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54)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54화(54/184)
54화 잘츠부르크(1)
Ce sont les milleures equipes….
(그들은 최고의 팀이다.)
시계가 6시를 가리키자 휴대폰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 공식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결승전에서 마지막 동점 골이 되었던 축구공을 안고 자던 최준호가 부스스 일어났다.
눈이 떠지지도 않는데, 그는 부랴부랴 잠옷을 벗고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일어났냐?”
“응? 벌써 일어났어?”
“그럼. 며칠 후면 또 헤어져야 하는데.”
구수한 된장찌개와 함께 피곤한 얼굴이지만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최현식.
최준호는 그 모습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두부 된장찌개?”
“그럼. 소금이 몸에 좋지 않으니까, 최대한 싱겁게 했다.”
“고마워. 나가서 몸 좀 풀고 올게. 매일 하던 게 있어서.”
“그러거라.”
독일로 떠날 때 살이 조금 붙긴 했지만, 여전히 뼈밖에 없다고 느낄만큼 말랐는데.
이번에 같이 목욕탕에 갔는데 군살 하나 없고, 잔근육들이 자잘하게 있는 게 엄청나게 노력을 많이 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175cm에 69kg이라고 하는데, 딱 보기 좋은 몸이었다.
엄청난 경기를 뛰느라 많이 피곤할 텐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러 나가는 게 기특하기만 했다.
최준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이틀 내내 죽치고 앉아 있던 기자들도 어제부터는 슬슬 보이지 않았다.
영국은 곧 프리시즌에 돌입할 테고, 프리미어 리그 선수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으다다다다.”
스트레칭을 하던 최준호는 신음을 내었다.
사흘에 한 번씩 풀타임으로 경기를 뛰었고, 매 경기 거의 사력을 다해서 뛰었다.
경기 끝나고 웃는 척 센 척했지만, 서 있기도 힘들었던 건 최준호도 마찬가지였다.
도르트문트의 프리시즌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였고, 최준호는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가기 전까지 회복에만 전념하였다.
‘그래도 꽤 많이 배운 대회였어.’
거의 모든 기술을 몽땅 써먹어 보았다.
수비 기술은 훨씬 숙련되었고, 상대를 마크할 때 좀 더 빠르게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훈련장에서 시간 날 때 심심풀이로 따라 하던 여러 개인기…
실제 경기에서는 욕 먹을까 봐, 실수할까 봐, 자신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15살의 육체를 이용하여 마음껏 하고 있었다.
그 개인기들도 매우 숙련되어 가고 있었고,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신감도 붙었다.
‘그렇네.’
브라질 선수들의 기술이 좋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난도 높은 개인기를 계속 사용했다는 것.
더 높은 명성, 더 많은 주급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출전 기회를 가지는 것과 가지고 있는 기술을 더욱더 갈고 닦을 수 있는 무대였다.
“으다다다다다!”
거의 1자로 쭉 찢어진 다리를 보며 최준호는 신음을 흘렸다.
‘차근차근 올라가자.’
**
“우아아아! 골든볼 수상자다!”
팬이나 기자가 말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공자철이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다행인 점은 이곳이 시끌시끌한 음식점 안 독립 룸이라는 것.
모자를 깊숙하게 쓰고 나온 최준호는 손을 내밀었다.
“사인 해드려요? 형한테는 특별하게 2개까지 해줄 수 있어.”
“하하하. 난 또 악수하자는 소린 줄 알았네?”
최준호가 손을 흔들자, 공자철이 악수를 받았다.
U-17 월드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또 한 명이 불쑥 들어왔다.
“어, 왔어?”
“네. 선배.”
공자철이 웃으며 말했고, 최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털털하게 운동복 차림으로 나온 공자철, 최준호와 달리 굉장히 댄디하게 입고 온 양희찬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야?”
“응.”
최준호가 일어나자 양희찬이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원더보이. 양희찬이다.”
“반가워요. 선배님.”
“축하한다. 나 그 경기 모두 찾아봤다.”
양희찬은 그렇게 말하고는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공자철은 서 있는 두 명에게 말했다.
“자자, 이제 앉자. 맛있는 고기를 앞에 두고 서 있는 건 범죄지.”
양희찬 역시 축구에 미친 사람 중 하나였다.
대다수 프로선수들이 휴가 시절 자기 관리 못 하고 망가지지만, 양희찬은 프리시즌이 되면 한국에 와서 프리스타일 대가가 운영하는 축구 아카데미에서 내내 훈련을 받았다.
평소에도 축구, 휴가에도 축구.
365일 오직 축구.
가족만큼 축구가 좋다고 말은 하지만, 축구가 가족보다 좋을 것 같은 축구 선수이기도 했다.
고기와 채소, 버섯을 구워 먹으며 한동안 U-17 월드컵 이야기를 하던 세 명.
“근데 엘링 홀란드는 어때요?”
“엘링?”
저번 시즌 겨울 이적 시장에 노르웨이에서 온 이적생이었다.
“못생겼어.”
그 말에 공자철과 최준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엘링 홀란드가 누구야?”
공자철은 궁금한 듯 물었다.
“노르웨이 리그 씹어먹고 온 18살짜리 공격수인데, 잘해.”
“오호 그래?”
양희찬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잠시 허공을 보았다.
“그리고 겜돌이야.”
“…겜돌이요?”
“잠깐 같은 방을 썼는데, 훈련 끝나면 방에 처박혀서 온종일 게임만 하거든.”
“무슨 게임요?”
“와우였던가? 요즘에는 롤을 하는 것 같던데.”
“아아! 미나미노는 어때요?”
“그 녀석? 다혈질 헐크야.”
“…네?”
“생긴 건 곱상한데, 경기 안 풀리면 욱하는 성질이 있어. 거 있잖아? 일본 야쿠자 영화 보면 우라라라라라! 다이죠브 대쓰! 라고 하는 거? 짜증이 나면 로커에서 시도 때도 없이 그러고 있어.”
양희찬의 말에 공자철과 최준호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사실 최준호는 양희찬과는 친하질 못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대결 구도였고, 대표팀 내에서도 자리를 두고 다툼을 하는 사이였다.
승부욕이 강한 최준호는 양희찬이 꿰찬 국가대표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 꽤 나쁜 짓도 많이 했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야.”
공자철이 눈빛을 반짝였다.
“어떤?”
“잘츠부르크에서 이 녀석을 원한다는 감독 인터뷰가 있었거든.”
양희찬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껌뻑였다.
그도 그럴 것이 휴가받자마자 한국에 날아와서 맹훈련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형? 진짜?”
그 대답은 최준호가 대신했다.
“맞아요.”
사실 최준호가 공자철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양희찬 선수를 만나보고 싶다고.
그와는 어두운 기억만 있었기 때문에 이참에 털어내 버리고 싶기도 했었다.
“희찬 선배가 있다고 해서 어떤 곳인지 듣고 싶어서요.”
양희찬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최준호를 보았다.
그 무엇보다 축구가 우선인 양희찬은 U-17이 월드컵 우승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들의 경기 영상을 모두 보았다.
단언하지만 한국팀에서 가장 돋보이는 선수는 최준호였다.
그의 패스 센스와 순간적인 탈압박 능력은 국가대표 1군 선수와 비견해도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 이런 선수는 어릴 적부터 명성을 얻는데, 최준호는 그런 게 없어서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잘츠부르크는 이번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변방의 오스트리아 리그라 세간의 평가가 박하지만, 양희찬은 올해 잘츠부르크가 돌풍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팀이었는데, 유독 미드필더 라인이 약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올 수도 있다는 거지?’
신이 난 양희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만 해. 다 알려줄게.”
“헤헤. 감사합니다!”
**
– 동현이 형. 사진 보냈으니까, 재계약 협상에 써요.
– 오케이! 고마워! 최대한 뽑아내도록 하지!
– 네. 최대한 많이요. 형의 능력 기대할게요.
김동현은 공항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찌뿌둥한 몸을 폈다.
“어이구! 더럽게 힘든 비행기 여행!”
그는 곧 휴대폰을 열어 최준호가 보낸 사진을 보았다.
양희찬과 어깨동무를 하며 밝게 웃는 모습을 한 사진이었다.
최준호와의 첫 만남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 처음 에이전트를 대하는 한국의 선수들은 자신이 갑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갑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워한다.
향후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곤 하는데, 이 녀석은 시작부터 확실히 남달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선수가 재계약 전면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전면에 나선다는 표현은 그렇고.
“스스로 판을 깔아놓을 줄이야?”
최준호가 맺은 계약은 유소년 계약이었다.
전임 계약 예약도 되어 있지 않아서, 잘츠부르크에서 500만 유로의 보상금을 준다면 최준호와 직접 계약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독일 3부 리그에서 이미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번 U-17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며 약팀을 우승까지 시킨 골든볼 수상자였다.
그의 잠재성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도르트문트도 알 것이니 무조건 잡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잘츠부르크에서 주전 공격수로 뛰고 있는 양희찬과 찍은 이런 사진이라면 도르트문트 측은 재계약 협상장에서 절대로 큰 목소리를 낼 수가 없을 것이다.
– 그냥 잘츠부르크로 가는 건 어때? 성장을 위해서는 좋은 선택으로 보이는데?
– 그곳은 도르트문트 주전이 되기 위한 발판일 뿐이에요. 1년 동안 제 능력을 증명하는 걸로 충분해요.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알죠? 그쪽 사장님에게도 적당히 둘러 말해주세요.
심지어 흔들림도 없었다.
아는 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솔직히 에이전트로서 약간의 자괴감마저 들긴 했다.
– 도르트문트 다음에 가고 싶은 구단은 어디야? 맨시티?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파리 생제르맹?
– 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근데 제 선수 생활 마지막에 있을 곳은 확실히 정했지만요.
– 어디?
– 비밀이요.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건 확실히 숨기기도 했고.
어설픈 아이가 아니라 마치 노련한 베테랑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휴대폰을 닫은 김동현은 캐리어를 끌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 세웠다.
그 역시 지금은 초짜 에이전트이지만 포르투갈의 조르제 멘데스처럼 한국에서만큼은 최고의 에이전트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잡은 줄이 얼마나 엄청난 줄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내 욕심 차리는 것보다 선수의 몸값을 키우는 게 미래의 나를 위한 것이지.’
**
“이게 다 뭐냐?”
새벽까지 일을 끝내고 돌아온 최현식은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을 보며 아침 운동하고 돌아온 최준호에게 물었다.
“내 돈 안 받는다고 했잖아.”
도르트문트와 프로 재계약을 맺으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최준호는 아버지 빚을 갚아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현식은 한 번 아들에게 손을 빌리면, 힘든 상황이 올 때마다 그럴까 봐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 아들에게 의지해서 스스로 게을러질까 봐 싫었다.
– 아들. 네 돈은 네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서 평판을 더 쌓거라.
“선물도 안 받는 건 아니지?
“……”
최준호는 차분하게 종이백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뺐다.
“이건 영양제야. 나 없을 때는 동현이 형이 챙겨줄 건데, 매일 아침 꼭 먹어. 종류는 많지만 다 몸에 도움이 되는 거고.”
“이건 아버지 옷이야. 똑같은 등산복 입고 다니지 말고. 결혼식에 다 해진 양복 입고 가지 말고. 속옷도 잔뜩 사놨어. 속옷 이틀 입지 말고.”
“이…이틀 안 입었다!”
“냉동고에 고기 꽉꽉 채워놨어. 레토르트 식품 먹지 말고. 매주 반찬이 배달될 거야. 1년 결제했으니까, 밥만 해서 먹으면 돼.”
톰 브라운이라는 로고가 찍혀 있는 수트. 셔츠, 넥타이, 신발과 벨트까지 아예 세트로 맞춰진 걸 보고는 최현식의 눈이 다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야…이게…어…얼마!”
장학금이라고 받은 2천만 원을 몽땅 아버지에게 써버린 최준호였다.
놀란 최현식을 보며 최준호가 웃음을 지었다.
“나 씻으러 갈게.”
화장실에 최준호가 들어가자, 최현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따뜻한 아들의 마음이 느껴졌고,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져 버렸다.
최현식은 몰래 숨겨두었던 케이크를 꺼내었다.
며칠 후가 최준호의 16번째 생일이지만, 그때는 독일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먼저 축하해줄 생각이었다.
**
다음 주 월요일.
주말에 독일로 넘어온 최준호는 김동현과 함께 재계약 최종 협상을 끝냈다.
– 1군 로테이션.
– 계약 기간 : 4년
– 주급 : 2만 9천 유로. 세후 주급 1만 6천 유로
– 로열티 보너스 : 75만 유로
– 출장 수당 : 6,000유로
– 득점 보너스 : 4,000유로
– 교체 미출전 수당 : 2,000유로
– 매년 급여 인상 20%
도르트문트의 최고 재능이라는 17세의 미국 국적 크리스티앙 풀리식보다 약간 더 좋은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최준호가 16세가 되는 수요일에 발효가 될 예정이었다.
아울러 최준호는 나이 제한 때문에 도르트문트에서 뛸 수 없었기에, 잘츠부르크와 임대 계약을 연이어 맺었다.
주급은 도르트문트와 잘츠부르크가 반반씩 부담하는 선에서.
1년 임대에 모든 국제 대회에 참가 가능하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김우영 역시 U-17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굉장히 좋은 프로 계약을 맺었고, 확실한 도르트문트 II의 주전 자원이 되었다.
“넌 역마살이 끼었냐? 어딜 자꾸 돌아다녀?”
“그러게, 말이다.”
“내년에는 돌아오는 거야?”
“그럼. 함께 뛰려면 열심히 해라.”
“내 친구가 이렇게 잘나가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최준호는 도르트문트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또다시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의 마요르카로 날아갔다.
잘츠부르크의 프리시즌은 풍경이 좋고 날씨가 온화한 마요르카섬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