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46)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46화(46/184)
46화 스페인 예선전(2)
한국 선수 대부분은 고교 축구팀에서 뛰고 있지만, 스페인 대표 선수들은 모두 자국 리그 프로 클럽에서 뛰는 선수들 뿐이었다.
7명의 선수는 이미 라 리가 1군 후보 자원으로 뛰고 있었고, 대부분은 2군 팀으로 뛰었는데, 핵심 선수 3명이 빠져나갔어도 전력 평가는 여전히 스페인이 압도적이었다.
그런데도.
초반 최준호가 스페인의 중원을 휘저어 놓으면서 15분까지 그들은 수세에 몰렸다.
중원에서 수적 싸움에서도 밀리는 데다가 세르히오 고메스 대신 나온 카를로스가 최준호를 전혀 상대하지 못하면서 스페인은 결정적인 위기를 2번이나 맞이하였다.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으로 점수를 주지 않았지만.
“측면으로 볼 돌려!”
스페인의 감독 호세가 답답한 표정으로 터치 라인까지 나와서 선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세 명이 빠지긴 했어도 알아서 경기를 잘 풀어나갈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초반에 너무 고전하였다.
그리곤 중앙에서 미드필더들을 압박하는 21번 등번호를 단 선수를 보았다.
‘저 녀석은 도대체 뭐야?’
브라질을 상대로 굉장히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골 운이 오질 않아서 1-2로 패한 상황이었다.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팀 중에 가장 약하다는 한국을 상대로 초반에 이렇게 밀릴 줄은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왼쪽 측면 공격으로 루트를 돌리면서 스페인의 공격이 활발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개인기도, 피지컬도, 축구 지능도 한국 선수 개개인보다 워낙 좋은 스페인 선수인지라 한두 명 제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루트가 잘못 설계되었다.
– 촤르르!
박기수의 태클이 정확하게 공을 걷어내면서 오른쪽 측면을 뚫릴 위기를 막아내었다.
페란 토레스 대신 나온 이그나시오의 공격이 박기수에게 걸렸다.
“젠장!”
번번히 공격이 막히자 호세는 호텔에서 쉬고 있는 페란 토레스가 간절히 생각이 났다.
그 녀석이었으면 저 수비수를 뚫고 페널티 에어리어로 향했을 것이라고.
– 한 경기만 이기면 본선에 진출한다. 스페인의 전력이 떨어진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다.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스페인이었지만, 핵심 선수 이탈로 전력이 약화하였다는 소식은 한국 선수들의 사기를 올려놓았다.
‘절대 뚫리지 않아.’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축구하는 박기수는 많은 스카우트가 모여 있는 이 월드컵 경기에서 자신을 어필하고 싶었다.
보통의 선수들이 K-리그를 거쳐 가곤 했지만, 박기수는 더 많은 돈을 받고 외국으로 직행하고 싶었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여기에 발렌시아 1군에서 후보 선수로 뛰고 있는 페란 토레스라는 공격수가 없다는 건 그의 사기를 더욱 올려놓았다.
“나이스!”
호세 감독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박정수가 주먹을 꾹 쥐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잘했어! 잘하고 있어! 상대 측면 공격을 틀어막고 역습으로 나가자!”
하지만 스페인의 세트피스는 생각보다 훨씬 예리했다.
얼리크로스를 이그나시오가 잘라 들어와 헤더로 방향을 틀었고, 마린다를 마크하던 김우영이 점프를 해봤지만, 그의 머리 위로 훌쩍 넘어갔다.
그 공은 뒤에서 쇄도하던 스페인 U-17의 간판 공격수 아벨 루이스의 머리를 맞고 그대로 골문을 흔들어 버렸다.
그를 마크하던 임효원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분명 그의 뒤에서 마크하고 있었다.
아벨이 몸을 돌리는 것을 보고 따라서 몸을 돌렸는데, 아벨 루이스가 자신보다 앞서 있었다.
‘…순간적인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없어.’
왜 스페인이 영국과 더불어 강력한 우승팀으로 손꼽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주장.”
최준호의 음성에 임효원이 고개를 올렸다.
“아직 지지 않았어. 그리고 주장은 함부로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는 센터서클로 뛰어가는 최준호를 보며 임효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렇지. 내가 주장이었지.’
**
‘공격력은 여전하네.’
조직력, 개인기, 피지컬…
뭐 하나 흠잡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팀이었다.
다만.
브라질에게 2골을 얻어맞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준호는 시선을 돌려 스페인의 최종라인을 보았다.
유독 스페인의 중앙수비수 한 명이 발이 느리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개인기와 발밑 기술, 꽤 빠른 스피드를 가진 휴고 가야몬과 달리 후안 미란다는 키가 큰 대신 스피드가 느렸다.
다른 선수보다 땀도 좀 많이 흘리는 걸 봐서는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우영이 머리와 주장의 스피드를 믿을 수밖에 없네.’
전반 34분쯤.
한 골을 넣은 스페인은 느긋하게 후방에서 볼을 돌리며 시간을 끄는 척하였다.
중앙은 완전히 밀리는 형국이라 공을 투입하지 않고 센터백과 풀백들 사이에서 공이 왔다 갔다 하자 다급한 한국 선수들이 공을 뺏기 위해서 조금씩 라인을 끌어올렸다.
– 뻥!
하지만 최후방에 있던 중앙수비수 가야몬이 한국의 수비수 뒷공간을 향해 날카로운 공간 패스를 넣었고, 아벨 루이스가 한국의 센터백 양태수를 완전히 따돌리고는 빠르게 공간에 뛰어 들어갔다.
아벨 루이스의 단독 찬스로 이어졌고, 아벨은 빠른 발로 드리블을 치기 시작했다.
‘젠장! 저 덩치도 작은 놈한테 왜 지는 거야?’
어쩔 수 없이 김우영이 쇄도하는 공격수를 버리고 아벨 루이스를 향해 질주하였다.
골키퍼를 앞에 두고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은 아벨은 달려드는 김우영에게 걸려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 삑!
심판이 노란 카드를 꺼내었고, 김우영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씨이발!”
페널티킥 역시 아벨 루이스가 골로 연결하면서 스페인은 한 발 더 앞서갔다.
0-2
지금 이 경기장에서 역할을 해주는 건 최준호, 김우영, 박기수 정도.
박정수는 얼른 양태수와 최준호를 불렀다.
“9번 공격수는 우영이에게 맡기고 네가 커버 들어가. 그리고 라인 계속 끌어 올려서 압박하라고 전달해!”
“…네!”
양태수가 뛰어가자 박정수는 최준호에게 말했다.
“여기서 지면 솔직히 본선 진출 어렵다. 알고 있지?”
“네.”
“그라운드에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건 내 생각에 너뿐인 것 같다.”
최준호는 이마에 번들거리는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스페인이 이제 경기를 잠글 거라는 생각이신 거죠?”
“그래. 사흘 후에 있을 니제르와의 경기를 위해서 아마도 체력 분배를 할 거다. 그 팀이 피지컬은 정말 무서운 팀이라, 체력이 부족하면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를 테니. 만약 이 경기를 우리가 가져오면 브라질 전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
“여기서 다 쏟아부을 생각이시군요.”
“그래.”
“알겠습니다.”
1-0으로 앞서가던 스페인이 후반 브라질에게 2점을 먹고 무너진 건 그들의 체력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부터 계속 스페인을 괴롭히겠다는 거였고, 아벨 루이스에게 김우영을 붙인 건 역습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저 견고한 수비를 무너트려야 기회가 나는데.’
박정수는 터벅터벅 걷고 있는 박기수를 보았다.
“준호야, 기수한테 이야기해. 오늘 풀타임 뛸 필요 없으니까,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 최대한 오른쪽 사이드를 괴롭히라고.”
감독의 생각을 대번 알아차린 최준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기수 형. 감독님이 이 경기 이기고 싶으시대.
– 그래?
– 형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어야겠대.
-…내가?
감독의 믿음.
선수에겐 그것만큼 힘이 나는 일도 없었다.
안 그래도 오늘만큼은 컨디션이 최고조인 박기수였다.
가슴이 복받치는 느낌에 박기수는 한껏 가슴을 부풀렸다.
– 응! 마음먹고 공격 나가래.
– 그럼 내가 책임지던 공간은?
– 걱정하지 마. 내가 커버할 테니.
최준호라면 믿고 맡길 만한 선수였다.
– 알았어.
스페인은 박정수 감독의 예상처럼 공격수 아벨 루이스만 빼고는 전원 라인을 내렸다.
2-0 점수를 그대로 굳히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당연하지만 한국은 라인을 끌어올리고 스페인의 진영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최준호에게 걸던 압박마저 풀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 골을 먹고 10분 정도 흘렀을 무렵.
3선 가까이 내려가 공을 받아 천천히 드리블하던 최준호는 아주 자유롭게 경기장을 훑었다.
‘날 이렇게 자유롭게 두는 건 실수하는 건데 말이야?’
순간적으로 연습 게임이 생각이 난 임효원이 자신에게 붙어 있는 수비수 둘을 보았다.
– 주장. 4번이 발도 느리고 순간적인 움직임도 굼떠. 침투하려면 4번 옆으로 치고 나가.
‘저 녀석은 경기 중에 그런 걸 어떻게 보는 거야?’
최준호는 가까이 있을 때마다 이런저런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4번이라?’
임효원은 4번을 달고 있는 미란다를 확인하고는 잽싸게 몸을 틀었다.
정말 최준호가 이야기해준 것처럼 자신의 스피드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자신의 눈앞에 공이 뚝 떨어졌다.
‘와, 이 미친 녀석!’
– 툭툭!
순식간에 미란다를 제치고 침투한 임효원은 공을 빠르게 치며 쇄도했다.
역동작에 걸린 가야몬이 죽어라 뛰었고, 골키퍼도 튀어나왔지만, 모든 상황은 임효원에게 유리했다.
대한민국 17세 이하 간판 공격수답게 침착하게 공을 골대 구석으로 툭 차 넣었고, 골대가 가볍게 흔들렸다.
임효원은 골 세레머니를 펼치기 전에 부심을 봤지만, 부심의 기는 올라가 있지 않았다.
그제야 팔을 빙빙 휘두르면서 가슴 벅참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야야야야야!!!”
스페인의 감독 호세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단체로 달려가는 걸 보면서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저 망할 21번.’
오늘은 계속 공을 받아서 침투하는 플레이만 하였다.
그래서 그를 굳이 압박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는데, 3선에서 저런 미친 패스를 넣을 줄이야!
‘니제르에서 보여준 게 우연이 아니었어.’
사실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인도에 왔다가 약간의 해프닝 때문에 선수들이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버스 기사가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준 덕분에, 선수들은 10시간 가까이 버스만 타고 이동했고.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브라질과 붙었으니, 후반전에 체력 부족으로 역습을 당했을 수밖에!
니제르는 한국과 더불어 약팀이긴 하지만, 체력이 좋고, 키가 매우 크며, 발 빠른 선수가 많다는 점 때문에 체력이 빠진 후반에 치명적인 일격을 넣을 수 있는 팀이었다.
한국을 이기고 니제르를 이겨야 안정적으로 본선에 진출할 수 있으니, 호세는 선수들의 체력을 아끼고 싶었다.
가야몬에게 임효원에 대한 전담 방어를 지시하고, 스트라이커인 아벨에게 최준호를 괴롭히라는 지시를 내린 후에 수비 전술을 그대로 유지했다.
감독의 치밀한 전술 싸움이 그라운드에 펼쳐졌고, 이후 한국과 스페인은 공방전을 벌이며 후반전으로 접어들었다.
**
후반 22분경.
한국은 계속 공격을 퍼부었고, 스페인은 잘 막아내는 듯했다.
‘아, 돌아버리겠네.’
오른쪽 윙어 임창오가 계속 페널티 에어리로 진입하니 어쩔 수 없이 상대팀 풀백도 같이 이동해야 했다.
그 빈공간을 박기수가 치고 달리면, 최준호가 교묘한 발놀림으로 패스를 넣어주었다.
아벨 루이스가 최준호에게 붙어 있었지만, 그의 수비력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좀 더 큰 몸으로 밀어붙여 방해하려고 했지만, 최준호는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또다시 총알처럼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공을 보며 아벨 루이스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나한테 왜 수비를 시키는데!’
그 공은 여지없이 달리는 박기수에게 연결이 되었고, 그를 막기 위해서 미드필더 카를로스가 딸려 나갔다.
– 타타닥
그리고 카를로스가 있던 공간을 향해 최준호가 뛰었다.
아벨 루이스는 몸으로 버티며 자신을 돌아 뛰는 최준호의 등을 보고는 힘들게 스피드를 올렸다.
‘이 녀석은 아시아 레벨이 아니야. 감독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입에서는 벌써 단내가 나고 다리는 무거워지고 있었다.
주력은 훨씬 빠른지라 금세 따라잡았지만, 이렇게 몇 번 더 하면 다리에서 쥐가 날 것만 같았다.
무슨 요요 테스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전방과 후방을 빠르게 오가는 최준호 덕분에 죽을 맛이었다.
박기수는 공을 끌고 사이드까지 내달렸다가 카를로스를 앞에 두고 헛다리 짚기를 하였다.
하지만 그가 오른발만 쓸 수 있다는 걸 눈치챈 카를로스가 영리하게 다리를 집어넣었고, 공은 그의 발에 맞아 굴절되어 골라인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한국의 첫 코너킥이었다.
코너킥을 차러 온 최준호는 볼을 잡고는 골대를 보았다.
‘그렇게 공격을 퍼부었는데, 첫 번째 코너킥이라니. 저것들 수비도 장난이 아니야.’
무려 스페인이었으니까.
최준호는 헐떡이는 숨을 잠시 고르고는 공을 라인에 살짝 걸쳐 놓았다.
그리고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선 다음 양손 검지를 올렸다.
‘니어포스트.’
김우영은 최준호가 어디쯤으로 공을 차줄지 눈여겨보았다.
이미 약속이 된 플레이.
그리고 김우영은 최준호의 킥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이 모두 파 포스트 쪽에 자리를 잡자, 스페인 선수들도 대인방어로 하나씩 달라붙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키가 큰 미란다가 김우영에게 붙어 있었지만, 미란다의 키는 184cm, 김우영은 키가 191cm 였다.
더 큰 키와 덩치를 가졌음에도 순간적인 움직임은 김우영이 훨씬 빨랐고, 점프도 높았다.
몸싸움은 뭐… 압도적이었고.
– 뻥!
최준호가 공을 차는 순간 페널티 에어리어에 있던 선수들이 죄다 문전 앞으로 쇄도하였다.
다만 김우영만 대각선으로 움직였는데, 손으로 막으려는 미란다의 움직임을 씹고 어깨를 집어넣으며 전차처럼 밀고 들어갔다.
“어..억!”
몸싸움에 밀린 미란다가 균형을 잃고 뒤뚱거리는 사이, 최준호의 날카로운 코너킥을 보며 김우영이 니어포스트 앞에서 점프를 뛰었다.
– 탁!
김우영은 공이 이마에 닿았다고 판단하는 순간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 철렁!
김우영의 머리에 맞고 총알처럼 반대 구석으로 날아가는 공이어서 골키퍼는 손도 댈 수가 없었다.
“우아아아아!!!”
김우영이 괴성을 지르며 벤치로 달려들었고, 그라운드에 뛰는 선수들도 모두 김우영을 따라 달렸다.
박정수도 두 손을 번쩍 들고 기합을 터트렸다!
“이얏!”
유일하게 스페인보다 앞선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높이였다.
큰 키와 몸싸움에 매우 능한 김우영과 그의 머리에 정확하게 공을 줄 수 있는 최준호라는 존재!
첫 코너킥이었고, 저들의 마크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한 방에 촘촘한 거미줄 같던 스페인의 수비가 무너졌다.
“최고다! 이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