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43)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43화(43/184)
43화 U-17 국가대표(3)
17세 이하에서 가장 잘한다는 선수들이 뽑혔다.
활력이 넘치는 나이기도 했고, 강한 경쟁심에 지배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2002 월드컵 이후 꽤 많은 선진 축구 훈련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선수들의 기본적인 기량과 체력도 상당히 좋아진 상태였다.
37번째 반복 구간에서 서서히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절반 이상이 뛰고 있었다.
– 딩.
‘이 녀석?’
임효원은 자신의 옆에서 굉장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속도를 올리고 있는 최준호를 보았다.
힘들어 죽겠지만, 절대로 경쟁에서 질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고 뛰는 선수들과는 전혀 달랐다.
언론의 힘을 얻어서 인기로 뽑힌 게 아니냐는 대부분 선수 생각에 임효원도 조금은 동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직감했다.
43번째 반복 구간에서 많은 선수가 떨어져 나갔다.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운동장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은 끝까지 뛰고 있는 6명의 선수를 보았다.
주장이자 팀의 기둥 스트라이커인 임효원, 풀백 장윤수와 박기수, 미드필더인 나중석과 최준호 그리고 가장 큰 덩치와 키를 가진 김우영이었다.
박기수와 최준호 그리고 김우영이 끝까지 살아남자 박정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언론에서 좀 띄워준다고 저 선수들을 뽑겠다고? 제정신이야?
– 아니, 우리 아이가 저 선수보다 뭘 못한다는 거죠?
– 17세를 뽑아야 하지 않아?
주변의 반대와 축협의 의구심, 그리고 극성맞은 일부 학부모의 깎아내리기에도 박정수가 끝까지 고집해서 선발한 녀석들이었다.
‘좋아!’
최준호는 이미 프로 리그에서, 김우영은 도르트문트 U-19에서 굉장히 좋은 활약을 펼쳤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한 명.
박기수의 가능성을 이번에 보고 싶었다.
일단 대표팀에서 가장 빠른 주력을 가졌고, 공을 다루는 솜씨와 수비력이 남달랐다.
거기에 굉장히 열심히 했고, 성정도 착했다.
대부분 유소년들이 공격수-미드필더-중앙수비수로 이루어지는 코어 자리에서 뛰다가 경쟁에서 밀렸을 때 풀백 포지션을 맡는 것과는 달리 박기수는 처음부터 풀백 포지션을 고수했다.
2002년 김영표-이종국의 풀백 황금 라인 이후 한국에는 이렇다 할 풀백이 없었기에, 박정수는 좀 더 애정을 가지고 그를 관찰했다.
47번째 반복 구간에서 임효원과 장윤수 그리고 김우영이 떨어져 나갔다.
장윤수는 운동장에 나뒹구는 자신을 두고 죽어라 뛰는 박기수를 보며 살짝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중학교 축구 클럽에서 함께 뛸 때, 장윤수는 이미 박기수의 재능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문제는 자신과 겹치는 포지션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박기수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후배였다.
여전히 자신의 실력이 자신이 있었고, 월드컵 예선전에서 전 경기 주전으로 뛰었던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운동장에 쓰러져 있는 세 명의 선수들을 보며 박정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서부터는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재능의 영역이지.’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있었고, 그 이상의 영역은 신체의 피로 처리 능력에 달려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중석, 최준호, 박기수는 체력적인 면에서 아주 특별한 선수들이었다.
결국 49번째 반복 구간에서 나중석이 떨어져 나갔고, 최준호와 박기수는 버티고 있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녀석 체력이 저런 수준이었다고?’
임효원은 운동장에 앉아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박기수와 경쟁하고 있는 최준호를 보았다.
그 말라깽이였던 볼품 없던 녀석이…!
박기수는 고통스럽게 숨을 내뱉으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최준호를 보았다.
적어도 체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져본 적이 없는 그였다.
‘내가 한 살 더 많은데 지면 쪽팔리는 거야.’
– 딩!
50번째.
거의 한계에 다다른 최준호였다.
단거리 스프린팅을 하는 수준의 빠르기였고, 주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최준호는 거의 짜내듯이 달리고 있었다.
‘이 녀석은 뭐지?’
옆에서 달리고 있는 박기수는 한국 축구계에 아무런 발자취가 없었던 선수였다.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자신을 앞서 뛰어가는 박기수를 보며 최준호도 마음을 다시 잡았다.
‘내가 축구 경력이 얼만데! 지면 곤란하지.’
폐가 터져나갈 것 같았지만, 최준호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달렸다.
– 딩!
51번째.
그리고 52번째.
“그만!”
박정수의 외침에 최준호는 그대로 그라운드에 대자로 엎어졌고, 박기수는 좀 더 뛰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둘 다 고통스럽게 숨을 삼키고 있었다.
코치들이 달려가 그들의 상태를 봐주었다.
체력으로 난다 긴다 하는 국가 대표 1군 선수들도 요요 테스트를 50번을 넘기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상의 테스트는 몸에 무리를 주게 되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박정수가 테스트를 끝낸 것이었다.
“와! 저 녀석들 뭐냐?”
선수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체력이라는 건 한 두 달 열심히 했다고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최준호를 예능 선수 정도로 치부했던 선수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최준호와 박기수를 보던 임효원이 말했다.
“박 감독님이 아무나 뽑았을 리가 없잖아?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뽑은 거겠지.”
주장의 말에 모여 있던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장윤수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도 모르는 불편한 감정이 조금씩 올라왔지만 애써 생각하지는 않았다.
**
‘이 녀석! 왜 이렇게 무거워?’
나중석은 최준호와 압박 상황에서 대처 능력을 키우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정한 공간 안에서 5초 동안 상대의 압박을 막아내고 공을 지키고, 다른 쪽은 상대에게 공을 뺏는 훈련이었다.
상대 공을 뺏으면 또 다른 상대와 계속 대결하는 게임이었다.
최준호의 발재간이 워낙 좋았기에 뺏을 엄두는 도저히 나질 않아서 대놓고 몸으로 밀면서 그의 균형을 흐트러트리려고 했는데 꿈쩍도 안 했다.
탄탄하게 붙은 근력과 그간 공을 들여서 키운 코어 근육은 더 강해졌고, 이미 리가 3에서 덩치 큰 선수들을 상대로 경기하면서 무게 중심 쓰는 법을 제대로 익힌 최준호였으니까.
– 삑!
5초가 지나자 그들의 훈련을 맡은 코치가 휘슬을 불렀다.
‘우아, 뺏질 못하겠다. 뭔 돌덩이야?’
나중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 교대!”
이번에는 나중석이 공을 잡고 버티고, 최준호가 공을 뺏는 포지션이었다.
‘끙!’
예상은 했지만 버티는 힘만큼이나 뒤에서 미는 힘도 상당했다.
2초 정도 버티다가 도무지 안 되겠는지, 나중석이 엉덩이를 낮추는 순간 뒤에서 최준호의 발이 들어와 공을 앞으로 툭 쳐내버렸다.
‘젠장! 이 녀석 도대체 뭐야?’
AFC U-17 경기에서 미드필더 중에는 좋은 경기력을 펼쳤던 나중석이 최준호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질 않는 장면에 박정수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박정수는 훈련하는 한 곳에서 흘러나온 <선배님>이라는 소리에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빠른 템포로 진행하는 축구 경기에서는 단순하고 빠른 의사소통이 생명이었다.
그래서 경기장에서는 존댓말 쓰지 말라고 계속 지시하고 있었다.
“야야! 경기장에서 훈련받을 때는 선배님이라는 단어 쓰지 말랬지!”
박정수가 호통을 치자, 박기수는 잔뜩 졸아버린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거기도 교대!”
**
“…너 실력이 많이 늘었더라?”
저녁 식사를 거의 끝낼 무렵,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장윤수가 박기수에게 말했다.
“아…아닙니다.”
“뭘 아니야? 정말 잘하던데. 엄청 열심히 한 거 같아?”
박기수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집에 좀 일이 있었잖아요? 이젠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요.”
장윤수는 그 일이 무언지 알고 있었고, 아끼는 후배에게 그 상황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임창오가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윤수야, 기억나냐? 우리 경기 뛰고 난 후에 아이스크림 먹은 거?”
“물론.”
“우리 아이스크림 좀 먹을까?”
“감독이 먹지 말라고 했잖아?”
“에이. 설마 그거 먹었다고 뭐라고 하시겠냐? 너 기수라고 했지?”
임창오의 부름에 박기수는 군기가 들은 모습으로 허리를 세웠다.
“네. 임창오 선배님.”
“그래.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와라. 1층에 가면 매점 있어. 곧 닫으니까 가서 6개만 사와.”
“그…그래도 감독님이…”
“야야! 그럼 선배인 내가 갔다 오냐?”
임창오가 살살 박기수를 꼬시자 장윤수가 인상을 슬그머니 썼다.
“야, 먹고 싶으면 니가 사와.”
“이 자식이 동기끼리 서운하게 그게 뭐냐?”
“그러다가 기수가 감독한테 걸리면 니가 시켰다고 자수할거야?”
장윤수의 말에 임창오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에으. 딱딱한 자식.”
**
팀 합숙 훈련 4일째.
컨디션 테스트를 비롯해 여러 테스트를 끝내고, 전술 훈련까지 끝난 박정수는 최종 테스트 격으로 미니게임을 제안했다.
“A, B 팀으로 나뉘어서 게임을 하겠다. 조끼는 A 팀이 입는다.”
엄밀히 말하면 주전은 A팀, 백업은 B팀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A팀
GK 박준용
CB 김우영
CB 양태수
LB 박기수
RB 윤태용
DM 진성후
MF 나중석
MF 최준호
LW 황규석
RW 임창오
ST 임효원
4-3-3 포메이션.
예선전에 붙을 스페인과 브라질을 대비한 역습 전술이었다.
공격의 핵심은 최준호에게 시작되는 패스.
그 이전에는 수비형 전술로 임효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비에 참여하는 전술이었다.
선수들은 박기수와 김우영, 최준호가 A팀에 뽑힌 이유에 대해서 이제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다.
박기수는 빠른 주력과 엄청난 체력 여기에 진득한 수비력을 보여주며 박정수 감독의 눈도장을 완전히 찍었고, 김우영은 한국인 같지 않은 놀라운 피지컬을 기반한 출중한 몸싸움, 헤더 능력 그리고 평균 이상의 발기술로 낙점을 받았다.
“역시 준호 녀석이 A팀이네.”
여러 테스트와 미니게임을 통해서 선수들은 최준호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지 모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어 명이 달라붙어도 공을 뺏기지 않는 볼 간수 능력과 더불어 그 상황에서 수비수를 제치고 드리블을 할 수 있는 탈압박 능력을 가졌다.
또 침투하는 공격수에게 정말 놀라운 스루패스를 할 줄 알았으며, 세컨드 찬스에서 골을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슈팅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골대 페널티 에어리어 가까이에서 프리킥 능력은 팀 내 모든 키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한국 축구에서 늘 문제가 되었던 중앙의 <볼 운반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었다.
다만 한 사람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거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무표정한 장윤수의 얼굴에 굉장한 당혹스러움이 걸려 있었다.
‘계속 주전이었던 내가! B팀이라니!’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다.
기수보다 체력과 스피드가 좀 떨어지긴 했어도, 이렇게 바로 갈아치움을 당할 정도로 실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1년 더 축구를 했고, 예선에서 쌓인 경험까지 고려한다면 이 일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자기감정을 잘 이해 못 하고, 감독의 명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배운 장윤수는 감독에게 항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어!’
이 상황을 속으로 삭히는 것이 전부인 장윤수에게 박기수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저 선배님…”
장윤수는 입술을 꾹 물고 미간에 주름이 잔뜩 늘어 서 있었다.
살짝 떨리는 눈동자가 충혈되는가 싶더니 눈가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장윤수는 주먹을 꾹 쥐고는 이를 악 물었다.
“가.”
장윤수는 경기장에서는 굉장히 저돌적이며 거칠었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와는 달리 굉장히 세심하게 후배들을 아껴주는 선배였다.
장윤수가 윙어로 뛰던 중학생 시절 박기수는 같은 라인에서 풀백으로 뛴 적이 있었는데, 상대 팀의 살벌한 태클에 큰 부상으로 이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장윤수는 태클을 한 선수를 올라타서 주먹으로 마구 때렸는데, 방금 본 표정이 그때 표정과 다르지 않았다.
‘서…선배님…’
박기수는 장윤수의 표정에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 툭.
“뭐야?”
최준호는 임효원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과 부딪힌 장윤수를 보며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건방지게. 선배한테 뭐야가 뭐야?”
정말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장윤수가 최준호를 노려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뭐야?’
최준호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장윤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해가 되긴 하네.”
임효원이 같이 장윤수를 보며 말했다.
“뭐가요?”
“예선전에서 저 녀석 모든 경기에 다 나왔거든. 근데 한 살 어린 후배한테 밀렸잖아? 화가 날 만도 하지.”
“저건 그냥 화가 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자칫하면 누구 하나 잡겠는데요?”
“설마. 저 녀석 그런 녀석이 아니야. 생긴 것과는 달리 착한 놈이야.”
임효원은 그렇게 둘러댔지만, 최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장윤수를 다시 보았다.
종종 경기 중에 참을성이 약한 선수들은 감정이 이성을 잡아먹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파울이 나오고 다치고, 레드카드가 나오곤 했었다.
딱 보니 장윤수의 눈빛이 그랬다.
“…서…선배님..”
최준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장윤수를 부르며 쫓아가는 박기수에게 눈을 돌렸다.
‘흠.’
과거 U-20에 합류했을 때, 최준호는 박기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 와서 느낀 건데 박기수는 굉장한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
한눈에 봐도 그 누구보다 훈련에 열심히 임하고, 코치들의 충고를 새겨들으려고 하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체력은 심지어 자신보다 좋고, 스피드도 빠르고, 수비도 잘하고, 착하고.
‘왜 내가 저 선수를 못 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