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35)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35화(35/184)
35화 프로의 무게(1)
뒤스부르크와의 원정 경기였고, 버스로는 3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밀라가 내일 경기를 위해서 섭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마테우스가 접시에 음식을 남기고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먼저 일어날게.”
밀라는 이유도 묻지 않고 답했다.
“응.”
“초이 맛있게 먹어.”
마테우스의 말에 최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오늘 최준호가 보기에 마테우스는 평소와는 달리 웃음도 없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
누군가와 싸운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일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확 가라앉아 보였다.
“왜?”
맞은 편에서 저녁을 먹던 레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마테우스 분위기가 이상해서.”
“아버지? 당연하지.”
최준호는 궁금한지 포크를 내리고 레아를 보았다.
“내일 뒤스부르크랑 경기잖아. 기운이 없을 만도 하지. 아마 그라운드에 아버지가 보이면 관중들이 야유를 엄청나게 보낼걸?”
“왜 야유를 보내?”
“걔네들 아버지가 팀을 배신했다고 믿거든.”
“응?”
“뒤스부르크가 강등당한 게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바보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레아야.”
밀라가 그만하라고 조용히 말했지만, 레아는 고개를 최준호 쪽으로 쏙 내밀고는 밀라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궁금하면 좀 이따가 내 방으로 와.”
**
‘진짜 15살짜리였으면 넘어가고도 남았겠어.’
최준호는 레아의 위험한 유혹에 넘어갈 남자가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선수 은퇴하면 연애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최준호였다.
그만큼 축구에 진심인 남자였다.
물론 이번에는 어떨 지는 스스로도 정한 바가 없었다.
“구글링하면 다 나오지.”
최준호는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 자판을 두들겼다.
뒤스부르크 마테우스.
‘뒤스부르크에서만 10년 동안 선수 생활이라. 이러면 거의 프랜차이즈 급 선수인데?’
아무리 봐도 욕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뒤스부르크 시절 마테우스의 활약상을 정리한 유튜브 영상도 있었는데, 전성기였던 30대 초반에는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EPL에 갖다 놔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선방력이었다.
‘심지어 브라이튼에서 이적 오퍼도 왔었네?’
하지만 브라이튼의 오퍼를 거절하고 뒤스부르크와 4년 재계약을 다시 맺은 마테우스였다.
“왜 욕하지?”
도무지 이유를 추측할 수 없는 최준호였다.
이 정도면, 뒤스부르크 팬들은 마테우스를 보자마자 환영해 주어야 할 텐데.
하지만 한참 정보를 뒤적이다가 찾을 수가 있었다.
11/12 시즌.
뒤스부르크를 강등시켰던 마지막 경기.
강팀 프랑크푸르트를 만나 전방에 선방 쇼를 하던 마테우스가 후반 들어 컨디션 난조로 쉽게 잡을 수 있는 골을 2개나 주면서 1-2로 역전패 하였다.
안 그래도 재정적으로 엉망이던 뒤스부르크는 강등과 함께 팀이 풍비박산이 나 버렸고, 2부 리그도 아닌 3부 리그로 내려가 버렸다.
“흠.”
페널티 킥 실축으로 팀을 강등시켜 버린 최준호는 마테우스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은 총에 맞았고, 10년 동안 헌신한 마테우스는 뒤스부르크 팬들의 야유를 받고.
찾을 만한 정보는 다 찾았다고 생각한 최준호는 의자에 기대어 기지개를 켰다.
“좀 걱정되긴 하네. 내일 경기는 정말 중요한데.”
오스나브뤽과의 경기 이후 분석을 당했는지 상대 팀이 최준호를 강력하게 마크하였고, 공격 스탯을 쌓는 게 어려워지긴 하였다.
하지만 90분 내내 완벽하게 그를 막을 수 없었고, 최준호는 몇 번 되지 않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승리는 단순히 최준호의 활약 때문은 아니었다.
수문장 마테우스의 신들린 선방 때문이었다.
41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는데, 내일 뒤스부르크 팬들의 야유 때문에 경기력이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메펜에게는 치명상이 될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축구 경기에서 지는 건 죽어도 싫은 최준호에게는 진짜 걱정거리였다.
최준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한 곳에 놓여 있는 책장 앞에 섰다.
온갖 종류의 축구와 관련된 서적이 즐비하였는데, 요새는 저녁에 틈틈이 그것들을 읽고 있었다.
“가브리엘라 스콜릭이 쓴 <올 어바웃 싸커>도 독일어 버전으로 있었네?”
축구를 가장 쉽고 빠르게 즐길 수 있도록 그래픽을 통해 설명한 축구책인데, 축구에 입문하는 어린아이들이 읽기에 정말 좋은 책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읽었는지 책이 거의 누더기에 가까웠다.
책을 파르르 펼치는데, 무언가가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진이었는데, 꽤 낡아 보였다.
최준호는 그 사진을 집어서 보았다.
“응?”
**
뒤스부르크.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에 위치한 도시로 뒤스부르크 암 라인이 정식 명칭이다.
내륙에 있는 항구 중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뒤스부르크 내항이 있으며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독일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통의 요지이며 독일 내에서도 대도시지만, 희한하게 집값은 독일 내에서 가장 싼 동네였다.
MSV 뒤스부르크의 홈구장인 샤우인스란트 라이즌 아레나는 3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경기장이었고, 2004년에 지어진 꽤 신식의 건물이었다.
지붕이 관중석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햇살과 비를 모두 피할 수 있는 경기장이었다.
비록 뒤스부르크가 리가3에 있었지만, 관중석은 거의 꽉 차 있었다.
“우우!!!!”
경기 시작 전 몸을 풀기 위해서 메펜의 주전 골키퍼인 마테우스가 그라운드에 등장하자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뒤스부르크 팬들의 야유가 크게 흘렀다.
“꺼져버려!”
요란하게 욕설도 흘러나왔다.
늘 짓고 있던 웃음기는 완전히 가셨고, 거의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표정이 굳은 마테우스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최준호가 물었다.
“…괜찮아요?”
“음, 알았냐?”
“네… 레아가 이야기해줬어요.”
“그 녀석도 참. 괜한 걱정으로 경기 망치지 말아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꽤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마테우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골대로 향했고, 최준호는 마테우스를 보다가 그라운드 위에서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였다.
‘야유하려고 입장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마테우스가 선수들의 슛을 잡거나 방어할 때마다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최준호의 눈이 천천히 관중석을 훑었다.
‘당신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꽤 큰 도시답게 여러 소속의 기자들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마테우스가 숨긴 걸 끄집어낼 수는 없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슬쩍 귀띔해놓으면 기자들이 알아서 이야기를 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주목 좀 받아야겠네?”
최준호는 혼잣말로 되뇌면서 고개를 돌려 뒤스부르크 선수들을 보았다.
지금까지 만난 팀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린 선수들이 즐비했다.
‘어리네. 어려. 살살 긁으면 흥분해서 달려들기 딱 좋을 때네.’
물론 오늘 선발 출전 명단에서 제일 어린 선수는 최준호였다.
**
MSV 뒤스부르크의 감독인 일리아 그루에프는 관중석에서 큰 야유 소리가 나올 때마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뒤스부르크에서 수석 코치로 있을 당시 마테우스와 함께 하였고, 그가 왜 중요한 경기에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잘 아는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뒤스부르크 구단 측에서 강등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마테우스에게 전가했다는 것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테우스도 팀을 생각해서 아무런 변명 없이 떠났음을.
덕분에 뒤스부르크는 팬들의 충성심에 힘입어 재정적 어려움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2년 만인가? 녀석… 더 늙긴 했네.’
하지만 일리아는 엄연히 뒤스부르크의 감독이었다.
리가2로 승격했지만, 오늘 마테우스가 있는 메펜을 무조건 박살을 내야 했다.
그는 오늘 메펜을 상대로 공격 축구를 구사할 생각이었다.
계속 마테우스가 곤란한 지경에 빠지면 빠질수록 팬들이 좋아할 테니.
프로의 세계는 늘 이렇게 냉정한 법이었다.
“메펜의 핵심은 21번 선수다. 저 선수의 발을 묶을 수 있다면 메펜의 공격력은 매우 형편없어진다.”
일리아는 자신이 평소에 썼던 4-2-3-1 전술 대신 4-3-3 전술을 가지고 나왔다.
미드필더 라인에 세 명을 두어서 최준호를 잠그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이전 팀들이 이 전술로 최준호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다만 공격형 전술을 구사하면서 동시에 최준호를 잠글 수 있냐는 경기가 시작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21번 상대를 할 때는 첫째도 협력, 둘째도 협력이다. 개인기가 워낙 뛰어나니 절대로 1:1로 상대하지 말 것.”
“네.”
“그리고 킥 오프 시에 역습당할 수 있으니 초반에 템포를 줄일 것. 공격은 왼쪽 사이드로 진행한다. 거기가 블랙홀이야.”
경기 시작 전 뒤스부르크가 락커에서 마지막 미팅을 하고 있을 때, 메펜의 감독 크리스도 역시 미팅을 진행했다.
메펜의 크리스는 선발 명단을 그대로 유지하고 3-5-2 전술 대신 3-4-1-2 전술을 가지고 나왔다.
선수의 기량 차이로 유기적인 패스워크가 되지 않으니 7명을 아예 수비로 내리고 3명만 공격을 시킬 생각이었다.
이 전술의 특징은 최준호를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올렸다는 것이다.
“상대는 매우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다. 라인을 상당히 끌어 올릴 테니 우리는 그 뒷공간을 노려야 한다. 놈들은 다른 팀들이 그랬듯이 갤러거 쪽을 노릴 것이다.”
갤러거의 표정이 우그러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보다 잘하는 오른쪽 윙백은 메펜에 없었다.
“훈련한 것처럼 녀석들을 끌어들인 후에 한 방 먹인다.”
**
FC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스카우트 노리스는 선수들을 관찰하기 좋은 장소에 앉아서 느긋하게 경기장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SV 메펜 소속의 21번 최준호에게 향했다.
사실 최준호는 잘츠부르크의 스카우트 시스템에 의해서 관찰되는 선수가 아니었다.
수석 코치인 르네 마리치의 추천으로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전 세계의 축구 선수 40만 명에 해당하는 자료를 가지고 있는 잘츠부르크의 스카우트 망에 저 선수가 없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뒤스부르크가 저 선수를 확실하게 경계하고 있군.”
공이 다른 곳에서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준호 주변에는 2명의 선수가 가까이 붙어 있었다.
2005년도 FC 잘츠부르크는 레드불이라는 회사에 인수되면서 운영 철학이 바뀌었다.
16세 이상 23세 미만의 유망주를 성장시키는 최고의 유소년 시스템을 갖추었고, 이 시스템을 통해 성장한 선수들을 1군으로 쓰면서 오스트리아 최고의 구단이 되었다.
현재 잘츠부르크에는 엘링 홀란드, 양희찬, 미나미노 타쿠미와 같은 뛰어난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 계속 광속 탈락하는 중이었다.
이들 공격수를 제대로 활용할 미드필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고, 최준호는 그 물망에 오른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가지고 있는 태블릿 피시를 보면서 눈썰미를 가동하였다.
“프로필보다는 키가 더 큰 거 같고, 몸집도 커졌어. 성장기의 선수에겐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빠르게 성장하면 신체 균형이 무너져서 제대로 된 기량이 나오기 힘들 텐데 최준호는 그런 단점이 눈에 띄질 않았다.
‘덩치 큰 선수들을 상대로 몸싸움도 제법이고, 역습당하는 상황에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압박을 들어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야.’
체력도 좋은지 최준호는 공이 없어도 그라운드를 종횡하고 있었고, 그를 마크하는 선수들의 표정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
‘조금 더 지나면 이 팽팽한 긴장감이 깨질 것 같단 말이야.’
뒤스부르크가 점유율을 65% 이상이나 가져가면서 끊임없이 메펜의 오른쪽을 공략하고 있지만, 쉽사리 골이 나오지 않는 것은 골대 앞에 서 있는 키퍼 때문이었다.
오늘 정말 미쳤다 싶을 정도로 선방 쇼를 하고 있었다.
– 턱!
코너킥에 이은 헤더 슛을 또 무산시킨 메펜의 골키퍼 마테우스.
그러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웬만한 선수들은 멘탈이 나갈 수준이었다.
‘뒤스부르크에서 10년이나 봉사한 선수에게 저런 야유라니. 강등이 얼마나 실망스러웠던 걸까.’
노리스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헤더 슛을 잡은 마테우스가 벌떡 일어나 롱킥을 날렸다.
‘역습이군!’
메펜의 공격수는 루소와 크뤼거였다.
루소가 다소 몸집이 작고 빨랐다면, 크뤼거는 느리지만 큰 신체를 바탕으로 하는 몸싸움에 능했다.
오늘 경기에서 이 두 공격수는 수비에 전혀 기여하지 않고, 최전방에서 상대 최종 수비들과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이런 역습을 위한 전술 같았다.
상대 중앙수비수가 달라붙었지만, 미리 자리를 선점하고 엉덩이로 비비며 버티는 크뤼거를 당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헤더로 떨궈놓은 공은 대시하던 최준호에게 연결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두 명의 선수가 동시에 압박을 들어갔다.
‘저 상황에서는 버티기….’
노리스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최준호는 두 선수가 몸싸움을 걸기도 전에 원터치로 전방에 스루패스를 찔렀다.
굉장히 정교한 패스였는데, 멀리서 관람하는 노리스조차 보지 못한 패스 길이었다.
‘저걸?’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수비수 사이를 뚫고 나온 루소의 앞으로 그 공이 연결되었다.
– 진짜 축구 그만둘 거야?
– 자동차 조립 회사에 지원했어.
– 왜? 계속 이기고 있잖아?
– 뒤스부르크는 정말 이기기 힘든 팀이야. 여기서 지면 강등이니까. 강등되면 수입이 불안해져.
루소의 머릿속에 어제 여자친구와 나눈 통화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이길 수 있을까?’
순간 그의 마지막 터치는 살짝 길어졌고, 그사이 뛰어나온 골키퍼가 슈팅 각도를 확 줄여버렸다.
‘젠장!’
루소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성급하게 슈팅을 날렸고, 그의 강한 슈팅은 골키퍼가 몸으로 막아내었다.
공이 페널티 에어리어로 밖으로 흘러나갔고, 루소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하지만 공을 쫓던 그의 얼굴에 잠시 놀라운 기색이 비쳤다.
그의 눈동자에 투영된 21번을 단 검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
최준호가 두 명의 선수를 달고 발리로 공을 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네가 슛하면 세컨드찬스가 날 것 같더라고.’
최준호는 허리에 충분한 힘을 실어 몸을 비틀었다.
– 툭!
굳이 세게 찰 필요는 없었다.
골키퍼가 루소의 강슛을 막느라 이제 일어나고 있으니까.
‘정확하게!’
계속 달라붙던 2명은 순간적으로 골 냄새를 맡고 예측 지점으로 달려가는 최준호에게 대응이 느렸고.
공은 땅을 두어 번 튕기며 골키퍼 반대편 구석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반전 33분경.
내내 끌려가던 메펜의 선제골이었고, 샤우인스란트 아레나 구장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