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32)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32화(32/184)
32화 VS 오스나브뤽(1)
SV 메펜의 9번 등번호를 달고 있는 25살의 루소는 전화 한 통화를 받고는 하루 종일 고민에 빠졌다.
– 나 임신했어.
여자친구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럴 듯한 축구 선수가 된다면 청혼을 하겠다고 3년 전부터 마음을 먹었지만, 지금 메펜의 상황은 너무 암울했다.
한 경기라도 진다면 강등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붙을 오스나브뤽도 남은 경기를 모두 이긴다면 승격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독기를 품고 나올 게 분명했다.
그 이후에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강팀들과의 경기가 줄줄이 있었다.
이번 시즌 그는 25경기에 선발 출전해서 6골 2도움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 팀의 스트라이커 치고는 좋은 스탯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시즌 끝나면 강등이 분명해.’
자동차 관련 직업 학교를 졸업하고 축구가 아니라 기술직을 얻었으면 지금쯤 여자친구와 이미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재능 있다는 전임 감독의 한 마디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강등한다면 재계약 여부도 불투명해지고.”
그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오늘 마감이 끝나는 자동차 회사 구인 광고를 한참 동안 보다가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책임질 일이 없으면 좀 더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누군가를 책임질 상황이 생기고 말았다.
“…축구는 이번 시즌까지만 하자.”
그는 한숨을 깊게 쉬고는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
오스나브뤽의 감독 팀 하이더는 4-4-2 전술을 쓰고 있었다.
3위와는 승점 차가 12점 정도인데, 남은 경기를 다 이길 경우 승격을 할 수도 있었다.
최근 3연승이라는 상승세와 더불어 선수단 분위기도 매우 좋았다.
그에 비해 메펜은 핵심이었던 주전 미드필더가 빠지면서 4게임 연속 득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오늘 경기는 우리가 무난하게 이겨야 한다.”
“예!”
선수들도 승격이라는 목표 때문인지 마음가짐이 달랐다.
한편 홈 팀인 메펜의 락커 분위기는 그리 좋지를 않았다.
이미 오스나브뤽과의 원정 경기에서 0-4로 대패를 했었다.
오스나브뤽의 선수들에 비교해서 개개인의 능력이 떨어지고 있었고, 7경기 중 하나라도 지게 되면 강등이 되기 때문에 의욕도 그리 없어 보였다.
새로 합류한 임대생의 가능성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볼프강의 자리를 완전히 메워주기는 어려울거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선수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가면서 사기를 북돋우었다.
“우리는 저번 시즌 막판에 6연승을 하며 승격을 하였다. 이번 시즌이 끝날 때 우리는 분명 잔류할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뛰어주도록.”
그리고 주장인 마테우스가 골키퍼 장갑을 펑펑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 이기러! 우리는 잔류할 거다! 가자!”
리가3 전체 골키퍼 중 선방률 1위를 하고 있는 마테우스였다.
당연하지만 노장이 분위기를 띄우자 몇몇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최준호는 감독과 주장이 열정적으로 분위기를 띄우지만 여전히 가라앉은 팀 분위기를 가만히 느끼고만 있었다.
‘경기장에서 누군가 분위기를 띄워줄 필요가 있겠네.’
화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한다던가, 모두가 감탄할 만한 플레이가 나오면 같이 뛰는 선수들도 희망이 생기고, 힘을 받는다는 것을 최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마 자신이 될 거라는 생각도 당연하게 하였다.
“오늘 지면 강등인가?”
“아마 99%.”
“레기오날리그에서 뛰어도 상관은 없는데.”
“아니야 리가3로 오면서 축구보는 맛이 생겼어. 내년에도 이 맛을 좀 유지해줬으면 좋겠는데.”
“볼프강이 정강이가 부러져서 시즌 아웃이라는데 가능할까? 그 없이 뛴 경기에서 무득점이라고.”
“새로 임대생이 왔다고는 하는데, 너무 늦게 온 게 아닌가 싶어.”
“임대생?”
“저기! 등번호 21번.”
관중석의 한쪽에 앉아 있는 양창명 기자는 이번에도 21번을 달고 그라운드로 나오고 있는 최준호를 보았다.
– FD_Idl : 이번에 최준호 선수가 선발로 나온답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이 끝난 후에 자신도 모르는 정보가 댓글에 달렸고, 확인해 보니 정말 선발 명단에 최준호가 올라가 있었다.
부랴부랴 스케쥴을 확인한 그는 메펜으로 넘어왔다.
마인츠에서 뛰고 있는 진성용, 도르트문트에 1군에 명단을 올린 강주호 선수는 최근 경기가 없어서 기삿거리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일 지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최준호의 선발 출전은 마른 가뭄에 단비였다.
“15세 182일에 독일 3부 리그 출전이면 리그 신기록이네. 여기에 전체 한국인 중에서도 제일 빨리 프로선수로서 출전이고. 충분히 이슈가 되겠어. 활약만 제대로 해준다면 좋겠는데.”
U-19 경기는 몇 경기 안 뛰었지만, 이미 독일 현지 일간지에서도 극찬을 받을 정도로 씹어먹고 온 리가3였다.
양창명은 최준호가 역시나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이른 선발 출전이 혹시 독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적응도 못하고 출전이라… 마이너스가 될 수 있겠어. 어린 선수에게는.’
**
4-4-2 포메이션의 미드필더를 맡고 있는 오스나브뤽의 주전인 그로스.
187cm에 76kg의 커다란 피지컬에 꽤 괜찮은 수비스킬을 지닌 27세의 선수였다.
그는 자신이 맡을 검은 머리의 땅꼬마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너무 어려 보였고, 작아 보였다.
물론 175cm가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아시아인이라 상대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툭 치면 날아갈 것 같은?
특히 피지컬로 축구하는 리가3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유형이었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저런 검증도 안 된 핏덩이를 선발 출전시키다니.’
물론 팀 감독은 그의 유스 경기를 언급하며 조심해야 할 선수라고 언질은 주었지만, 그로스는 유스 리그와 프로 리그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선수였다.
“엄마 쭈쭈 먹고 커야 할 녀석이 프로 리그라니.”
독일어를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 그로스가 꽤 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했고, 그 중얼거림은 최준호의 귓가에도 들어갔다.
최준호는 빤하게 그로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새끼야. 내 정신 연령이 몇 살인지 알면 그런 소리 안 나올 거다.’
“엄마 쭈쭈 먹고 커야 할 녀석이 누군지는 경기 끝나면 알게 될거야.”
거의 네이티브에 가까운 독일어를 구사하는 최준호에게 살짝 당황한 그로스는 인상을 지었다.
“고만고만 봐주려고 했더니 이 자식이 도발을 해?”
그로스의 답변에 최준호는 혀만 낼름 거렸다.
‘안 그래도 오늘 바보가 될 녀석이 하나 필요했는데.’
어린 나이지만 지금 최준호가 느끼는 자신의 컨디션은 과거 분데스리가 팀이었던 1860 뮌헨에서 뛸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거기서 득점과 어시스트만 따져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스트라이커였던 최준호에겐 리가3의 선수들은 사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늘 경기 끝나면 엄마 쭈쭈 찾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될 거야.”
“…?”
최준호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진영으로 가버리자 그로스는 먼저 도발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저 새끼가! 그라운드에 아주 묻어버려야겠어.’
– 삐익!
얼마 후 심판의 휘슬에 홈 팀인 메펜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루소가 바로 공을 뒤로 돌리자마자, 오스나브뤽 선수들은 전원 전진을 하였다.
메펜이 수비 전술을 쓰는 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전방 스트라이커인 루소의 스피드를 제외한다면 자신들의 뒷공간을 털만한 선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소에게 공을 받은 사챠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검은색의 오스나브뤽 선수들의 맹렬한 기세에 최준호를 찾았다.
– 경기 시작하면 저에게 패스를 주세요.
하지만 옆에 있어야 할 최준호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
양 팀 모두 메펜의 진형으로 넘어오는데, 단 한 명의 선수가 맹렬한 스피드로 전방을 향해 뛰어가는 게 사챠의 눈에 걸렸다.
3부 리가를 뛰는 선수들이 발재간은 없지만, 워낙 뻥 축구를 하다 보니 롱패스에 도가 튼 선수들이 꽤 있었고 그건 33살의 사챠에게도 해당하는 일이었다.
사챠는 맹렬하게 달려드는 상대 선수의 압박을 피해 도망가듯이 멀리 공을 찼다.
– 뻥!
“엇!”
전방으로 물밀 듯 뛰어가던 중앙 수비수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듯 달리는 최준호에게 깜짝 놀라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역방향이었다.
제대로 따라붙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작아 보이긴 해도 순간적인 스피드 만큼은 EPL 공격수급이었으니까.
– 퉁!
오스나브뤽의 빈 공간에 떨구긴 했지만, 회전방향 때문에 공이 앞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젠장!’
최준호가 이를 악물고 스피드를 올렸고,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한 오스나브뤽의 골키퍼가 뒤늦게 뛰어나왔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1:1 상황.
분명 오스나브릑 골키퍼가 공과 가까웠지만, 공은 최준호의 발에 먼저 걸렸다.
‘좀 더 상위 리그였더라면 골키퍼가 먼저 처리했겠지.’
– 툭.
덮쳐오는 골키퍼를 한 번의 터치로 완전히 제쳐버린 최준호는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수비수를 한 번 힐끗 보고는 드리블을 하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전매특허와 같은 중거리 슈팅을 때렸다.
– 철썩!
경기 시작 8초 만에 터진 골에 오스나브뤽 선수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골대를 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터치에 완전히 제껴진 골키퍼는 부끄러운지 그라운드에 얼굴을 여전히 묻고 있다.
그리고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플레이에 관중석에서는 엄청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아아!!!”
최준호는 그대로 달려서 골대 안의 공을 들고 중앙으로 뛰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도 못 한 골이라 축하해 줄 생각도 못 한 메펜의 선수들은 최준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공을 들고 중앙으로 뛰어가자 다들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시즌 끝나고 팀이 강등되든 잔류하든 떠나도 될 상관 없는 임대생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상대 허를 찌르는 움직임, 그리고 엄청난 골 결정력.
거기에 이 경기 무조건 이기겠다는 저 마음이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루소는 방금 전까지 가망이 없을 거라며 소극적으로 생각하던 자신에게 부끄러워졌다.
‘역시 느낌이 좋아… 하지만 과연 될까?’
**
“아침 운동 안 하고 갑자기 무슨 일이냐?”
메펜의 오른쪽 주전 윙백을 맡은 29살의 마크는 아버지의 농장에 와서 아침 일을 거들어주었다.
“이번 시즌 끝나면 축구는 그만두려고요.”
“왜?”
“내년이면 30살입니다. 이제 정신 차려야죠.”
“남자가 뜻을 정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아버지 숀의 말에 마크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20대 초반에 2부 리가에서 뛰던 선수였다.
하지만 큰 부상을 입은 후 경기력이 올라오지 않아 계속 임대를 가다가 결국 방출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 농장 일을 돕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지역 클럽인 SV 메펜에 가입했다.
벌써 4년째.
작년 시즌에는 컨디션이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리가3의 벽에 부딪혀 실망스러운 플레이만 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이번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되는 상황이었다.
숀은 자신의 아들이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 마크가 한 번도 빈둥거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강등되면 아버지 일 도우면서 축구 지도자 과정을 밟을까 합니다.”
마음을 굳힌 아들의 표정을 본 숀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졌다.
“오늘 얼른 농장 일 끝내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 경기 보러 갈 테니까, 그거 내려놓고 돌아가서 경기 준비하거라.”
잠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마크 슈바이허는 뜨거운 눈빛으로 오스나브뤽 쪽을 보았다.
그리고는 공을 들고 중앙으로 뛰어가는 최준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앞이 뜨거워졌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은 거야.’
늘상 웃음을 짓던 마테우스의 표정에서는 웃음이 잠시 사라졌다.
‘역시! 크리스 말대로 보통 녀석이 아니었어.’
그는 다시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중앙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는 최준호를 와락 안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하하하.. 뭘요.”
그제야 선수들이 달려들어서 축하해주었다.
락커에서 보여주었던 축 처진 모습의 선수들이 아니었다.
다들 상기되어 있었고,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선수의 플레이 하나가 팀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비록 팀 전술에는 없었던, 최준호의 개인적인 플레이였지만, 감독인 크리스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다.
전술을 짜고 훈련을 시키는 것은 잘할 수 있지만, 카리스마로 선수를 휘어잡는 건 부족한 크리스였기에.
– 초이!!! 초이!!!
관중석 한구석에서 시작된 여성의 발랄한 목소리에 전염되듯 관중들이 점점 ‘초이!’ 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그라운드는 이내 그 소리로 가득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오스나브뤽의 감독 팀이 인상을 찌푸리며 최준호를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최준호가 골키퍼를 제친 움직임이 계속 회상되고 있었다.
분명 그 움직임은 미드필더의 것이 아니었다.
닳고 닳은 스트라이커의 움직임이었다.
‘뒤에다가 저런 스트라이커를 숨겨두고 뒷공간을 노리겠다는 건가?’
그 역시 승격을 위해서 이 경기를 절대 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