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140)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140화(140/184)
140화 현실과 이상(1)
– 형! 나 2단계 치료에 들어가.
오랜만에 승현이와 통화를 한 최준호.
신약 치료는 제법 효과적인 것 같았다.
국내 병원에서 이야기한 그 시한부 시기는 이미 넘겼으니까.
– 하지만 치료 중에 죽을 수도 있대.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치료 다 받으면 다시 연락해. 형이 꼭 기다릴 거다?
– 흐흐. 알았어.
– 그 치료 받으면 축구 한 번 보러와야지?
– 알았어. 축구 보려고 일단 살아남아야겠네.
승현이와 그렇게 통화를 끝낸 최준호는 몸을 일으켜 옷을 간단하게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승현이 때문에 그런지 어른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안녕!”
“응. 안녕!”
최준호를 알아보는 아이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최준호도 하나하나 손을 흔들며 눈을 맞춰주었다.
길 걷다가 차이는 게 도르트문트 선수들이었고,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서로 편안하게 다니는 건 유럽의 좋은 점이긴 했다.
이 도시의 사람들 대부분이 도르트문트 팬이었기에 선수가 나쁜 일을 당하면 손수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고.
– 뭐해?
최준호는 휴대폰을 들고 레아에게 연락했다.
– 훈련하다가 쉬는 중. 허니는?
독일 여자축구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인 레아는 2020년에 열릴 여자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지역 예선을 치르는 중이었다.
– 산책하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
– 내일 중요한 경기지?
– 응. 매 경기가 중요하지.
– 다치지 않게 적당히 해.
– 물론. 너도.
– 좀 부드럽게 불러주면 안 돼? 허니라던가, 스윗이라던가.
– 흠흠. 또 연락할게.
– 야!
최준호는 연락을 끊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것도 어릴 적부터 해야 닭살이 돋거나 오그라지지 않는 법인데.
맨날 거친 축구만 하다 보니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공원에 도착한 그는 가볍게 스트레칭하고는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매주 이틀씩 육상 코치였던 아돌프의 지도를 받으며 달리기 자세를 교정하고 있는 최준호는 그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뛰었다.
팔의 스윙 각도, 무릎의 높이, 킥 모션, 발목의 스윙과 같은 아주 복잡한 것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몸에 밴 습관을 고치는 것이라 상당한 불편함이 수반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금세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 극적으로 빨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자세를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면 적어도 느리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거다.
아돌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고, 최준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긴 듯 아닌 듯 어영부영하게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세 교정에 빠져서 한참을 뛰고 있는데, 3~4살 즈음 된 어린아이가 정신없이 뛰어가는 게 눈에 띄었다.
‘어른은?’
아이가 뛰어가는 바로 앞이 차가 다니는 4차선 도로인데 어른이 옆에 없는 게 좀 불길했다.
특히 예측력이 뛰어난 최준호는 아무래도 뭔가 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속도를 올렸다.
“헤이 멈춰!
최준호가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는 들리지 않는 듯 뭔가에 홀린 듯 직선으로 뛰어갔고, 저 멀리서 누군가를 찾는 소리가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
“아르네!”
그녀는 또 다른 유모차를 몰면서 뛰어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도 좀 위태해 보였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차 틈으로 축구공이 굴러가는 것을 본 최준호는 아이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 뛰어가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우회전하면서 꺾어 들어오는 트럭까지.
운전석이 높은 트럭의 구조상 주차된 차량 사이로 뛰어가는 아이를 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행동 양상은 전부 다르겠지만, 최준호는 급격하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멀다.’
처음 드는 생각은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의 반동으로 최준호는 정말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최준호는 도로로 뛰쳐나가 손을 흔들면서 트럭 운전사를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트럭 운전사의 시선은 엉뚱한 곳에 가 있었다.
아무래도 휴대폰인 것 같았다.
‘망할 새끼.’
순간적으로 여기서 멈춰야 하나···.
아니면 뛰어나올 아이를 구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지만.
승현이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애들은 참···’
결정력이 빠른 최준호는 머뭇거림 없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차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아이를 낚아챌 수만 있다면···
주차된 차량 사이로 아이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고, 트럭은 바로 앞에 있었다.
저렇게 작은 아이라면 치여도 운전사가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트럭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최준호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트럭을 향해 던졌고, 트럭 앞 유리창에 휴대폰이 부딪히자 운전수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놀란 표정의 운전수.
– 끼이이이이익!!!
급제동하는 소리가 들렸고, 최준호는 트럭 바퀴 사이로 뛰어드는 아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으악!”
급하게 달려온 여인의 비명과 트럭의 급제동 소리가 끝났고, 최준호는 품에 안아 든 아이를 내려놓았다.
“이 멍청한 녀석!”
최준호의 고함에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아이는 곧바로 엄마를 찾아 눈을 돌렸다.
달려온 아이를 낚아채듯 품에 안은 여인이 최준호에게 바로 달려왔다.
기사도 당황한 표정으로 내렸고.
“괘…괜찮아요?”
최준호는 그제야 자기 몸을 살필 수 있었다.
다행히도 트럭에 부딪히거나 그러진 않았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최준호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를 안고 주저앉은 여인을 부축해주었다.
“···혹시 초이?”
트럭 운전사가 그를 금방 알아보았고, 최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에 나동그라져 있는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금이 완전히 가서 깨져버렸다.
최준호는 조금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었다.
“운전할 때는 이거 보지 마세요. 알았죠?”
**
트럭 운전사 막스는 일을 끝내고 오늘 있었던 일을 커뮤니티에 올렸다.
– 진짜?
– 농담인 거 같은데?
– 주목받고 싶은 아웃사이더일거야.
– 그 선수에게 돈 받고 이런 광고 하는 거야?
‘이것들이 나를 못 믿네?’
막스는 트럭에 장착되어있는 블랙박스를 가져와 영상을 추출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바로 커뮤니티에 올렸다.
– 세상에!
– 진짜네?
– 와 미쳤다? 저건 초이가 아닌 것 같아! 저렇게 빠르게 달린다고?
– 내 아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나라도 저렇게 달렸을 거 같은데.
– 초이의 아이도 아니잖아?
– 이야···. 나 같았으면 저 상황에서 물러섰을 텐데, 그 사이로 들어가서 아이를 낚아채네.
– 미쳤다!
그 역시 운전 중에 음악만 듣지 휴대폰을 잘 듣지는 않는데, 화주 측에서 날아온 메시지 때문에 거의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시선이 뺏겨버렸다.
‘정말···평생 후회할 일을 할 뻔했어.’
– 그래서 말인데, 초이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주고 싶어.
– 난 이거 보면서 떠오른 게 하나 있어.
– 나도.
– 우리 설마 같은 걸 생각한 건 아니지?
– 혹시 이거야? Held(영웅)
– 오케이.
– 도르트문트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팀을 구하기도 했고,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행동하는 건 정말 범상치 않은 사람일 거야.
– 그럼 우리 앞으로 초이를 응원할 때는 저걸 쓸까?
– 좋아!
– 아주 좋네.
어찌 보면 자신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걸 해주고 싶었다.
커뮤니티에는 제법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 파란색 팬츠에 붉은 망토를 붙이면 어떨까?
또 다른 이슈로 커뮤니티가 들끓기 시작했다.
**
“잠깐만 멈춰봐.”
팀닥터 엘리스는 훈련을 받는 최준호를 멈춰 세웠다.
“뛰는 게 좀 이상한데, 불편한 곳이 있어?”
아이를 구한 뒤에 허벅지 쪽에 약간의 통증이 좀 느껴지긴 했다.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내어서 생긴 근육통 정도로 생각했고, 이 정도면 뛰는 데 큰 애로사항이 없었기에 최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진짜 괜찮아?”
“그럼요. 신발의 스파이크가 많이 닳아서 그럴 거예요. 새 걸로 바꿔야겠어요.”
최준호는 엉뚱한 이유를 둘러대서 팀 닥터의 예리한 눈길을 피해 갔다.
그리고 오늘 있을 경기는 정말 중요한 경기였다.
이쪽은 엘링 홀란드가 빠진 상황이었고, 토트넘은 오늘 경기에 사활이라도 걸은 듯 이전 경기인 FA컵에 주전 선수들을 선발로 내보내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긴 했지만, 거리가 멀지는 않았고, 사흘 만에 뛰는 자신들에 비해서 6일을 쉰 토트넘이 체력적으로 더 우세하였다.
그리고 1차전에서 패배의 빌미가 되었던 델리 알리는 아예 명단에서 빠져 있었고, 시소코가 선발로 나왔다.
경기 시작부터 자신을 엄청나게 괴롭힐 게 뻔한 경기.
‘여러모로 불리한 경기야. 어떻게든 8강으로 진출해야만 해.’
도르트문트의 전술상 최준호에게 기대는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행여 경기에 빠진다면 졸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무슨 일이야?”
토마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고, 최준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밝게 웃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엘리스가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우리 모두 알잖아?”
“맞아.”
“그래서 빚은 언제 갚을 건데?”
“···하하하하!”
엘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오자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던 이동민이 엘리스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요?”
“초이가 뛰는 모습이 약간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동민은 그런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하는 둔감한 편에 속했다.
아무리 봐도 차이를 느끼지 못한 이동민이 고개를 젓자 엘리스는 불편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사흘 간격으로 계속 경기를 뛰니 감독뿐만이 아니라 선수들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팀닥터와 스포츠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선수들이 잔 부상이 많아서 그럴 것 같습니다. 별 차이를 못 느끼겠네요.”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네요.”
엘리스가 다시 예리한 눈빛으로 선수를 지켜보았고, 이동민은 휠체어를 움직여 전술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켜고 화면을 보았다.
토트넘은 아마도 역습 전술을 유지할 것이다.
홈 경기든, 원정 경기든.
‘월드컵 때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응원했는데, 이제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적이 되었네.’
이동민은 전술판에서 7번 말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1차전 이후의 토트넘 경기를 보니 스리백을 쓰면서 라인을 내리는 팀에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창의성을 불어넣어 준 델리 알리의 공백이 그대로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도르트문트는 스리백으로 골을 먹지 않는 경기를 펼칠 예정이었다.
원정전에서 4-3으로 이겼으니 훨씬 여유가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 출장하는 선발 선수들도 다소 수비적인 선수들이 많았고.
그리고 요새 한창 물이 오른 최준호와 토마스 시아카의 조합으로 토트넘의 심장을 노리는 것이 마르코 로제 감독의 전술이었다.
“···음?”
그런 이동민의 눈에 묘한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도르트문트 커뮤니티 팬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영상 같은데, 아이를 구해주는 사내는 아무리 봐도 최준호가 분명했다.
‘큰일을 당할 뻔했네.’
트럭에 치였다면 선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데.
멀쩡하게 와서 운동하는 걸 보니 행운이 크게 작용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눈을 좀 의심스럽게 하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니라 최준호가 뛰어가는 속도였다.
이동민은 컴퓨터에 계산기를 띄웠다.
“차 한 대를 보통 2.5m로 치면, 대략 12미터 정도 되는 거리. 근데 이 거리를 1초에 뛰었다고?”
대충 계산해도 39km/h 에 달하는 속도였다.
이 정도면 팀 내에서 가장 빠른 토마스 시아카의 최고 기록이었다.
스파이크로 땅을 꽉 물리고 뛰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일반적인 운동화를 신고서···
10경기 정도 뛰면 1~2번 정도 34km/h 의 속도로 가끔 뛰는 최준호에게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속도였다.
순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최준호를 보던 엘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근육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건 아니겠지?’
**
“···저건 뭐야?”
김우영이 가리킨 쪽을 바라보는 최준호.
원정팀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지그날 이두나 파크.
그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관중석이 있었는데 쥐트리뷔네였다.
그곳에서는 카드 섹션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최준호를 캐리커처 한 것이었다.
파란색 쫄쫄이 바지에 붉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한 손에는 어린 꼬마를 안고 트럭을 피해 날아가는 형태였다.
“······”
최준호는 그 웅장한 광경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Held? 영웅? 무슨 일 있었어?”
“아니···뭐, 좀 위험할 뻔한 일이 있었는데··· 저건 상상도 못 했다.”
“저거 되게 어울리는데?”
“뭐가?”
“쫄쫄이.”
그 순간 최준호는 오른쪽 뒤 허벅지에 뭔가 찌르르한 느낌을 받았다.
최준호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허벅지를 문지르자 김우영이 피식 웃었다.
“뭐야? 상상한 거야?”
“···”
“걱정하지 마라 입힐 생각은 없으니까.”
김우영이 그렇게 말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었다.
그 싸한 느낌은 이내 사라졌고, 최준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허벅지를 봤다.
“···뭐지?”
좋은 느낌은 분명 아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오라고 손짓하는 마르코 로제 감독.
최준호는 가볍게 뛰면서 컨디션을 다시 체크했다.
‘이상 없는데, 왜 이러지?’
마르코 로제에게 다가가자 그가 물었다.
“초이 다리에 이상은 없어?”
약간의 걱정이 있긴 했지만, 챔피언스 리그 8강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머릿속에서 훌훌 털어버렸다.
“네. 문제없어요.”
“정말이지?”
“그럼요.”
“알았다.”
최준호가 라커룸으로 향하자 마르코 로제는 르네 마리치에게 말했다.
“엘리스에게 초이를 유심히 보라고 해. 문제가 있으면 바로 보고하라고 하고.”
“교체할 거야?”
“승부도 중요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선수 보호가 먼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