다.
그래서 성질 더럽고 고집 세 보이는 아돌프 앞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억양이 엉망이군.”
“공부한 지 6개월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하지만 웬만한 대화는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동민의 호감 있는 첫인상과 자신감을 확인한 아돌프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지아가 이동민의 휠체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돌프가 물었다.
“진짜 용건이 뭐지?”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까, 유명한 마라톤 선수들의 자세 교정을 해주셨다고요?”
“뭐, 그렇긴 했지. 망할 놈들이 은혜도 모르는 게 문제지만.”
아돌프는 단 한 번의 연락도 없는 제자들을 향해 속으로 쌍욕을 하였다.
“그래서 누구의 자세를 교정하고 싶은 건데?”
“아마도 잘 아실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확답할 만큼 내 견문이 넓지는 않아.”
이동민은 흰 머리에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돌프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 0.1초라도 더 빨리 달리고 싶네요. 그러면 이전에는 할 수 없던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최준호의 가장 큰 약점은 준수한 순간 속도와는 달리 주력이 느리다는 것이었다.
물론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상위권 선수들과 비교해서.
갑자기 불어난 체격의 문제기도 하겠지만, 코치의 조언에 따라 열심히 하는데도 큰 진보가 없었다.
물론 루카토니처럼 발이 느려도 레전드가 된 선수가 있긴 하지만, 주력이 안 좋다는 건 축구 선수로서는 엄청난 손해였다.
송우영에게 계속 따라 잡혀서 개고생한 것처럼.
그런 최준호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대책을 찾았고, 결론에 이르렀다.
‘이 사람이 제격인데···’
이동민은 짧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한 선수입니다.”
아돌프는 그 말에 눈빛이 반짝 빛났다.
“초이?”
“알고 계시는군요.”
“독일에서 그 선수를 모르면 분명 이탈리아 놈일 거야···음 확실히 그 친구 느리긴 하지. 좀만 빨랐으면 더 엄청난 충격을 줬을 텐데?”
“잘 아시는군요.”
아돌프는 직업병처럼 누군가 달리는 걸 보면 유심하게 보는 습관이 있었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흠.”
확실히 교정할 부분이 눈에 많이 띄긴 했었다.
달리는 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처럼.
“근데 왜 그 녀석이 아니라 당신이 날 찾아온 거지?”
“그 선수 때문에 제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보답할 길을 스스로 찾는 중이죠.”
“뭐? 선수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살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강하게 부정하듯 쇳소리를 냈지만, 아돌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의자에 앉아서 어떤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표정을 좀 풀고는 이동민에게 옆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만 당신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