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58)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58화(58/184)
58화 프리 시즌 연습 경기(2)
RCD 마요르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라리가에서 맹활약했던 팀이다.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3부 리그까지 떨어졌다가, 이번에 2부 리그로 올라온 상황.
잘 알아주지 않는 오스트리아 변방의 1부 리그 팀과 스페인 2부 리그 팀 간의 대결은 게임 시작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우세를 점치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 시작이 되고 나서는 잘츠부르크가 마요르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점유율을 거의 68%까지 가져왔고, 마요르카는 잘츠부르크의 기세에 눌려 공격을 전혀 못 하는 상황이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마르코 로제 감독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전반 35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골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투박해. 공격수에게 들어가는 패스가 세밀하지 않아.”
마르코 옆에 앉아 있는 르네가 입을 열었다.
후방 빌드업을 잘하고, 상대 진영까지 볼을 넣은 뒤에 최종 공격수에게 향하는 패스가 정확하지 않았다.
마요르카는 거의 밀집 수비를 하는 통에 슈팅 공간마저 나오지 않았다.
전술을 바꾼데다가 고된 피지컬 훈련 때문에 선수들의 발놀림이 투박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양희찬과 엘링이라는 괜찮은 공격수에게 공이 연결되지 못하는 건 답답한 일이었다.
마르코와 이야기를 나누던 르네는 고개를 돌렸다.
선수들이 시선이 모두 공을 가지고 있는 선수를 따라가는데, 유독 한 선수만 엉뚱한 곳을 보고 있었다.
벤치의 모든 선수가 공을 가진 선수에게 시선이 집중된 사이, 최준호의 시선은 여러 곳에 머물렀다.
아무리 능력이 좋은 선수들도 새 팀에 오게 되면 적응 기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뛰고 있던 선수들과의 연계 플레이가 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같이 뛸 동료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 팀 괜찮네?’
공이 없을 때 선수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활발했다.
끊임없이 수비수를 끌고 다녔고, 공간을 만들며 스위칭을 했다.
워낙 젊은 팀이라 그런지 활동량 부분에서 마요르카를 압도하였고, 피지컬 적으로도 마요르카가 버거워하였다.
다만 2선에서 나가는 최종 패스가 정교하지 못했다.
양희찬과 엘링에게 연결이 된다고 해도 패스 타이밍이 느려 근처의 마요르카 수비수에게 둘러싸이는 형국.
그러기에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만, 슈팅 수도 적었고 골도 나오지 않았다.
‘왜 이 팀이 내가 필요했는지 알 것 같아.’
최준호가 도전적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르네는 자신이 빤하게 보고 있음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최준호를 보고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감독이 선수들을 벤치에 앉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동료 선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라는 뜻도 있었다.
최준호의 시선 방향을 보니 열심히 머릿속에 동료의 움직임을 넣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팀에 무엇이 필요한지 눈치도 챘을까?’
르네가 조용히 마르코에게 말했다.
“슬슬 변화를 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겠어.”
이전 시즌에 전 감독이 베리샤를 미드필더로 쓰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는 미드필더보다는 윙어에 가까운 선수였다.
가운데 놓으니 그의 장기인 빠른 발이 전혀 나오질 못했다.
그렇다고 아이다라, 크사보처럼 엄청난 활동량으로 상대 선수를 압박하고 공을 뺏지도 않았고.
그의 장점인 빠른 발과 개인기는 좁은 공간 때문에 제대로 쓰지를 못하니 중앙에서 가장 쓸모없는 자원이 되어 버렸다.
마르코가 몸을 일으켜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초이.”
최준호는 감독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전반전이 끝난 후에 교체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보다 더 빨랐다.
최준호가 가까이 오자 마르코가 전술을 지시했다.
“상대가 밀집 수비를 하고 있어서 더 빠른 타이밍의 패스가 필요하다.”
“알겠어요.”
“나가서 다른 녀석들에게 네가 어떤 선수인지 제대로 보여줘.”
최준호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당연하죠!”
**
결국 전반 40분.
베리샤는 교체되는 선수 중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한숨을 쉬며 터치 라인으로 뛰어갔다.
마요르카처럼 내려앉는 팀들을 상대할 때는 어떻게 플레이를 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서로 득점하겠다고 맞부딪히는 팀들을 상대할 때는 상대 후방에 공간이 많아 자신의 빠른 발과 드리블 능력이 큰 역할을 하지만 이런 경기에서는 뭘 할 수가 없었다.
‘제길.’
베리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 채 벤치로 향하자, 마르코 감독이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했어!”
마르코는 그의 쓰임새에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라운드에 뛰어나간 최준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벤치의 공기보다 이곳의 공기가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
양희찬이 다가와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준호야. 잘해보자.”
“네. 형!”
저 멀리서 반갑다는 듯 엘링이 손을 흔들었고, 최준호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양측 다 선수 교체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왼쪽은 크사보, 중앙은 최준호, 오른쪽은 아이다라가 포지셔닝을 한 상황.
팀 훈련량이 적어 호흡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선수에게 패스가 올까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 영입된 루이스 구스타보가 적극적으로 패스를 주었다.
공을 왼발로 받은 최준호.
수비수 한 명이 달라붙었지만, 적극적으로 압박을 하지는 않았다.
‘내가 어떤 플레이어인지 파악하겠다는 건가?’
올해 32살의 마요르카 핵심 미드필더인 엠마누엘 쿨리오는 한눈에 봐도 어린 티를 팍팍 풍기는 최준호를 보았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솜털 같은 작은 수염을 보고는 멋들어진 자신의 수염을 떠올렸다.
‘꼬마.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
U-17 대회에서 골든볼을 수상한 선수라는 건 알겠는데, 청소년 월드컵과 1군 월드컵의 수준은 전혀 달랐다.
오랫동안 루마니아 국가 대표를 지내며 3번의 월드컵을 경험한 쿨리오가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사이.
‘양희찬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중앙으로 쇄도하고 있겠지?’
최준호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두었고, 자연스럽게 쿨리오도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 퉁.
그 순간 최준호가 왼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후려 찼다.
일명 트리벨라.
최준호의 노룩 패스에 속아 아무런 방해도 할 수 없었던 쿨리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
손을 들면서 왼쪽으로 가운데로 쇄도하던 양희찬은 최종 수비수 후방공간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최준호의 패스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뭐지? 이 궤적은?’
양희찬은 궤적에 감탄만 할 선수는 아니었다.
달라붙은 수비수와 몸싸움을 벌이며 빠른 발로 저돌적으로 돌진을 하였고,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공을 잡아냈다.
최준호의 창의적인 패스 한 번에 마요르카의 수비진이 무너졌고, 양희찬은 단독으로 뛰어드는 엘링을 보고는 강하게 땅볼 크로스를 올렸다.
엘링의 순간적인 속도에 반응 못 한 센터백이 뒤에서 달려와 힘껏 그의 유니폼을 당겼지만, 엘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철렁!
엘링이 방향만 돌려놓은 공이 마요르카의 골문을 흔들었다.
그토록 안 풀리던 경기.
최준호의 결정적 패스 한 방에 마요르카의 수비진이 무너졌고, 결국 골이 터졌다.
엘링은 가볍게 세레머니를 하고는 양희찬을 격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다가오는 최준호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음.”
마르코는 팔뚝에 솟아오른 닭살을 다른 손으로 슬며시 쓰다듬었다.
아주 난도가 높은 패스였다.
상대는 전혀 예측도 못 했을 것이니 패스를 방해하려는 시도조차 못 했고.
그것보다 양희찬의 움직임을 예측해야만 가능한 패스였다.
‘그게 가능하다니? 놀랍군.’
아무리 생각해도 양희찬과 합을 맞출만한 기회가 프리시즌 훈련 중에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
후반 전.
최준호에게 한 방 얻어맞은 쿨리오는 전반전처럼 공간을 절대로 주지 않기 위해서 강한 압박을 걸었다.
– 툭.
조금이라도 늦게 압박하면 최준호는 반 박자 빠른 전진 패스를 넣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압박을 걸려고 하면, 상대하기 싫다는 듯 빠른 타이밍에 백패스나 횡패스를 하였다.
‘이 자식!’
정말 얄밉게 플레이하는 최준호였다.
최준호에게서 나오는 전진 패스 한 방에 마요르카의 수비진이 무너지고, 위험한 상황이 계속 나오자, 다른 마요르카의 선수들은 최준호에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 정말 괜찮네?’
루이스 구스타보는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잘츠부르크를 선택했다.
그리고 오늘 경기를 뛰어보니 이 팀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전 답답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베르샤와 달리 최준호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중원을 조율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아이다라와 크사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뿌리는 패스의 퀄리티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공을 너무나 받기 좋게 주었기 때문에, 퍼스트 터치에서 실수도 안 했고 플레이가 점점 안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니 신이 날 수밖에.
아이다라와 크사보 역시 적극적으로 최준호에게 공을 주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임대생 최준호가 중원에서 게임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마요르카의 감독 마누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연습 게임인데.’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고 새로운 전술도 시험을 해봐야 하는데, 지금 수비하느라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사실 잘츠부르크가 오스트리아 1부 리그에서 우승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변방의 리그였기에, 마누엘은 그들과 대등한 게임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경기해보니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강팀이었다.
두 명의 공격수는 뭔가 클라스가 달랐고, 자신의 수비수들이 막기에 벅차 보였다.
그래서 일단 라인을 내리고 팀플레이를 안정시킨 다음 차츰 라인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저 21번…’
어린 동양인 선수 하나 때문에 마요르카팀 전체가 더 엉뚱한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선수 교체를 해도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가 너무 어려웠다.
아직 골이 나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마누엘은 한숨을 깊게 쉬며 듬성듬성 앉아 있는 마요르카 팬들을 보았다.
‘큰 점수 차로 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해야겠네.’
그때였다.
‘…또냐?’
붙으면 공 돌리기, 떨어져 있으면 전진 패스를 고수하던 최준호.
전반부터 계속 뛰었던 쿨리오는 조금 지쳤기에 뒤늦게 최준호에게 압박을 들어갔다.
– 툭.
그런데 그 전진 패스가 설마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엇!!”
아니!
전진 패스가 아니었다.
경기하면서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몸놀림에 쿨리오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얼마나 민첩하고 빠른지 최준호가 손을 피해 자신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버렸다.
전후반 최준호의 플레이에 강제 학습된 마요르카 선수들은 최준호가 설마 쿨리오를 뚫어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 덕분에 엄청나게 큰 공간이 만들어졌고, 최준호가 빠르게 질주하였다.
“막아!”
누가 최준호를 막아야 할지 서로 눈치를 보는 상황에 최준호는 거의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왼발을 디딤돌 삼아 슈팅 모션에 들어가는 최준호.
순간 마요르카 선수 모두가 최준호의 중거리 슈팅이 얼마나 강력한지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던 전술 코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슈팅 막아!!!”
골키퍼 로베르토가 소리를 질렀고, 엘링 홀란드를 마크하던 발레호가 허겁지겁 튀어나와 몸을 던졌다.
하지만 최준호는 슈팅하는 대신 민첩하게 오른쪽으로 한 번 더 치고는 단독으로 있는 엘링에게 공을 툭 밀어주었다.
엘링은 차분하게 터치를 하고는 골키퍼가 덮여 오는 각도를 피해 차분하게 공을 찼다.
심지어 그 상황에서 점프를 뛰어 골키퍼와 접촉하는 것을 피하는 엘링이었다.
곧이어 크게 흔들리는 마요르카의 골대!
“헤이! 초이!”
엘링이 세레머니 대신 최준호를 크게 불렀다.
최준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엘링이 크게 외쳤다.
“하나 더!”
최준호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뭐…’
결정적인 기회는 거의 놓치지 않는 최고의 득점 기계였다.
U-19에서 같이 뛰던 유수파 무코코가 효율성 좋은 BMW M시리즈라면 엘링은 페라리 수준이었다.
‘정말 놓치기 싫은 어시스트 노예인데?’
경기 내내 굳은 표정으로 있던 마르코 로제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왔다.
‘퍼즐의…마지막 조각을 찾았어.’
만약 가능하다면 레알 마드리드의 루카 모드리치를 가져오고 싶었다.
엄청난 활동량, 창의적인 패스, 2선 침투, 탈압박, 개인기, 슈팅력 모두 갖춘 모드리치라면 잘츠부르크를 챔피언스 리그에서 절대로 패하지 않게 만드는 팀으로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만 전성기의 루카 모드리치가 잘츠부르크에 올 리는 절대로 없었고.
그 대안을 찾고 찾아서 결국 최준호를 선택한 것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피지컬 때문에 루카 모드리치와 비교하기는 힘들었지만, 최준호가 이대로만 성장해 준다면 충분히 그를 능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번 챔스 기대가 되는군.”
마르코 로제의 중얼거림을 들은 르네 마리치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
2골을 먹힌 상황에서 마요르카는 라인을 끌어 올려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피지컬과 속도 그리고 엄청난 활동량을 기반으로 하는 잘츠부르크의 수비진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잘츠부르크는 벌어진 마요르카의 뒷공간을 공략하였고, 3점을 더 따내었다.
엘링이 1골을 더 추가하여 해트트릭을 하였고.
양희찬도 1골을 신고했다.
막판 세트피스 상황에서 최준호의 중거리 슈팅이 골문을 가르면서 잘츠부르크는 마요르카를 5-0으로 가볍게 눌러버렸다.
마요르카와의 경기를 끝으로 잘츠부르크는 볼리비아로 이동했다.
볼리비아는 관광하러 온 사람들이 걷기만 해도 숨이 차고 어지러울 정도로 고지대에 있었는데, 기초 대사량이 일반인에 비해 더 높은 운동선수가 얼마나 괴로울지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볼리비아?”
최준호는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2주간 볼리비아에서 전지훈련을 하며, 그곳 국가 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쩐지 피지컬 훈련을 2주만 진행될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