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159)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159화(159/184)
159화 겨울 휴가(3)
최준호는 그녀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계약을 강요하는 거나 하지는 않아요. 다만 얼마전 선임한 감독과··· 아직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서 이곳에 온 김에 잠시 이야기 좀 나누러 왔어요.”
감독도 모자라 빅 클럽 중 하나인 첼시의 구단주의 관심을 이렇게 받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가치를 높게 판단한다는 증거였으니까.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토마스 투헬 감독에 대해 잘 아세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구단 관계자들과 항상 좋지 않은 관계를 맺어왔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는 우리와 이야기할 때 당신을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언론을 통해서도 계속 구애를 하고 있는 건 알죠?”
“물론이죠. 거의 스토킹 당하듯한 관심을 받고 있으니까요.”
“만약 최준호 선수가 우리 구단으로 이적을 한다면, 모든 전술이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저도 알고 있어요. 그것에 대하여 토마스 투헬과 혹시 나눈 이야기가 있나요?”
구단주조차 감독이 어떤 철학과 생각으로 팀을 꾸려나갈지 모를 정도라면, 토마스 투헬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는 건데.
마리나의 물음에 최준호는 토마스 투헬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 엘링과 득점으로 경쟁하게 해주지.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신을 스트라이커로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맡아온 역할을 생각해본다면 뜬금없이 전방에 배치하고 뒤에서 오는 볼을 받아 골을 넣으라는 방식은 아닐 것 같았다.
토마스 투헬은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 써야 하는 지 잘 아는 사람 중에 하나였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토마스 투헬이 구상하고 있는 건···
“사실 저도 투헬에게 저를 어떻게 쓰겠다는 말을 정확히 들은 건 아닙니다.”
“그래요? 정말 불친절한 사람이군요.”
“하지만, 대충 이야기를 유추해본다면···제로톱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그건 맨시티의 전술이지 않나요?”
마땅한 스트라이커는 없고, 창의적이며 패스가 좋은 선수들이 많은 맨시티가 최근에 이용하는전술이었다.
프란체스코 토티, 리오넬 메시, 세스크 파브레가스, 호베르투 피누미누와 같은 월드 클래스 선수들도 한 때는 폴스나인(가짜공격수)이라는 롤로 많은 득점을 올렸었고.
전술의 구애를 받지 않고 상대 맞춤 전술로 일관하는 토마스 투헬의 성향 상 제로톱을 써도 이상할 것이 아니었다.
지금 첼시의 구성원을 봐도 티모 베르너를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스트라이커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가 없었다.
대신 크리스찬 풀리시치, 마운트, 조르지뉴, 은골로 캉테, 마테오 코바치치 등 월드 클래스 수준의 미드필더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4-3-3-0의 제로톱 전술이 가장 맞지 않을까가 최준호의 생각이었다.
최준호의 이야기를 들은 마리나는 안색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어린 선수가 전술에도 이렇게 밝아?’
마치 자신의 팀을 완전히 꿰뚫고 있기라도 하는 분석에 속으로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최준호도 눈 앞의 중년 여성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태도가 굉장히 수용적이네? 구단주가 이러기도 쉽지가 않은데?’
아마도 그런 그녀의 태도 때문에 토마스 투헬을 감독으로 선임할 생각을 했을 지도 몰랐다.
“만약에 최준호 선수가 우리 구단에 온다면 함께 뛰고 싶은 선수가 있나요?”
“···그런 건 감독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떤 선수와 함께 하고 싶은지.”
“당신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어서 그래요.”
마리나의 대답에 최준호는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토마스 투헬이 아무 말도 안해줬겠지. 그 사람은 주어진 선수를 가지고 조합하는 데 천재적인 사람이라 누굴 데려오던 큰 관심이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이건 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함께 뛸 수 있는 선수를 고를 수 있단 말이지?
재정적으로 풍요로운 첼시와 미래를 좀 더 보고 온 자신의 조합이라?
중요한 것은 첼시의 스쿼드를 결정할 권한이 조금은 생긴다는 뜻이었다.
다소 방어적인 분위기를 띄우던 최준호가 마리나의 제안에 허리를 세웠다.
워낙 순간적인 움직임이었지만, 로만의 밑에서 오랫동안 경영을 배워온 마리나의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부분에서 선수가 상당한 호기심을 느끼네?’
– 선수를 영입하는 것은 당신 업무지, 내 업무가 아니야.
토마스 투헬의 무덤덤한 말투가 떠오르긴 했지만, 눈 앞의 괴물 선수를 어떻게 꼬셔야할 지 마리나의 뇌리에 번뜩였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팀 리빌딩 중이에요. 토마스 투헬 감독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최준호 선수를 중심으로 스쿼드를 짜고 싶어요. 도르트문트보다 주급 체계도 상당히 유연하죠. 만약 같이 뛰고 싶은 선수가 있다면, 구단주로서 적극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할게요.”
과연···이런 대우를 받으며 세계적인 빅클럽으로 이적하는 선수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레아가 첼시로 이적한 것은 영국에서 마침 골키퍼 빈 자리가 남은 곳이 그쪽이어서 그랬다.
다들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미 여러 팀이 에이전트인 김동현과 물밑접촉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었고, 딱히 어디로 갈지 완전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첼시로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몇몇 선수가 있긴 합니다.”
마리나는 수첩과 팬을 꺼냈고, 최준호는 잠시 고개를 돌려 카페 창가를 보았다.
몇몇 선수가 머릿속에 아른 거렸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얼마나 퀄리티 있는 패스를 할 수 있는가, 맨시티를 대항해서 밀리지 않고 중원을 장악할 수 있는가 였다.
“그 쪽에서 제 답변에 대해 제대로 된 성의를 보인다면 저도 이적에 대하여 꽤 긍정적인 포지션을 가져가겠습니다.”
“아주 좋아요!”
마리나가 힘이 넘치도록 활기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아마추어 축구 구단.
베스트팔리아 라이네른.
보통은 베스트팔리아라고 부르는 이 아마추어 구단에는 최현식이 파트타임으로 코칭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차를 끌고 나오면 25분 거리라 멀지 않았고, 코칭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내용을 적용시키며 실전 감각을 키우는데 이만한 곳도 없었다.
아마추어 구단 답게 배가 불룩 나온 50대 아저씨부터 유소년 클럽에 가입하지 못한 10대 소년들까지 축구만 좋아하면 누구나 가입하고 뛸 수 있는 6부 리그 소속이었다.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주립 경기장을 임대해서 뛰었고, 운영비는 순수하게 선수들의 가입비와 주에서 나오는 약간의 보조금, 그리고 1,000여명 정도의 팬들의 후원비로 운영되고 있었다.
“흐음.”
그런 최현식의 눈에 띄는 선수가 하나 있었는데, 내전이 터진 시리아에서 난민으로 넘어온 오마르 알 크라딘이라는 소년이었다.
올해 나이는 17살인 그는 시리아의 아마추어 축구 클럽에서 축구를 배웠다고 했다.
18살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192cm에 77kg의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는데, 아프리카 인종들이 가지고 있는 유연함과 리듬을 가지고 있었고, 스피드가 빠르고 점프가 매우 높았다.
영리하고, 공도 제법 잘 다루어서 꽤 좋은 센터백으로서의 가능성이 돋보이는 아이였다.
“오늘부로 그만두려고 합니다.”
다만, 부모를 모두 잃고 12살짜리 여동생을 하나 데리고 독일로 온 그에게 나오던 정부 지원금이 중단되면서 이제 생계를 챙겨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축구를 어떻게든 하려는 의지마저 꺾인 모습에 최현식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다음주까지 좀 더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당장 먹을 것도 없어요. 뭐라도 해서···”
꼭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최현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금을 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일단 이걸로 급한 불을 끄고 축구를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라면 다음 주까지는 꼭 훈련에 나와 알았지?”
그렇게 다음주에 다시 나오라고 재차 다짐을 받은 최현식은 사돈이지만 독일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마테우스를 찾아갔다.
“무슨 일 있어?”
하지만 마테우스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구단 사정이 매우 어려워졌어.”
저번 시즌 아쉽게도 강등을 당하면서 4부 리그로 떨어진 메펜.
새로 온 경영자가 야심만만하게 은행빚을 받아 투자를 했다가 완전히 적자가 나는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로?”
“곧 파산할 것 같아. 새로운 인수자가 없으면 문을 닫아야겠지.”
돈이 아니라 이 팀에 대한 애정으로 거의 무보수처럼 일해온 마테우스에게는 꽤 상실감이 커 보였다.
오마르 알 크라딘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까 했는데, 파산이라는 커다란 명제를 안고서 집에 돌아온 최현식.
“안색이 왜 어두워?”
푸키와 놀고 있던 최준호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레아는?”
“행사 때문에 3일 정도 프랑스에 간데. 그런데 무슨 일이야?”
최현식은 최준호에게 메펜에 관련된 일을 이야기했다.
“정말? 내가 있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구단주가 2부 리그 진출이라는 커다란 꿈을 가지고 덤빈 모양이야. 은행 대출이 꽤 많데.”
“얼마나?”
“300만 유로 정도.”
꽤 큰 돈이긴 했다.
“그거 갚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으니까. 그보다 구단을 운영할 수 있는 인수자가 필요하대.”
메펜은 최준호에게도 레아에게도 마테우스에게도 꽤 좋은 기억으로 남은 곳이었다.
“그럼 내가 인수하지 뭐.”
“정말?”
“구단 운영은 장인 어른보고 하라고 하고. 구단 자금은 박성실 대표한테 연락해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고.”
“······”
“나 독일을 떠나면 아버지는 거기서 일하면 되겠다.”
“진심이니?”
“그럼.”
최준호는 바로 휴대폰을 들어 박성실 대표에게 연락을 취했고, 독일의 4부 리그 구단 메펜을 인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런 건 좀 생각해보고···”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아버지, 레아, 그리고 마테우스와 밀라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의 얼굴에 수심이 깔리는 건 절대 못 참지.”
“······”
축구 선수로서 받는 돈보다 최준호가 100% 지분을 들고 있는 CJH 투자회사에서 들어오는 수익이 더 큰 상황이었다.
키코의 축구화와 운동화들이 날개 돋힌 듯 팔리면서 사세 확장도 빠르게 진행되는 중이었고.
들어온 수익은 또 어디론가 재투자가 되었고, 또 돈을 벌고 있었고.
딱히 사치를 부리는 성격이 아닌 최준호나 최현식이니··· 돈이 넘쳐 흐를수밖에 없었다.
“근데 갑자기 장인은 왜 찾아간거야?”
“아, 내가 코칭하고 있는 팀에 꽤 괜찮은 선수가 있어서. 사정이 어려워서 축구를 그만두겠다는 거 일단 막아놨어. 메펜쪽에서 여유가 있으면 데려가서 키우라고 하고 싶었는데, 말도 못 꺼냈네.”
“그래?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선수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누구야?”
“오마르 알 크라딘.”
워낙 특이한 이름이었지만 최준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마르? 사우디?”
“시리아인데, 난민 신분으로 독일로 왔어. 여동생이랑 같이.”
“부모는?”
“전쟁 중에 사망했다네.”
최준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런···그 친구 잘해?”
“제법 괜찮아. 하지만 우리 팀 실력이 뭐···그렇다보니 객관적인 비교를 할 수가 없네.”
“그럼 내가 좀 놀러가도 될까?”
“응?”
“휴가라고 해서 경기를 뛰지 못했더니 몸도 찌뿌둥해서.”
“···거기서 양민 학살이라도 하려고?”
아들 성격을 볼 때 절대로 봐주면서 축구하지 않을 게 뻔했다.
“아버지도 그런 단어 쓰네?”
“네가 게임할 때마다 중얼거리니까, 내 입에도 붙었나보다. 근데 진짜 경기를 뛰어보려고?”
“응. 그냥 축구를 좀 하고 싶어서.”
“나야 좋지. 우리 팀 선수들도 되게 좋아할 걸? 우리 아들 좋아하는 선수들이 진짜 많아.”
“하하하! 그럼 콜!”
**
“진짜 초이가 자네 아들이었어?”
최현식도 어디 가서 아들 자랑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묵묵하게 일하는 타입이라 놀란 건 팀 사람들이었다.
“도르트문트의 그 초이가 오늘 우리랑 함께 뛴다고? 그게 말이 돼?”
“오! 믿겨지지가 않아!”
“이거 엄청난 영광인데?”
팀원들이 엄청난 호들갑을 떨 때 오마르 알 크라딘은 몇 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너무나 평범하게 보이던 동양인 코치가 그런 사람인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최준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오마르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고작 자신보다 한 살이 많은데, 정말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축구를 잘했으니까.
그렇게 머나먼 사람이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는 게 정말로 믿기지가 않았다.
“눈 고만 비비고 기다리게 할거야?”
“오마르 알 크라딘이에요. 오마르라고 부르면 되요.”
“네가 오마르 구나. 우리 아버지 눈에 꼭 든 선수 말이야?”
그 말에 오마르는 더 커질 수도 없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최현식을 보았고, 최준호는 자신보다 조금 더 큰 오마르를 보면서 승부욕을 띄웠다.
“얼마나 잘하는 지 한 번 보자.”
“···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잘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
그 말에 최현식이 속으로 폭소를 터트렸다.
다들 잘한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는데, 잘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좀 그래서 말을 안했는데.
그걸 또 마음 속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준호가 간단하게 대화를 끝내고 다른 선수와 인사하러 가자 오마르는 악수를 나눈 자신의 손을 가만히 보았다.
오늘 여기에 올 때까지도 어떤 일을 할 지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하지만 최준호를 보고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세계 최고의 축구 스타를 상대로 자신이 뭘 할 수 있을 지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 그럼 전반 후반 20분씩 뛰겠습니다.”
정식 게임이 아니라 간단한 연습게임이었고, 오마르는 반대편에 서 있는 최준호를 보며 각오를 되새겼다.
‘어쩌면 마지막 게임이 될 수 있어. 최선을 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