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52)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52화(52/184)
52화 U-17 월드컵 결승전(2)
결승전이라고는 하지만, 영국이 압도적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전반이 15분 정도 지나가고 있는데 영국은 이미 8번의 슈팅을 때렸다.
5개는 수비수들의 블럭킹에 걸렸지만, 3개는 골대에 빨려 들어가는 골이었다.
“으랏!”
거의 날 듯이 몸을 날려 골대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9번째 슈팅마저 잡아내 버린 박준용은 재빨리 일어나 왼쪽의 김창진을 향해 공을 던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공격법이라고는 역습뿐이었다.
하지만 김창진은 15분 내내 필 포덴에게 밀려서 존재감이 완전히 삭제된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처음 출전이라 엄청나게 긴장까지 해서인지 실수도 잦고, 터치가 너무 길었다.
– 툭!
공격이 끝난 후에 곧바로 전방위 압박을 하는 영국.
필 포덴은 자신의 슈팅이 막히자마자 김창진을 향해 달려들었고, 터치가 길어 멀어진 공을 잽싸게 가로채기하였다.
그리곤 패스를 하는 척 김창진을 속여서 오른쪽으로 파고들어 드리블을 시작하였다.
“다 들어와!”
역습하려고 뛰어 나가려던 최준호조차 역동작에 걸려서 수비 가담이 느렸고, 필 포덴은 쇄도하는 깁스 화이트에게 패스를 주는 척하며 공을 한 번 접고는 한 박자 빠른 왼발 슈팅을 날렸다.
오늘 미친 선방 쇼를 벌이던 박준용조차 필 포덴의 슈팅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골대 구석에 박히는 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필 포덴은 뒤늦게 수비 백업에 들어온 최준호를 가리키며 비웃음을 지었고, 이내 팀 동료들과 함께 세레머니를 하였다.
‘하, 저 미친 자식. 나이가 어려도 클래스는 클래스라는 건가?’
한 골을 먹었다고 해서 공격을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은 여전히 8명이 전방위 압박을 하였고, 뒷공간을 대비하여 수비수 2명만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명만이라도 압박을 뚫고 나올 수 있다면 어떻게든 역습하겠는데, 아무도 뚫지를 못했다.
최준호 주위에는 2명이 선수가 상시로 어슬렁거리며 패스길을 다 차단해서 공을 거의 잡지를 못했다.
이번에는 그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나중석이 압박을 못 이겨 패스 실수가 나면서 허드슨 오도이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주었다.
– 뻥!
하지만 신들린 듯한 박준용이 그 공을 선방해 내었는데, 운이 없게 영국의 스트라이커 브루스터 정면이었다.
– 뻥!
하지만 그 공은 최준호가 몸을 날려 블록을 하였는데, 필 포덴이 떨어지는 공을 발리슛으로 한국 골대를 찢어버렸다.
필 포덴은 최준호를 가리키며 손가락 2개를 올리고는 세레머니를 시작했다.
‘…’
“정신 안 차리지!!!”
옆줄 밖에서 박정수가 고함을 쳤다.
대부분의 선수가 빠른 템포의 공격과 전방위 압박에 정신이 나가버린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예측하고 계속 움직여!!!”
하지만 영국은 아직 배가 고프다는 듯 계속 한국을 몰아쳤고, 전반 28분에 김우영이 순간적인 깁스 화이트의 움직임을 놓치면서 파울을 하고 말았다.
결정적인 기회를 방해했기에 노란 카드까지 수집한 상황에서, 필 포덴은 프리킥을 때려 또다시 한국의 골대를 흔들어 버렸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최준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가볍게 윙크까지 해준 뒤에 세레머니를 하였다.
최준호는 차가운 표정으로 골 세레머니를 하는 필 포덴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17세에 맨시티 1군 스쿼드에 들어간 게 괜한 이유가 아니었네.’
최준호는 이내 축 처진 선수들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이미 세 골이나 퍼부은 영국은 계속 한국을 몰아붙였고, 전반 41분경 필 포덴이 또 다시 김창진의 공을 가로채기 해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들어갔다.
김우영이 달라붙자 뒤에서 달려오는 오클리부스에게 패스를 주었고, 그는 강슛을 때렸지만, 최준호가 모든 힘을 다해 몸을 날려 헤더로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공을 잡은 매키크란이 다이렉트 슈팅을 때려 한국 골대를 흔들어 버렸다.
박준용은 오클리부스의 강슛을 막기 위해 몸을 날린 상태여서 전혀 방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으아아앗!”
답답한 김우영의 괴성 소리가 울렸고, 영국 선수들은 가볍게 뛰면서 세레머니를 했다.
전반 끝나기도 전인데 벌써 4골.
그리고 구멍은 너무나 확실했다.
윤태용이 빠진 왼쪽 윙백 자리.
성인이 아이를 가지고 놀듯 필 포덴이 김창진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그라운드에 멍하게 있는 김창진은 더 이상 뛰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것 같았다.
“감독님.”
스텝들도 절망적인 표정으로 박정수를 보았다.
돌이키기 늦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자칫했다간 창진의 축구 인생이 붕괴할 수도 있었고.
“윤수야.”
지금 왼쪽 윙백 자원은 장윤수 하나뿐이었다.
원래 오른쪽 풀백이 주 포지션이었지만, 그는 가끔 왼쪽에서도 뛰곤 했었으니까.
“네, 감독님.”
징계도 징계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따질 수가 없었다.
“준비해라.”
장윤수는 입술을 꾹 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윤수가 몸을 달구는 사이 세레머니를 끝낸 필 포덴이 최준호 곁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좀 있다가 우승컵은 만지게 해줄게. 아, 이참에 스페인 기록도 갈아치워야겠다.”
최준호는 눈에 힘을 확 주고는 필 포덴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에 을룡타를 갈기고 싶었다.
**
– 선수 교체!
전반 44분.
김창진이 나가고 장윤수가 들어왔다.
한국으로서는 굉장히 이른 선수 교체였다.
‘선발이 저렇게 형편없는데, 교체가 얼마나 잘하겠어?’
필 포덴의 눈에는 김창진이나 장윤수나 비슷비슷하게 보였다.
번호만 달랐지, 쫙 찢어진 눈매도 똑같았고, 스포츠머리도 같았다.
키도 엇비슷했고, 몸도 비슷했고, 심지어 축구화 색깔마저 같았다.
‘실력 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김창진을 상대하듯 가볍게 공을 툭 치며 드리블을 하는 순간 우악스럽게 장윤수의 어깨가 쑥 들어왔다.
– 퍽!
거의 내팽개치듯 날아가 터치라인을 몇 바퀴 구른 필 포덴은 황당한 눈빛으로 장윤수를 노려보았다.
‘저 새끼가 일부로?’
표정 없는 무뚝뚝한 장윤수의 얼굴을 보던 필 포덴은 입술을 이죽거렸다.
‘해보자 이거지?’
어차피 전반전에 4-0이었고, 한국이 이 점수를 뒤집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필 포덴은 좀 더 페이스를 올려 장윤수 앞에서 개인기를 부리며 제치려고 했다.
“으악!”
하지만 공을 뺏으려고 집어넣은 장윤수의 발이 필 포덴의 발등을 건들었고, 필 포덴은 이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주심이 휘슬을 불고 달려들자, 무뚝뚝한 표정의 장윤수가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심판을 보았다.
그리고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너 내가 보고 있어? 세 번째 그러면 경고다?”
“네.”
심판의 말에 장윤수는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수비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장윤수는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왼쪽이 무너지는 바람에 말도 안 되는 점수로 지고 있다는 것을.
공격은 못하더라도 눈앞에 저 작은 녀석만큼은 경기 끝날 때까지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질 것이라고.
‘넌 내가 잡는다.’
벌떡 일어난 필 포덴은 붉게 물든 얼굴로 장윤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카드 한 장 안 꺼내는 심판을 보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최종 수비라인과 미드필더 라인을 오가면서 수적 우위를 만드느라 체력이 많이 소진된 최준호는 왼쪽 라인에서 일어나는 신경전을 보며 희미하게 입술을 올렸다.
왼쪽은 이제 김창진이 있을 때처럼 무기력하게 뚫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좀 더 공격에 신경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였고.
전반전은 필 포덴과 장윤수의 신경전으로 시간을 잡아먹고 끝이 났다.
**
그리고 후반전.
경기장에 모인 한국 선수들.
아주 무거운 분위기였다.
“형들.”
막내인 최준호가 입을 열었다.
“난 아직 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기고 싶어.”
다들 최준호를 보았다.
“이 경기 끝나고 트로피를 들고 싶어. 내 평생소원이었거든.”
“… 이 자식아, 그런 거 다 평생소원이거든?”
“그러니까! 자, 힘내자.”
최준호가 손을 내밀자, 다들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엎기 시작했다.
“나도 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뚝뚝하던 장윤수가 손을 얹으며 말하자 주장인 임효원이 숨을 깊게 쉬었다.
“말리 때도 우리 이겼잖아? 준호랑 윤수 말처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 경기장에서 쓰러져 죽는다고 생각하고 뛰자. 자, 화이팅!”
“화이팅!”
선수들이 경기장에 자리를 잡고서 주심의 휘슬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한국의 공격.
영국 선수들이 일제히 한국 진영으로 달려들었고, 한국 선수들도 이제는 골을 뽑기 위해 영국 진영으로 달려들었다.
임효원이 찬 공은 최준호에게 향했고, 최준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깁스 화이트를 보며 원터치로 오른쪽 공간을 향해 패스를 찔렀다.
시작하자마자 달린 박기수가 그 공을 받아서 치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순간적으로 영국 진영에 한국 선수가 더 많은 상황이 되었다.
공격 일변도로 달리던 영국의 공격수들이 당황에서 다시 수비하러 들어왔고, 박기수는 자신을 향해 무섭게 돌진하는 영국의 왼쪽 풀백 판조를 보았다.
전반전에 박기수는 내내 수비만 하였는데, 이제는 거꾸로 박기수가 판조를 공략하는 형세였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공격에 눈을 뜬 박기수는 달려드는 판조가 몸싸움을 걸려고 하는 순간 공을 앞으로 툭 차고, 있는 힘껏 가속하였다.
판조의 어깨에 걸려 조금 휘청거렸지만, 박기수는 그를 따돌려 버렸다.
임효원과 임창오가 투 톱으로 페널티 에어리어로 뛰어들고 있었고, 두 명의 센터백은 그들을 막느라 빠르게 접근하는 박기수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슈팅?’
순간적으로 중거리 슈팅 기회가 났지만, 자신감은 없었다.
그 순간!
“패스!”
뒤에서 들려오는 최준호의 목소리.
박기수는 그를 확인하고는 바로 패스를 주었다.
“들어가!”
최준호의 말에 박기수는 페널티 에어리어로 진입했고, 최준호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매키크란과의 몸싸움에서 버티며 다이렉트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공을 찔러넣었다.
2대1 패스.
박기수는 오른발에 안착한 공을 과감하게 때렸다.
하지만 영국의 골키퍼 앤더슨이 몸을 날려 선방을 하였다.
공이 튀어나오는 순간, 임효원이 영리하게 임창오를 스크린으로 사용하여 게히를 따돌린 후에 슬라이딩으로 공을 골대 안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나올 것 같지 않은 골이 후반 시작하자마자 터졌다.
임효원이 너무 기뻐 악을 지르며 세레머니를 하는 사이 최준호는 골대 안의 공을 들고 묵묵하게 센터서클로 뛰었다.
‘박기수가 판조보다 빨라. 계속 이용해야겠어.’
예상치 못한 이른 골에 영국 선수들은 개의치 않았다.
워낙 자주 먹는 골이다 보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 많이 넣으면 되지.’
영국의 공격은 언제나 필 포덴에서 시작되었다.
발재간으로 한 명을 따돌리면 다른 선수가 뛰쳐나올 수밖에 없고, 그 공간에 침투하는 선수에게 공을 주거나 직접 해결하는 식의 공격이었는데, 후반전의 필 포덴의 공격력은 전반전과 비교하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후반 22분경.
‘이 새끼! 또 잡네?’
그간 경기를 뛰지 않아 체력적으로 팔팔한데다가, 결승까지 올라갈 동안 1분도 뛰지 못한 설움, 경기를 뛰고 싶다는 욕망, 팀에 미안하다는 마음이 모두 범벅이 된 장윤수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기량 이상의 분투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필 포덴을 막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를 막겠다는 집념이 몸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몸싸움은 계속 필 포덴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였고.
특히 장윤수 특유의 무표정 때문인지 필 포덴은 평소보다 더 흥분하였다.
“뭐 이런 개 같은 자식이 다 있어?”
짜증이 잔뜩 난 필 포덴이 잡혀 있는 자신의 소매 팔을 크게 휘둘렀다.
– 퍽!
그의 팔꿈치에 장윤수는 턱을 맞아, 신음을 내며 나뒹그라졌다.
– 삑!
심판이 달려와 노란 카드를 꺼내 필 포덴에게 주었다.
그러자 화가 난 필 포덴이 자기 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심판 똑똑히 봐. 이 녀석 계속 반칙하고 있어!”
“…한마디만 더 하면 퇴장이다?”
퇴장이라는 말에 필 포덴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몸을 휙 돌렸다.
그 순간.
빠르게 달려온 최준호가 공을 땅에 찍자마자 바로 스루패스를 넣었다.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퀵 플레이였다.
임효원이 눈치를 채고 순간적으로 넋 놓고 있던 게히 옆을 스치듯 달려 나갔다.
임효원은 택배처럼 배달된 공을 한 번 터치하고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뛰쳐나오는 골키퍼 앤더슨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툭 밀어 찼다.
– 철렁!
영국 선수들이 프리킥 파울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주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바로 골을 인정해 버렸다.
최준호가 공을 땅에 찍는 걸 분명하게 보았으니까.
임효원의 두 번째 골.
골이 들어가자 최준호는 재빠르게 쓰러져 있는 장윤수에게 달려갔다.
정신을 차린 장윤수는 달려오는 의료진들에게 오지 말라고 손짓을 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요? 형?”
장윤수는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보고는 피가 약간 묻어나온 걸 보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잘했다. 다음에도 꼭 그렇게 해라.”
장윤수는 최준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바로 자신의 자리로 뛰어갔다.
느닷없이 나온 두 번째 골에 박정수는 움츠리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장윤수와 최준호를 번갈아 보았다.
‘저 녀석들….’
2-4
영국의 경기력이 약간 산만해졌다는 걸 박정수는 바로 눈치챘다.
남은 시간은 23분.
그 안에 경기를 뒤집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이 결승전은 17세 이하의 선수들의 게임이었다.
수많은 지시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박정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스스로 하도록 그냥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