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48)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48화(48/184)
48화 한일 더비 16강(1)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끝으로 일본은 100년에 걸친 계획을 세워서 축구 부흥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100만명에 달하는 풀뿌리 선수들과 100명이 넘는 해외파 선수들, 평균 관중 25,000명의 J리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국 프로 리그를 성장시켜 언젠가는 월드컵 우승을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바르셀로나 소속의 16세 공격수 쿠보 다케후사를 중심으로 짜임새 있는 축구를 하였다.
발이 빠르고 개인기가 좋으며 골 결정력까지 보유한 이 유망한 공격수도 위험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최고라고 손꼽히는 빌드업 축구가 더 문제였다.
예선 전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한국 기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더니 박정수 감독은 휴대폰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협회 누구, 어디 누구, 누구누구누구누구…!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버린 박정수는 잠시 전술판을 보며 고민에 들어갔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더비.
한국으로서는 절대로 질 수 없는 경기였다.
유럽의 강팀들은 굉장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가끔씩 말도 안 되게 패배하는 경우가 있었다.
강하다는 자부심이 만들어낸 일종의 자만심과 태만 때문이었는데, 일본과의 더비는 이게 없었다.
더 많이 뛰고, 더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집중하고, 더 많은 능력과 조직력을 끌어내는 팀이 이기는 경기였다.
역사적으로 그러했다.
과거 일본 선수들은 몸싸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질척하게 붙어서 괴롭히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월드컵 명단의 일본 선수들은 대부분 해외 유학파이고, 일부 17세 선수들은 J리그에서 뛰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이게 통할까 의문이기도 싶었다.
전술적으로는 쓰리백 전술을 쓰고 있었으며 미드필더진 세 명도 현재 J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이었다.
최준호가 미드필더진을 끌고 이들과 제대로 싸워줘야만 승산이 보이는 경기였다.
쿠보가 강력한 스트라이커이긴 하지만, 비슷한 유형의 임효원이라는 스트라이커를 한국도 보유하고 있었고, 박기수는 이번 월드컵을 기점으로 포텐셜을 터트리고 있었다.
센터백 김우영이 후방에서 제공권을 가져올테니!
‘스페인 전보다는 쉽겠지만.’
피파 랭킹이 한국보다 훨씬 높은 일본은 한국만 만나면 이상하게 패배를 많이 했고, 아마 이번 경기에 이를 갈고 나올게 분명했다.
‘그래도 난적이야.’
박정수는 눈을 돌려 대진표를 보았다.
‘일본을 이기고 올라간다면!’
우습게도 독일, 프랑스, 영국, 브라질과 만날 일이 없었다.
만난다면 결승전에서 저들 중 한 팀과 만날 것이다.
그 만큼 다시 없을 최고의 대진운이었다.
일본 역시 한국을 꺾고 올라가면 결승전까지 직행할 수 있다고 생각할테니, 아마도 굳은 결심을 하고 나올게 분명했다.
“무조건 이겨야해.”
다만 문제는 쿠보가 우측 윙어라는 점이었다.
‘왼쪽 풀백이 중요한데.’
**
“웃긴 놈들이네. 왜 지들 선수단한테 가서 취재나 할 것이 왜 여기에 진을 치고 있냐?”
눈에 띄기만 하면 일본 기자들이 질문 공세를 펼치는 바람에 한국 선수들은 호텔에 꽁꽁 묶여 있었다.
영어를 쓸 줄 아는 선수라곤 최준호를 제외하곤 김우영 뿐이었는데, 훈련하는 것 이외에는 만사 귀찮은 듯 방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물론 밖에서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게 이유이긴 했지만.
“무슨 정보라도 뺄려고 하겠지. 우리가 순진한 줄 아나봐?”
“맞아. 저 짜증나는 것들이 질문을 해도 아무 것도 말하지마.”
한국 선수들 역시 월드컵 16강이라는 경기라는 것 이외에도 상대가 일본이라서 그런지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이 경기 지면 집에 돌아오지 말래.”
“저런! 그건 좀 심했다.”
“사실 나도 비슷한 말을 들었어.”
그들의 대화와 무관하게 골키퍼 박준용은 한쪽에서 홀로 타로를 뽑고 있었다.
<파산, 개선 장군, 조상신>
한참 곰곰하게 생각하고 있던 박준용이 느닷없이 만세를 여러 번 터트렸고, 대화를 나누던 선수들은 <저 새끼 뭐지?> 라는 표정으로 박준용을 훑었다.
“삼일절 만세 제창인가?”
“크크크크.”
“하여튼 쟤도 이상한 구석이 있어.”
최준호는 후원사에서 제공된 고급 프로틴 음료를 쪽쪽 빨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것 저것 인터뷰 하다보면 일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자신이 마크할 선수에 대한 이야기 같은 조금은 민감한 사항들이 새어나갈 수도 있었다.
한일전이 보통 더비도 아니다 보니 기자들도 충분히 그럴수도 있긴 했다.
‘정보를 빼낸다라.’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최준호는 히끗 웃었다.
지금 U-17에 선수들 중 절반은 최준호도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U-20, 올림픽, 아시아컵, A매치, 월드컵 예선, 친선 대회 등등 엄청나게 많은 국제 대회를 통해서 겪고 또 겪은 또래의 선수들이었다.
대표팀 전력 분석팀을 통해서 수많은 습관과 특성을 익혀서 경기에 써먹기도 하고.
물론 성인이 된 그때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형성된 습관을 고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최준호는 1층 버튼을 눌렀다.
축구 경기가 단순하게 승부를 가르는 아마추어 대회라면 순수하게 실력만 가지고 대결하는 게 맞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조금 다르긴 했다.
감독들도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수를 쓰고, 뒷공작을 펼치고, 상상을 뛰어넘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엄청난 돈이 걸린 세계니까.
그런 세계에서 프로 선수가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는 건 승리였다.
최준호의 정신 세계는 여전히 승리에 미쳐 있는 프로의 것이었고.
1층으로 나가자, 로비에 있던 일본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무려 7명이나.
한국 선수들이 거주하는 호텔인데 한국 기자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한국의 경기를 줄곧 봐온 나카무라는 최준호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얼른 몸을 일으켰다.
최약체팀 한국의 돌풍은 그의 발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말 수준 높은 플레이를 하였기 때문이다.
수첩을 챙겨 들고 가장 먼저 최준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일본식 발음이 섞인 영어로 말했다.
“최준호 선수 인터뷰 좀 가능하겠습니까?”
공손한 요청에 최준호도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자 일본 기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예선전에서 미친 듯한 실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의 외모는 여전히 15세의 것이었다.
곱상하고, 착해 보이고, 순수함이 가득해 보이는 어린 선수.
“이번 경기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한국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본 선수들의 약점이 너무 확실하니까요.”
한국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약점이 확실하다니?
일본 기자들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까?
“물론 그렇죠. 가령 37번을 달고 있는…”
**
꽤 오랫동안 시작된 최준호의 인터뷰 내용은 곧바로 속보라는 이름을 일본 열도 전역에 퍼졌다.
선수 하나하나를 콕 집어 플레이 스타일과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최준호의 입에서 나오자 발칵 뒤집힌 기자들과는 달리 U-17을 이끌고 있는 일본의 감독 모리야마 요시로는 그 기사를 꼼꼼하게 읽어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맞는 게 하나도 없군. 아무 말이나 주절대고 있어.”
그리곤 이내 혀를 찼다.
“기자라는 사람들이 제대로 검증된 정보를 써야지. 이게 뭐야? 쪽팔리게.”
오랫동안 선수를 살펴온 모리야마는 기사와 함께 올라온 인터뷰하는 최준호의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가든 튀는 놈들이 있지. 이런 녀석들은 축구판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해.”
유소년 때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진 선수들은 정말 어마어마하였다.
최준호 역시 그런 녀석이 될거라고 생각한 미우라는 선수단들을 불러 언론 기사의 내용을 신경쓰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독의 생각일 뿐이었다.
“히라카와 진짜야? 너 빨간색 여자 속옷 입어?”
“미쳤어? 그런 걸 왜 입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선발 미드필더인 히라카와 레이는 불안해졌다.
‘아니, 그런 걸 어떻게 안 거야?’
일종의 부적 같은 거였다.
이걸 입을 때는 경기가 잘 풀리는 느낌이었으니까.
“신페이, 너 진짜 경기 전에 생버섯 먹어?”
“그런 맛 없는 걸 왜 먹어? 감독님이 말했잖아. 믿지 말라고.”
하지만 신페이 역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팀 동료도 감독도 모르는 이야기를 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한국인이 알고 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내 은밀한 습관을 안다는 건… 그 녀석 하는 말이 정말 사실일까?’
감독의 신신당부가 있었지만,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신페이였다.
**
뒤늦게야 최준호가 일본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을 안 박정수는 최준호를 호출하였다.
그의 인터뷰 내용에는 이쪽 전술이나 한국 선수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고, 죄다 일본 선수들에 대한 기사 뿐이었지만, 선수 한 명 한 명을 콕 찝어 이야기한 점 때문에 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네, 감독님.”
“여기 앉아라.”
“네.”
과거 뒤스부르크 경기 당시 카메라 앞에서 엉덩이를 깐 최준호였다.
그가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톡톡 튀는 성격이라는 걸 박정호는 생각하면서,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 때문에 부르셨죠?”
“그래. 꽤 많은 이야기를 했더라?”
“걱정마세요.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안했으니까요.”
대표팀에서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건데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한 녀석이었다.
“그랬을 거라고 믿는다. 다만 일본 선수들에 대해서 말한 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불렀다.”
박정수의 말에 최준호는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벌써 감독님 귀에 들어간 걸 보니, 일본 열도 전역에 속보가 떴나 보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축협에서 급하게 전문을 보냈거든.”
“하하하. 그렇군요. 사실 일본 기자들이 워낙 심심해 보였거든요.”
일본 기자들이 심심해 보였다는 이야기에 박정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장난삼아?”
“에이! 장난할 시간에 스트레칭이라도 한 번 더 하죠.”
확실히 최준호는 시간을 굉장히 아껴 쓰는 선수였다.
잘 때 확실히 자고, 먹을 때 확실히 먹고, 선수들과 친하게 지낼 때 확실히 친하게 지내고.
그 외에는 철저하게 개인 훈련에 몰두하였으니까.
그렇다는 건 의도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박정수의 궁금증이 커졌다.
“사실 대부분은 생각 없이 막 이야기한 거에요.”
“…대부분은?”
“제 소속팀에 일본 선수가 한명 있어요.”
“…오카자기 신지?”
“네. 맞아요. 조금씩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좀 섞었어요.”
“…섞어?”
박정수는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짓 속에 진실을 하나씩 숨겨 놓으면, 사람들은 가끔 거짓말도 믿어버리더군요.”
“음?”
순간 박정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거짓을 믿는다는 이야기는 약점이라고 이야기한 부분을 일본 선수들이 약점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약점이라고 최준호가 이야기한 부분은 사실 그 선수의 강점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자신의 강점을 내일 경기에서 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이 녀석 진짜 15살이냐?’
“감독님이라면 제 말뜻을 이해해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충분히 이해했다.”
최준호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방문을 나서려고 했다.
“준호야.”
“네. 감독님.”
“이번 월드컵 목표 뭐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승이죠.”
최준호가 나간 뒤 박정수는 한참 동안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승리를 위해서는 뭐든 하겠다는 최준호의 의지가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졌다.
축구는 스포츠이기에 스포츠맨쉽이 매우 중요하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Mala Leche가 필요했다.
스페인어로 썩은 우유라는 뜻으로 승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열망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을 가진 선수들, 세르히오 라모스처럼, 팀을 영광으로 이끈다는 걸 박정수는 지도자 수업 과정에서 이미 배우기도 했다.
“저 녀석…”
한국에서 축구 교육을 받았다면 나올 수 없는 유형이었다.
어쩌면 뒤스부르크에서 엉덩이를 깐 것도 팀의 핵심 골키퍼가 더 열심히 뛰도록 채찍질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덕분에 내일 경기가 수월해지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