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60)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60화(60/184)
60화 프리 시즌 연습 경기(4)
최준호의 득점 이후 마르코는 나머지 선수들을 전부 교체하였다.
볼리비아 대표팀 역시 체력이 좋은 선수들로 모두 교체하면서 두 팀은 계속 공방전을 펼쳤다.
최준호가 열심히 뛰긴 했지만, 볼리비아 대표팀이 라인을 내리고 골문을 걸어 잠그면서 추가점을 생산하지는 못했다.
2-3
잘츠부르크의 패배.
그러나 친선 경기였고 마르코 감독으로서는 다른 후보 선수들의 기량도 확인하여야 했기 때문에 패배에 대해서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벤치 자원과 선발 간의 갭이 확실히 있어.’
오늘 경기 내용 분석을 끝낸 마르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책상 위의 서류를 잠시 덮었다.
“들어와. 거기에 앉아.”
베리샤였다.
그는 조금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네 기량은 작년보다 더 좋아졌다.”
그 말에 베리샤가 반색을 하였다.
“하지만 내 전술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오스트리아 리그 최연소 기록은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베리샤였다.
그만큼 재능이 뛰어난 건 분명한데, 그간 뛰어왔던 미드필드 위치에서는 마르코의 기대에 미치지를 못했다.
하지만 베리샤는 여전히 신경 써야 할 주전 선수였다.
“앞으로 몇 번의 기회를 더 줄 거야. 네가 주전 선수라는 위상에 걸맞은 모습을 꼭 보여주었으면 좋겠어.”
10여 분 간 감독과의 면담을 끝으로 베리샤는 우울한 표정으로 감독의 숙소를 나왔다.
‘최후 통보네.’
저번 시즌 잘츠부르크는 조금은 아슬아슬하게 리그 1위를 하였다.
베리샤도 거기에 큰 몫을 하였고.
18세의 나이에 자국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였던 자신이 불과 2달 만에 선발 경쟁에서 밀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감독을 뭐라고 할 수 없는 게….
자신이 봐도 최준호는 너무 잘했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레벨이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벤치에 앉아서 그가 플레이하는 걸 보면 가장 먼저 ‘안정감’을 떠올렸다.
절대로 공을 뺏기지 않을 것 같은? 절대로 패스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조차 그렇게 느끼는데, 팀 동료들은 어떨까?
안정감 있게 경기를 하다가도 상대 수비가 느슨해질 때는 치명적인 돌파를 하거나, 결정적 패스를 넣었다.
선발을 놓고 경쟁을 하는 자신조차 전율이 일 정도로.
거기에 중거리 슈팅은… 엘링 홀란드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보였다.
오랫동안 팀에서 프리킥을 담당하던 주장 울머도 최준호의 킥을 보고는 바로 킥커 자리를 내주었고.
‘젠장!!! 괴물이잖아!!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베리샤는 괴로운 표정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강하게 흩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란 그의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그는 그대로 숙소를 빠져나와 운동장으로 향했다.
답답한 마음에 텅 빈 운동장을 몇 바퀴 돌던 베리샤는 멈춰 서고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최준호를 졸졸 따라다니던 강아지 푸키가 자신의 다리에 몸을 비비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푸키를 보다가 무릎을 구부려 앉고서는 강아지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
대부분 선수가 45분 정도를 뛰었는데, 체력 소모가 상당했는지 볼리비아 밖으로 놀러 나가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지친 기색으로 저녁 식사를 겨우 꾸역꾸역하고서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최준호는 스태프에게 요청해서 얼음을 잔뜩 가져와 욕조에 넣은 다음 거기서 냉찜질을 하였다.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덕분에 성질이 잔뜩 돋은 상태였는데, 어떻게든 가라앉히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몸의 부기도 성질도.
‘감정대로 행동하는 낭랑 18세가 아니잖아?’
하지만 선수 한 명 한 명 이름을 언급하며 욕조에서 뭘 잘했니, 못 했니 한참 동안 투덜거렸다.
평소와 같았다면.
엘링과 함께 어울려 게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겠지만, 이곳 인터넷 상황은 그리 좋지를 않았다.
몸이 으스스해질 정도로 냉찜질을 한 그는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선수가 터벅터벅 운동장을 걷고 있었는데, 그가 베리샤라는 걸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장발한 선수는 저 녀석뿐이니까.
키도 183cm나 되고 금발에 얼굴도 제법 잘생긴 데다가 16살 때부터 오스트리아 1부 리그에 등장해서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으니 세간의 관심을 제법 받았을 것이고, 외모적으로 꾸미는 것은 당연했다.
‘나도 장발을 해볼까? 아니 파마?’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를 볼 때 결코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님을 최준호는 알 수가 있었다.
걷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니까.
프로 선수에게 경쟁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통과 의례였다.
최준호 역시 과거에 엄청난 경쟁에 시달렸고, 그 결과로 승리를 위해서 경기장 안팎에서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악동이 되었다.
그리고 에버튼에서 성장한 19살짜리 유망주 스트라이커에게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뺏겼을 때의 기분이 최준호의 뇌리에 잠시 떠올랐다.
착잡한 분노가 어린 표정이 최준호의 얼굴에 그려졌다.
‘뭐, 기분은 이해가 되네.’
하지만 베리샤가 푸키 앞에 멈춰서 몸을 웅크리자 최준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호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두 손을 뻗은 베리샤는 자기 손을 작은 혀로 핥는 푸키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귀여운 녀석.”
태어났을 때부터 테리와 월셔라는 개들과 함께 자란 베리샤는 강아지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다만 함께 컸던 테리와 월셔가 노환으로 떠나면서 그 슬픔 때문에 한동안 개를 키우지는 않았다.
푸키가 베리샤의 콧등을 가볍게 핥았고, 베리샤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하아, 어떻게 하냐?”
여전히 귀엽고 행복한 눈빛으로 혀를 날름거리는 푸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최준호 그 녀석보다 잘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 평생을 노력해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너도 그런 것 같지?”
푸키는 그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니라고?”
강아지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당연했지만, 꽤 위안받았다.
“감독이 최후통첩을 내렸어. 몇 번의 친선 경기에 선발로 나가서 최준호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마 감독은 선발명단에서 뺄 거야. 그런 사람이니까. 난 이 팀이 참 마음에 드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푸키가 다시 베리샤의 손등을 핥았다.
“계속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을 찾아봐야겠지? 하아… 내가 무슨 빅 리그야. 하하.”
베리샤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한탄을 할 때였다.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네.”
뒤에서 조금은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렸고, 베리샤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최준호는 베리샤의 손아귀에서 무사한 푸키를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베리샤가 자신에 대한 증오로 푸키를 어떻게 할 것 같은 생각에 부리나케 뛰어온 것이다.
“…설마 다 들은 거야?”
“아마도.”
“젠장…”
“그래서 벌써 포기한다고?”
하필이면 경쟁 구도에 있는 최준호에게 속마음을 들켜버린 베리샤였다.
그는 다급하게 피하려고 했지만, 최준호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기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 했던 최준호는 이렇게 빨리 포기하는 베리샤가 너무 맘에 들지 않았다.
베리샤가 불쾌한 표정으로 최준호를 보았다.
“무슨 짓이지?”
“넌 분명히 날 이길 수 없어.”
최준호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이미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한동안 주전 스트라이커로 뛰었던 프리미어리거였으니까.
거기에 15년 가까이 프로 생활을 하면서 얻은 엄청난 정신적, 기술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불쾌하네.”
“그런데 날 이길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되지. 우리 포메이션은 미드필더 자리가 3개가 있거든.”
“크사보와 아이다라 와는 함께 뛰어서 아는데, 나와는 재능이 다른 선수들이야.”
“맞아. 재능이 다르지. 너는 너만의 재능이 있어.”
“그게 무슨 헛소리야?”
“크사보와 아이다라는 너보다 빠르지 않아.”
“……”
“그리고 너처럼 윙어와 스트라이커 포지션을 볼 수도 없고.”
“우리 팀 포메이션이라면 윙어는 필요 없고, 엘링과 양희찬은 이미 확고한 주전이야. 내 자리는 없어.”
“…메짤라.”
메짤라(Mezzala).
Mezz는 이탈리아어로 절반이라는 뜻이고, ala는 날개를 의미했다.
미드필더이면서 동시에 윙어인 선수들.
맨시티에서 뛰고 있는 케빈 드 브라이너 같은 선수들이 이런 유형이었다.
최준호는 주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아직은 소화할 수 없는 역할이었다.
메짤라는 이야기에 베리샤는 손을 뿌리치려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전방의 두 공격수가 뛰어난 수비수에게 막혔을 때, 그리고 우리 팀의 윙백이 상대의 견제를 받고 있을 때, 그들의 공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한데, 크사보와 아이다라는 그 역할을 할 수가 없어.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나처럼 느리거든.”
“……”
“그리고 나는 메짤라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와 같이 뛰었으면 좋겠어. 그럼 좀 더 많은 기회를 생산할 수 있으니까.”
감독도 이야기해 주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 의미가 너무나 명확해서 베리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최준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감독이 메짤라 역할을 원할까?”
“왜 감독이 그렇게 써주기만을 바라지? 가서 메짤라 역할을 맡고 싶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는 건 어때? 마르코 감독이라면 인상 쓰고 거절만 하지는 않을걸?”
베리샤는 가슴을 꾹 움켜쥐고 있던 답답함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메짤라 역할이라.’
최준호는 그런 베리샤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대화의 끝을 맺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너 강아지 좋아하는구나?”
“응. 동물들을 아주 좋아해.”
“동물을 좋아하는 녀석치고는 나쁜 녀석이 없던데.”
최준호는 베리샤에게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경쟁도 경쟁이지만, 팀 승리가 우선이야. 앞으로 잘해보자.”
베리샤는 잠시 최준호를 보다가 손을 내밀어 최준호가 건넨 악수를 받았다.
“고맙다.”
“뭘. 팀 동료니까. 그리고 강아지를 좋아하니까.”
“……”
최준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보며 반갑다는 푸키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돌렸다.
“당장 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몇 분 후.
– 똑똑
‘호출한 녀석이 없는데?’
마르코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TV에서 보고 있던 코미디 프로그램을 얼른 끄고는 책상에 앉아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베리샤가 다시 등장하였다.
“무슨 일이지?”
“아까 하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요.”
“끝나지 않았다라? 일단 거기에 앉지.”
베리샤가 앉자 마르코가 물었다.
“그래. 어떤 이야기?”
“제 포지션 역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능하다면 메짤라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마르코가 조금은 놀랐지만, 표정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 수동적인 녀석이 뭘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은데? 메짤라라….’
마르코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돌려 잠시 전술판을 보았다.
안 그래도 르네 마리치가 떠들고 갔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많은 경기를 하고 나면 상대 팀들은 우리의 장단점을 분석하게 될 거야. 그리고 최준호를 고립시키면 우리 팀의 공격법이 아주 단순해진다는 걸 눈치챌 거야. 그래서 오프 볼 움직임이 좋은 선수가 중원에 하나는 있어야 해. 변주를 주기 위해서.
그리고는 한참 동안 턱을 쓰다듬는 마르코.
“…나쁘지 않군.”
그 말에 베리샤의 얼굴이 환해졌다.
**
잘츠부르크는 이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서 3번의 친선 홈 경기를 더 치렀다.
CSKA 소피아와는 2-1로 승리, SV 쿠흘과는 3-0으로 승리, 브린뵈와의 경기는 5-0으로 이기면서 프리시즌 준비를 꽤 성공적으로 하였다.
세 팀과의 경기에서 3-5-2 , 4-3-3, 4-3-1-2 전술을 제각각 운용하며 승리한 경기라 더 의미있는 프리시즌이었다.
그리고 브린뵈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한 최준호의 플레이는 홈 팬들에게 아주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왜냐하면 전반 45분만 뛰고 3골 1도움이라는 화려한 공격 스탯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프리킥 골과 중거리 슈팅 그리고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칩슛까지.
– 와, 저 녀석 뭐야? 플레이가 미친 것 같아?
– 16살 플레이가 저러면 진짜 사기 아니야?
– 죽이네! 베리샤의 기록을 모두 갈아치울 것 같은데?
– 이번 시즌 우리 팀 공격력이 아주 화끈해. 난 시즌권을 사서 매주 경기를 봐야겠어!
– 과연 챔스에서도 저런 실력을 보일까?
투르르르…
마우스 휠 버튼 굴리는 소리가 끝나고, 최준호는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축구팬들은 어딜 가나 똑같네. 얼마 후면 이제 1부 리그 첫 경기인가?”
잘츠부르크와 함께 우승팀으로 거론되는 라피드 빈과의 개막 경기였다.
최준호는 이내 눈을 돌려서 책상맡에 가만히 앉아 있는 푸키를 보았다.
유기견.
볼리비아에는 유기견이 너무 많아서, 그곳에 두고 가면 안락사당할 수 있다는 말에, 구단에 요청해서 따로 데려왔다.
최준호와 눈이 마주치자 꼬리 풍차돌리기를 펼치는 푸키.
“그럼 내일을 위해서 이제 잘까? 푸키?”
굉장히 똑똑한 녀석인지 푸키는 이내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가볍게 짖었다.
“멍!”